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서 예술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글이 아닌 다른 수단을 통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특히 그림의 경우에는 미적 표현이 강조되어 시각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화가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성북구에 거주하며 활동했던 화가들도 성북 곳곳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습니다. 수화 김환기는 성북동의 자연을 매우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의 화가 이중섭도 정릉동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의 작가인 김성환 화백의 <6.25 스케치> 연작은 당시 성북구 일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습니다.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성북구 곳곳에 그려진 벽화와 표지석의 그림을 통해서도 성북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북을 거쳐갔던 위대한 화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과 성북천·성북동 일대에 그려진 벽화들, 마전터·북바위 전답터 등 여러 장소의 표지석을 통해 성북의 풍경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만화가, 화가이다. 1955년부터 신문에서 4컷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을 연재하면서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아낸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고, 인물캐릭터 200여개를 만들었다. 〈고바우영감〉은 1950년부터 『사병만화』·『만화신문』 등의 기관지와 『월간희망』 등에 수록하다가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장기연재하였다. 이후 『조선일보』·『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자리를 옮기다 2000년 9월 끝맺는다. 〈고바우영감〉은 14,139회에 걸쳐 연재한 한국 최장수의 시사만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생존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박수근 화백, 박고석 화백을 이웃으로 두고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릉 입구 오두막 선술집에서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화가이다. 1911년 서울에서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화단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을 사사하고 북경 보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등단한 이래, 문인화적 필치에 현대적인 기법을 더하여 한국적 수묵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조선미술사』(1948), 『동양미술사』(1971), 『동양미술론』(1980) 등을 저술하여 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으며, 이화여대 홍익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돈암동 전차종점 인근 주택에 거주한 바 있으며 기와집이 어우러지는 돈암동 풍경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한국미술사학자, 화가, 평론가, 수필가이다. 1920년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통학을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고 동양화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1934년 노시산방(성북동 274-1)로 이사하여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1944년 노시산방은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1949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는 한국의 미술사를 다루면서 대화하듯이 쉽게 읽히도록 구어체를 사용하여 저술하였다. 수필로는 1948년에 출간한 『근원수필』이 있다. 6.25 전쟁 이후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였다.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이다.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아 재능을 인정받았다.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 후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8년 돈암동(현 삼선동)에 30평쯤 되는 집을 구해 살다가 6.25전쟁 이후 서울대 공동관사로 옮겼다가 다시 삼선동에 집을 구해 이사했다.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무명 정치수인을 위한 모뉴멘트」를 출품해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공모전에 입상했다. 작품의 재료인 나무, 돌의 본연의 물성을 드러내는 추상조각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전설」(1958), 「3.1운동 기념상」(1963), 「가족」(1965) 등이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화가이다. 1933년 동경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서 공부하고, 1937년 귀국 이후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였다. 자연을 통하여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자 노력했던 그는 항아리, 달, 별, 학, 구름, 밤하늘 등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소재를 다루었다. 1944년 김향안과 결혼하여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이어받아 자신의 호와 아내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이라 이름 붙였다. 1948년 종로구로 이사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집을 마련했다. 그의 수필 「산방기」에는 이곳에서의 생활과 성북동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수향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 수월암 부근이며,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가이다.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하였다. 1955년 정릉동에 자리 잡고 서라벌예대와 홍익대에 출강하였다. 박경리, 천승세 등 작가들의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돈암동 전차 종점 근처에 작업실을 두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지리산을 다니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여 ‘산의 화가’라고도 불리웠다. 1978년 정릉동에서 동소문동으로 이사하고, 1983년에는 처남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여 지은 명륜동 집 아틀리에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작품으로는 〈범일동 풍경〉(1951), 〈가족〉(1953), 〈외설악〉(1981) 등이 있다.
동양화가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사실묘사를 기초로 한 화조, 인물, 산수 등을 그렸으나 1950년대부터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운보 김기창과 결혼한 후 1954년 성북동 55-1번지(현 운우미술관)에 집을 마련하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10여 차례의 부부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1966~1967년 성신여자사범대학(현 성신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판화 수업 등으로 뉴욕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작품으로 「부엉이」(1953), 「노점」(1956), 「작품 19」(1965) 등이 있다.
동양화가이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등과 동연사(同硏社)라는 서화단체를 조직하고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고 하였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이당 김은호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새로운 동양화풍을 익혔다. 1937년부터는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직접 사생하면서 새로운 화풍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4년 새로 터를 잡았던 ㄷ자형 돈암동 한옥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이름 짓고 한편에 위치한 화실에서 고유 기법인 ‘소정 양식’을 완성했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했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서양화가이다.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일본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1941년에 귀국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뒤 평생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인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96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교회와 비둘기〉, 〈귀로〉, 〈성북동 풍경〉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100세 기념전을 연 뒤 같은 해 성북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릉동에 거주한 화가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 화단에서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의 모임인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 부산, 제주도로 피난을 다니며 서양화 단체인 ‘기조전(其潮展)’ 등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부터 캔버스나 물감을 구하지 못하면 송곳이나 연필로 담뱃갑에 붙어 있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개인전을 열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돈암동에 있던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졌다. 병원을 나와 잠시 근처 정릉동에 살던 한묵의 집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흰소〉, 〈투계〉, 〈사내와 아이들〉 등이 있다.
근현대의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의 작품이다. 김종영은 한국 1세대 조각가로 근대조각의 선구적 작가이자 교육자로 평가된다. 그는 삼선동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삼선동의 풍경을 드로잉 소재로 자주 다루었다. 1973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커다란 전신주 뒤로 경사지대에 주택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당시 삼선동의 풍경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현재 김종영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근현대의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의 작품이다. 그는 한국 조각의 1세대로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는 삼선동에서 20년 살면서 자신이 사는 삼선동을 그림의 소재로 자주 다루었다. 1976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채도가 낮아 차분한 느낌을 준다. 현재 김종영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북의 화가이자 수필가였던 김용준(1904-1967)의 작품이다. 그는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한국 미술사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수필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은 그가 1947년 수향산방(현 환기미술관)에 찾아가 김환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성북의 화가이자 수필가였던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작품이다. 그는 광복 전후 한국의 신세대 화단을 주도하면서 날카로운 비평으로 한국 미술사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수필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용준은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주었고, 김환기·김향안 부부는 그 이름을 수화의 수(樹) 자와 김향안의 향(鄕) 자를 따서 ‘수향산방’이라 불렀다. 1944년 김용준은 <수향산방 전경>이란 그림을 남겼는데 이 그림은 키가 큰 김환기와 작고 아담한 김향안이 수향산방 집 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김종영미술관으로부터 제공받은 「동네풍경」이다. 김종영은 삼선동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당시 동네의 풍경들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의 제목이 '동네풍경'인 것과 제작 시기가 김종영이 삼선동에 거주하였던 1970년대인 것으로 보아 삼선동 일대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정보 : 김종영, 「동네풍경」, 38x52㎝, 종이에 펜과 수채, 1970년대 중반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이중섭의 <정릉 풍경> 작품 이미지이다. 작가가 생애 마지막 시기에 머물렀던 정릉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은 겨울 무렵으로 추정된다.
작품 정보 : 이중섭, <정릉 풍경>, 1956년, 종이에 연필, 크레용, 유채, 43.5x29.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함대정(1920-1959)의 <정릉골짜기> 이미지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에 해당하며, 1950년대에는 입체주의적, 추상적 경향의 그림들을 제작한다.
작품 정보 : 함대정, <정릉골짜기>, 1940년, 캔버스에 유채, 59x7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만화가이자 화가인 김성환 화백이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105점의 연작이다. 1949년 18세의 나이에 만화가로 데뷔한 김성환은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크로키, 동양화, 만화풍 등 다양한 기법으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그 해 9월 말 서울 수복까지와 그 이후 군에 복무하면서 종군화가로서 남긴 그림, 이렇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전자는 그가 살던 정릉동을 비롯하여 돈암동, 월곡동, 미아리고개 등을 그림으로써 전쟁 초기 성북구 일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시각적 자료이다. 스케치의 모서리에 적어놓은 날짜와 장소는 이 작품의 기록성을 강화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이미지이다. 좌측 상단에 표기한 날짜와 장소를 통해, 전쟁 발발 직후 정릉 일대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7.6x22.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동 종점> 이미지이다. 피난민들로 혼잡한 돈암동 전차종점의 모습을 그렸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동 종점>,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8.7x23.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반격을 준비하는 국군> 이미지이다. 화면 속 장소 표기를 통해 작품의 배경이 돈암교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반격을 준비하는 국군>,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8.7x2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교 부근> 이미지이다. 돈암교 주변 피난민들의 모습을 만화적 필치로 묘사하였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교 부근>,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3x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위에서 청량리쪽> 이미지이다. 치솟는 화염을 보고 있는 뒷모습에서 전쟁의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위에서 청량리쪽>,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8.7x2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 공산군의 서울 입성> 이미지이다. 소달구지를 타고 돈암동으로 들어오는 공산군의 모습을 그렸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 공산군의 서울 입성>,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8.6x24.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정릉부근에서 들리는 총성소리> 이미지이다. 6월 28일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이다. 김성환의 <6.25스케치> 연작에서는 밀짚모자를 쓴 남성의 뒷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북한군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밀짚모자를 쓰고 농부 행세를 하고 다녔던 작가 본인의 모습이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정릉부근에서 들리는 총성소리>,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1x25.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의 국군병사의 사체> 이미지이다. 전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의 국군병사의 사체>,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4x25.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미아리에서 월곡까지> 이미지이다.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세 컷으로 나누어 그렸다. 김성환의 <6.25스케치> 연작에서는 밀짚모자를 쓴 남성의 뒷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북한군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밀짚모자를 쓰고 농부 행세를 하고 다녔던 작가 본인의 모습이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미아리에서 월곡까지>,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5x26.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절규하는 남녀> 이미지이다. 가족을 잃은 것으로 보이는 남녀가 절규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우측 하단의 표기를 통해 배경이 월곡동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절규하는 남녀>,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8.6x25.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국군전투기의 폭격> 이미지이다. 우측 하단의 표기를 통해 월곡동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국군전투기의 폭격>,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5x26.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6월 30일 소달구지에 올라탄 북조선군> 이미지이다. 우측 하단의 표기를 통해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오는 북한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30일 소달구지에 올라탄 북조선군>,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3x15.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9월 다락방에서의 은신> 이미지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시기, 정릉동 집 다락방에 숨어서 지내야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다락방에서의 은신>,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9.2x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9월 27일 도망치는 북한군> 이미지이다. 서울 수복 하루 전날 밤, 정릉 공청우물 앞을 지나 도망가는 북한군의 모습을 그렸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7일 도망치는 북한군>,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6.1x25.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철모 쓴 국군병사들> 이미지이다. 하단 표기를 통해 서울을 되찾은 9월 28일, 돈암동 전차 종점을 배경으로 국군의 모습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철모 쓴 국군병사들>,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26.9x16.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체 위를 자동차가 통과하다> 이미지이다. 우측 하단의 표기를 통해 돈암교가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체 위를 자동차가 통과하다>,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6.8x26.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이 제공한 김성환의 <6.25스케치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 이미지이다. 우측 하단의 표기를 통해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작품정보: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 1950, 종이에 연필, 채색, 14.6x19.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성북의 동양화가 박래현[1920-1976]의 작품이다.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 알려진 박래현은 1944년 동경여자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고 1956년 국전에서 이 작품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노점>은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수레, 집 등은 모두 하나의 시점이 아닌 다시점에서 관찰되고 분석되어 새로운 색과 면으로 재형성되었다. 그 결과 이전 한국화의 관습적 영역에서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추상성의 추구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 작품은 전통적 화론을 완전히 뒤집는 현대적 한국화의 도래를 상징하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했던 화가 변관식(1899-1976)의 작품이다. 1954년 돈암동 한옥의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짓고 한편에 있는 화실에서 ‘소정양식’을 완성하였다. 갈필(渴筆)의 적묵법과 파선법 위에 갈색으로 응결시켜 짙고 거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소정의 화풍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변천하였다. 1917-1936년까지의 초기는 주로 서화미술원이나 일본 유학 등을 통하여 그림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화풍 형성을 위한 기반을 다진 시기로, 1920년대 후반부터는 거친 화면 처리와 시선의 다각적인 전개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북정협>은 1928년 작품으로, 당시 일본 남화가들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서예가 배정국의 가옥이었던 승설암(성북구 성북로 154)을 그린 그림이다. 상허 이태준[1904-?]의 요청으로 승설암 사랑채에서 소전 손재형이 즉석으로 그렸다. 집주인 배정국을 비롯하여 소설가 이태준, 서양화가 김환기, 서예가 손재형, 동양화가 조중현, 치과의사 함석태 등이 담겨 있다. 성북동을 중심으로 교류했던 소설가, 화가, 서예가들이 등장해 당시 승설암이 문화예술인들의 교류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근현대의 서양화가 김환기[1913-1974]의 작품이다. 김환기는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 작품은 김환기가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에게 보낸 연하장으로, 당시 파리 유학 중이었던 1957년에 보낸 것이다. 화가의 독특한 작품 세계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의 서양화가 윤중식(1914-2012)의 작품이다. 윤중식은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전에는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 작품은 성북동 골짜기의 비둘기를 소재로 다루었는데, 저자는 유성처럼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보며 황홀함을 느끼고 있다.
근현대의 화가 김기창[1913-2001]의 작품이다. 김기창은 일제강점기에 김은호 문하에서 수학한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입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한국의 전통 회화와 현대 미술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성북구 성북동 55-1번지에 자리를 잡고 아내 박래현과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작품은 성북동 자택의 정원을 소재로 다루었다. 저자의 지역과 집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마른대미고개·성황당나무·푸석산 표지석 사진이다. 표지석에 붙은 안내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른대미고개란 화랑로를 따라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평지가 시작되므로 고개가 바로 끝난다는 뜻으로 '대미고개'라 불렀고, 언제부터인지 마른대미고개라 하였다 한다. 이 마루턱에 있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님이 들어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성황당나무라 하였고, 이 나무는 동네의 재앙을 막아주고, 아들을 원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또 성황나무가 있는 고개 전체를 푸석산이라 하는데 성황나무가 워낙 크고 사철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마른대미고개·성황당나무·푸석산 표지석 사진이다. 표지석에 붙은 안내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른대미고개란 화랑로를 따라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평지가 시작되므로 고개가 바로 끝난다는 뜻으로 '대미고개'라 불렀고, 언제부터인지 마른대미고개라 하였다 한다. 이 마루턱에 있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님이 들어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성황당나무라 하였고, 이 나무는 동네의 재앙을 막아주고, 아들을 원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또 성황나무가 있는 고개 전체를 푸석산이라 하는데 성황나무가 워낙 크고 사철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