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233] 보문동 역사의 산증인 박춘화 이야기
- 금도끼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이번 주 소개해 드릴 분은 1947년 보문동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그곳에 생활 터전을 두고 계신 박춘화 님입니다. 박춘화 님은 보문동의 변화 모습과 인생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주셨습니다. 지면상 모든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기에 보문동 일대의 변화와 지역 이야기를 중심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김교신
- 정릉동에서 거주한 종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일본 유학 당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귀국 후 이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였고, 1930년 5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으로 단독 간행하였다. 1936년 정릉으로 이사한 그는 『성서조선』의 간행을 이어나가며 무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의 머리말인 「조와」에 민족 해방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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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공동묘지
- 일제강점기 미아리 일대(현 길음동)에 설치된 공동묘지이다. 1912년 「묘지규칙」이 발표되면서 묘지로 설정된 지역은 19곳이었다. 그중 1번은 미아리 오패산 일대, 2번 묘지는 숭인면 미아리 일대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미아리 산25번지와 산34번지 일대가 경성부와 숭인면 공동묘지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음동에 위치한 2번 미아리 묘지는 약 69,000평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공동묘지가 기피시설로 인식되면서 1958년대 후반에 이전이 완료되었고, 그 자리는 무허가 건물 철거민 이주단지 등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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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 1939년 2월 창간된 문예종합지이다. 발행인에 김연만, 운영 및 편집에 이태준, 정지용, 권두화·표지화에 김용준·길진섭 등이 잡지발간을 주도하였다. 이태준과 김용준은 잡지를 발간할 당시 성북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문장』은 당시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예 종합지로, 이광수, 김동인, 이효석 등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또한 추천제를 통해 신인을 발굴하였는데, ‘청록파’와 같은 신인들도 『문장』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였다. 그러나 1941년 4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폐간되었고, 이후 1948년 10월 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1호만에 종간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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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8 고대학생 의거
-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벌인 평화시위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당한 일이 자행되었고,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지방도시의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던 가운데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서울에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국회의사당 앞에 도달하여 농성하였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학생들은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주열 열사의 죽음과 고려대학생들의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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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