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38] 시대와 교감하는 지역문화콘텐츠의 현장, 〈심우〉와 〈만해예술제〉
- 지역문화를 활용한 콘텐츠의 생산과 활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문화콘텐츠는 경제수단 내지는 디지털 결과물 정도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0년대 초, 우리나라의 국가경제를 부흥시킬 성장동력이 필요하던 시기에 디지털 환경을 통해 그 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성립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문화콘텐츠를 다루는 학계와 지자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콘텐츠를 문화적 부가가치와 비디지털적 결과물까지도 함께 아우르는 쪽으로 인식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김일엽
- 시인, 승려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주장하고, 스스로 관습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소설과 시, 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신여성 모임을 이끌어 나가며 여성들의 교육과 의식 개혁을 주장하였다. 몇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굴곡을 겪은 뒤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성북동에서 잠시 생활하였으며, 삼산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성북동 성라암(星羅庵)을 오가며 지냈는데,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 바로 이곳 성라암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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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삼
- 시인이다. 도쿄에서 출생하여 1936년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고, 1955년 『현대문학』에서 서정주와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본격적인 문단생활을 시작했다. 첫 시집 『춘향이 마음』(1962) 이후 20여 권에 이르는 시집과 시선집을 간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연이은 투병 생활로 인해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과 애상의 주제가 반복되고, 달관적·허무주의적인 색채가 작품에 드러난다. 1967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에는 정릉에서 건강을 회복하면서 「정릉 살면서」라는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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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우
- 성북동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호는 우송(雨松)으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이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을 익히고 교육받았다.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가 되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여 1966년 전형필의 지인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개편시켰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주제로 삼았던 「만다라」를 이어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였고, 국내외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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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창원빌딩
- 성북구 성북로 108에 있는 상가 건물이다. 건물의 사용승인일은 1985년 6월 4일이다. 건축면적은 278.5㎡이고, 연면적은 1333.39㎡이다. 지하에 낙지마당이라는 음식점이 있고, 1층에 옷 가게가 있다. 이외에, 5층까지 다양한 기업과 스튜디오가 입점해 있다. 상가라기보다 사무실 빌딩에 가깝지만, 상업, 영업 활동도 이루어지고 있다. 외관의 꾸밈은 거의 없다. 간판도 거의 달려 있지 않다. 건물의 외관이 오랫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내부의 복도와 계단, 층계참은 넓고, 입점 공간도 상당히 넓다. 내부의 층별 소개에 따르면 규모가 있는 창원금속 서울사무소가 한 층을 다 차지하고 나머지 층은 대부분 두 공간으로 나뉘어 두 상가씩 입점해 있다. 외부엔 주차장이 있으며 지하공간도 있다. 옥상의 통신 설비가 눈에 띄는 요소이다. (2024학년 2학기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 조사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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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