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1910.01.17 - 1986.07.10
인물 개인 문인
소설가이다. 192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누님」과 1930년 『신생(新生)』에 발표한 「수염」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인회’에 참여하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천변풍경」(1936~1937), 「여인성장」(1941~1942) 등을 발표하였다. 근대시기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들의 생활, 서울말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꼽힌다. 돈암동 487-22번지에 땅을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소설 『약산과 의열단』(1947)을 내고 인세 대신 성북동 230번지 집을 받아 이사하였다. 1950년 월북하였다.
돈암동 성북동
  • 구보 박태원 사진
  • 박태원 집터 표지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朴泰遠
  • 이명칭: 구보(仇甫, 丘甫), 몽보(夢甫)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10.01.17 - 1986.07.10
  • 비고: 음력 1909년 12월 7일 생 / 1950년 월북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30-19 (성북로29길 4)
  • 비고: 1940년~ 돈암동 487-22에 거주 1948년 성북동 230-19 거주

근거자료 원문

  • ‘1950년 한국전쟁이 나기 전, 아버지(박태원), 어머니, 그리고 누나 둘, 형, 여동생, 나까지 오 남매가 부모님을 모시고 성북동 230번지에 살 적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구보 박태원의 아들은 말한다. 한국전쟁 중 친구였던 상허 이태준을 만나러 북으로 간 구보 박태원에 관한 연구와 기록은 드문 편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구보는 1958년 백내장 진단과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는 등 30여 년간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1977년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하는 등 북녘에서도 문학 혼을 불살랐다. 그는 1981년 구술 능력마저 잃어 그의 아내가 소설의 최종편(3부)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63-64쪽
  • 1930년대 박태원은 이상과 함께 모더니스트 작가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구보 박태원이 성북동에 둥지를 튼 것은 약산 김원봉의 항일독립투쟁사인 소설 <약산과 의열단>을 내고 인세 대신 받은 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63쪽
  •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으로 첫 집단행동을 한 구인회는 바로 두 번째 행동에 돌입한다. 바로 강연회이다. 첫 번째 강연회는 1934년 6월 30일 열린 “시와 소설의 밤”이었다. 당시 광고는 “시와 소설의 밤”의 주체가 구인회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이었고, 장소는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이다. 역시 종로였다. (중략)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지용, 이상, 박태원 등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상은 1937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정지용, 박태원과는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다. 특히 돈암동에 살던 박태원은 해방 이후 수연산방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태준과 박태원은 월북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0쪽, 232-233쪽
  • 蔡萬植(채만식) 朴泰遠(박태원)으로 대표되는 세태소설은 풍자적인 성격을 강력히 드러내는데 전자는 사회구조적인 접근법으로 들어가고 후자는 지식인의 내면에서 현실로의 발산법을 써서 대조를 이룬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1.
  •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은 1909년 서울 수중박골(경성부 다옥정 7번지)에서 태어났다. 박태원의 맨 처음 이름은 박점성(朴點星)이었는데, 등 한쪽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태원’이라고 이름을 고친 것은 1918년 8월 14일이다. 박태원은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서구화, 현대화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도시화 과정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청계천변에서 성장하였다. 이러한 주변 환경이 박태원이 문학작품과 삶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한 배경이 되었다. 박태원의 집안 환경을 살펴보면, 박태원의 아버지는 제약업에 종사하였고, 숙부 박용남은 한국인 최초의 개업의였다. 박태원이 문단에 등단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숙부 소개로 만난 당시 문단에서 인정받고 있던 백화 양건식의 도움이 컸다. 고모 박용일 역시 신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으로서, 춘원 이광수의 아내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박태원이 이광수에게 사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문학적인 소양을 기르는데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박태원이 맨 처음 발표한 글은「달마지」로, 제일고보 2학년 때 잡지『동명(東明)』‘소년칼럼’난에 당선된 작품이다. 박태원은 스무 살 가을 도쿄[東京]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문단에 나와 이태준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간다.
    원문에 나온 박태원의 생년은 음력 생일(음 1909.12.07)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 1933년 이태준, 이상, 정지용, 김기림 등과 함께‘구인회’에 가입, 활동하였고, 다음 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했다. 그리고 1938년에 최초의 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내놓으면서 “가르치심을 받아옵기 십년 이제 이른 첫 창작집을 세 번 절하와 삼가 춘원 스승님께 바치옵니다.”라고 적었다. 이는 박태원이 문단에 진출하는데 이광수와 양건식, 이은상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태원은 당시 서울 생활 풍습과 서울말을 작품 속에서 가장 잘 표현하여 ‘경아리 문학’을 수립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 박태원은 ‘구인회’ 동인들 중에서도 특히 이상과 각별하였다. 박태원은 이상을 모델로 「애욕」, 「제비」, 「염천」 등의 작품을 썼고, 이상은 ‘하융(河戎)’이란 이름으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 박태원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 온 이태준, 안희남, 오장환 등을 따라 갑자기 월북한다. 월북 작가이기에 지금까지도 박태원의 생애나 문단활동에 대해서 정리된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월북 작가 중 만년까지 활동을 했고, 북한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 1909-1986 서울 출생. 소설가이다. 192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누님」과 1930년 《신생新生》에 발표한 「수염」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인회’에 참여 하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여인성장」 등을 발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이름이 났다. 근대시기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들의 생활, 서울말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꼽혔다. 이광수에게 문학을 배웠고, 시인 이상, 이태준과 절친하였다. 돈암동 487-22번지에 땅을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약산과 의열단』의 인세 대신 성북동 230번지 집을 받아 이사하였다.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던 초가집이었다. 2013년 조성된 ‘만해의 산책공원’ 부근이 옛 집터이다. 1950년 월북하여 북한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23쪽
    원문에 나온 박태원의 생년은 음력 생일(음 1909.12.07)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 서울 중구 다동 출생. 1940년 돈암동 487-22번지에 대지를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1948년 『약산과 의열단』의 인세 대신 성북동 230번지 집을 받아 이사하였으며 1950년에 월북했다. 시인 이상, 소설가 이태준과 절친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 · 서울 출생(1908~1987),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은 성북동 문인으로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으나, 「천변풍경」 등 대표작을 성북동 거주시에 집필하였으며, 구인회의 중심 멤버로도 활동. · 성북동 문인들의 외연을 넓히는 과정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호명할 필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원문에 나온 박태원의 생년은 잘못 기술된 것이다. 박태원의 생년은 1910년 1월 17일(음 1909.12.07)이다.
  • · 「해금작가 박태원 아들 재영씨」, 『동아일보』 1988. 7. 23.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 · 박일영,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문학과지성사, 201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 2. 인곡 배정국과 박태원 ○ 배정국이 “약산과 의열단”의 인세 대신에 성북동의 집을 줌 ○ 돈암동 487-22(1940년- )에서 성북동 230로 이사(1948년) ○ 구보 박태원은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할아버지 ※ 박태원의 둘째 딸 “소영”씨의 아들: 영화감독 봉준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49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박태원 주소(현재): 성북동 230 분야: 문학(소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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