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40] 선잠단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현대적 공간으로, ‘카페 선잠’
- 최근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을 활용하여 여러 상품이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0원 주화에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이 그려져 있음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경주 십원빵’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지역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의 큰 호응을 얻은 십원빵은 현재 대표적인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았고, 전국 각지에 십원빵을 판매하는 매장이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일본에도 유사상품인 ‘십엔빵’이 생겨날 정도로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엄항섭
-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임시의정원 의원, 청년동맹회 집행위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주석비서로 임명되어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환국하여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6년 귀국한 가족들과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김구와 함께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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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문
-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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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재
- 성북동(현 동소문로 64)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1년 상해로 망명한 뒤 상해한인청년단을 조직하여 그 이사에 선임되었다. 또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통합된 민족혁명당에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 공군의 기계사 직책으로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립하자 그는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에 광복군 총사령부원으로서 충칭[重慶]에서 요인 경호 및 비서직을 맡았으며, 1945년에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항공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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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광세
-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중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영국, 미국에 종속되는 독립을 할 바에는 조선인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여 조선인의 실력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경기도 포천의 깊은 산속에 본거지를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는 한편, 미국으로 하여금 B-29폭격기를 통해 무기를 산속으로 공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임광세는 1944년 10월 포천의 아지트로 입산하려던 도중 체포되어 1945년 6월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동대문(東大門) 돈암(敦岩) 29-55(현 돈암동 29-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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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천 복개공사장 사고
- 1985년 성북천 복개공사장에서 일어난 축대 붕괴 사고이다. 성북천은 1960~1970년대까지 구간을 나눠 복개하였고, 복개한 자리에는 상가아파트를 지었다. 1985년 7월 11일 오후에 성북천 삼선교 상류에서 하천 바닥을 파내는 공사를 하다가, 주택의 축대 밑부분을 깊게 파내는 바람에 축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다. 이 사고로 주택이 붕괴되고 집안에 있던 모녀가 흙더미에 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딸은 숨졌다. 주변의 주택 2채도 심하게 금이 갔으나 다행히 빨리 대피하여 더 이상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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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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