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40] 선잠단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현대적 공간으로, ‘카페 선잠’
- 최근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을 활용하여 여러 상품이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0원 주화에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이 그려져 있음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경주 십원빵’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지역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의 큰 호응을 얻은 십원빵은 현재 대표적인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았고, 전국 각지에 십원빵을 판매하는 매장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일본에도 유사상품인 ‘십엔빵’이 생겨날 정도로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흥천사
-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동595)에 있는 사찰이다.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서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 정릉이 이전되고,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몇 번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다. 1669년(현종 10)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 현재 자리에 중창하였고,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흥천사라고 불리면서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천사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첫 번째 왕후였던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에서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피난생활까지 조선왕실의 역사와 함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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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원
- 소설가이다. 192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누님」과 1930년 『신생(新生)』에 발표한 「수염」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인회’에 참여하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천변풍경」(1936~1937), 「여인성장」(1941~1942) 등을 발표하였다. 근대시기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들의 생활, 서울말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꼽힌다. 돈암동 487-22번지에 땅을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소설 『약산과 의열단』(1947)을 내고 인세 대신 성북동 230번지 집을 받아 이사하였다. 1950년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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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옥
- 성북동 286번지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조재옥은 1935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에 뜻을 두었다. 1939년에는 자신이 거주하던 성북정 하숙집에서 윤명의, 조희영과 회견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연구했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가입하여 조선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김한성의 집에서 독소전쟁 발발 후의 정세에서 일본과 소련의 전쟁은 필연적이므로 그에 따른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폐결핵으로 병보석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4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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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소문로23길 20 건물
- 성북구 동소문로23길 20(동선동4가 178)에 위치한 상가건물이다. 건물의 사용승인일은 1985년 7월 8일이며, 대지면적은 259.8㎡, 연면적은 622.2㎡이다. 건물의 용도는 근린생활시설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이다. 입점상가를 살펴보면, 지하 1층에는 공연예술 창작집단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프로덕션 IDA공간’이 있으며, 1층에는 ‘이모네 빈대떡’, ‘우리마트’, ‘구포국수’, ‘옛날통닭&호프’. 2층에는 ‘여명당구클럽’. 3층에는 ‘박전희색소폰연습실’이 있다. 4층은 주택으로 이용되고 있다. 외부에는 색이 바래진 간판들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은 차량 통행이 많으며, 도로의 폭이 좁은 편이다. 건물 인근에는 1층에 상가를 두고 2층에는 주거시설이 있는 근린생활시설 건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024년 2학기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 조사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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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