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1월 『서북학회월보』에 실린 기행문이다. 1910년 10월 박은식, 최린, 이은우, 한상우 등 서북학회 회원들이 경국사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 기행문은 시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쌍성일민(雙城逸民)'이라는 필명으로 경국사를 유람한 경위와 이튿날 경내를 둘러본 소회를 적은 것이다. 저자는 경국사에서 최린과 이은우, 한상우 등과 만나 시를 함께 지으며, 상영지정(觴詠之情)을 풀어낸다. 다음날 이 절의 승려들에게 절의 역사를 물었지만 모두 제대로 알지 못하자 글에 말미에 경국사의 역사를 적는 것으로 기행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절의 역사에조차 몽매한 경국사 스님들을 준열히 꾸짖는 대목에서는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 특유의 ‘진보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도성 안 인사들은 다시 경국사를 찾아 격조 있는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어느 날 경국사에서 열린 모임에는 박은식朴殷植(1859∼1925), 최린崔麟(1878∼1958), 이은우李恩雨, 한상우韓相愚 등 서북학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1909년 11월호에 실린 기문記文과 박은식 등이 지은 한시 5편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쌍성일민雙城逸民’이라는 필명의 인사가 쓴 「청암사기靑巖寺記」는 이들이 경국사를 유람한 경위와 이튿날 경내를 둘러 본 소회를 적은 글이다. 다음은 그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삼각산의 한 지맥이 높이 치솟아 웅장한데 곧바로 동남쪽으로 치달리면 처음에는 굽이쳐서 둘러 감싸다가 마지막엔 평온하게 놓인다. 이 지맥의 끝부분이 왼편으로 갈라져서 굽이굽이 맑은 계곡을 이루고 오른편으로 열지어서 점점이 푸른 산록을 만들어내는데 그 가운데에 청암사가 있다. 절의 결구는 매우 왜소하여 그 유적하고 청한함이 도선道禪과 일인逸人이 거하는 곳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속된 생각에 젖어 빨리 돌아와 이 절을 한 번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는데, 금년 가을 서울 장안을 객으로 노니다가 갑자기 성 안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잠깐 성 밖으로 나가 머물러 숙박하기로 계획했다. 다만 가면서 웃고 떠들 동행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 날이 며칠 되었다.
하루는 편지를 받았는데 벗 최린崔麟이 나와 함께 유람하러 가자는 뜻으로 보낸 것이어서 마침내 벌떡 일어나 크게 한숨을 쉬면서 “질병은 진실로 환난 중에서도 가장 삼가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는 전염됨이 성화와 같으니 비록 가족이나 부자 같이 친밀한 사이일지라도 서로 피하여 보지 않은 것이 예사이다. 지금 최군은 쓸쓸한 나그네 신세로 덩굴과 바위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일신의 안위는 스스로 보전할 겨를도 없이 동동거릴 뿐이지만 끝내 나를 생각해주고 멀리하여 버리지 않았다! 내 비록 완고하기가 돌 같지만 어찌 그 정을 느껴 알지 못하겠는가!”고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겸곡노사謙谷老師 박은식 씨에게 가서 상황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함께 행장을 꾸렸다. 성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푸른 산골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게 열지어선 것을 보고 계속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천천히 그 가운데로 들어갔다. 산의 중허리쯤 되는 곳에 당도하니 한 방에서 문을 열고 우리를 맞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바로 최崔군과 이은우, 한상우 군이 막 술상을 차리고 자리를 쓸어낸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밤을 타서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스님 몇 분을 초대하여 함께 시 한 수 씩 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스님들은 모두 문장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했으나 그 중에 박朴 처사라는 분이 계셔서 시짓기에 능한 고로 함께 상영지정觴詠之情을 풀어내었다.
다음날 이 절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여러 승도僧徒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호한 이야기만 하고 가버리니 맨 처음 창립 사적事蹟에 관해서는 애초에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오호라! 승도 제군들이여! 무릇 작은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절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의 땅으로 자처하는 곳이고 제군 역시 석가여래의 문도로서 특히나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반드시 먼저 세상을 구하겠다는 주의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던가. 만약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상의 흥망역사를 살핀 연후에야 참되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제군들은 자기가 어떠한 연혁과 역사를 가졌는지도 살피지 않았으니 그 깨달음의 헛됨이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제군들이 불서의 뜻은 분명히 알고 있으나, 제군들의 배우지 않음은 미루어 알 수 있다. 백운유수 속에서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 제군들이여 이것이 도를 실천하는 것인가? 도는 도이나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련다. 홍진이 자욱한 거리로부터 발을 끊는 것, 제군들이여 이것이 낙이라 할 수 있는가? 낙은 낙이나 내가 부러워하기에는 부족하다. 단 제군들에게 구구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진실로 석가의 도를 배우고 석가의 행실을 실천하려거든 외교 사절로 바다를 건너가 임진왜란으로 잡혀 간 조선 포로들을 데리고 온 송운대사松雲大師(사명당 유정)의 씩씩한 기상을 배우고, 난리를 만나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싸운 영규靈圭(임진왜란시 승병장) 어른의 큰 용기를 본받는 것이다. 그러면 제군들의 가치는 비단 불문佛門에서 빛날 뿐 아니라 국가만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며 장차 극락세계에 가서 최후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니 제군들은 모두 이를 유념할진저.
이미 붓을 들었으니 부득불 간략하게 들은 것이나마 기록해 두어야겠다. 이 절에서 북쪽으로 5리 쯤 올라가면 옛날 백파선사百波禪師가 강도講道한 암자가 있었는데 암자가 닫힌 뒤 이 절을 지었으나 언제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지난 철종 때 경국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하며 그 후 대원군 왕전하께서 여러 번 이곳에 오셔서 불전에 참배했다고 할 뿐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최린, 박은식 등 서북학회 동지들과 경국사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도 재미있지만, 자신이 속한 절의 역사에조차 몽매한 경국사 스님들을 준열히 꾸짖는 대목에서는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 특유의 ‘진보적’ 사고방식을 이 조그만 산사에 와서도 가차 없이 실천으로 옮기는 광경도 흥미롭다.
도성 안 인사들은 다시 경국사를 찾아 격조 있는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어느 날 경국사에서 열린 모임에는 박은식朴殷植(1859∼1925), 최린崔麟(1878∼1958), 이은우李恩雨, 한상우韓相愚 등 서북학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기록을 남겼다.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1909년 11월호에 실린 기문記文과 박은식 등이 지은 한시 5편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쌍성일민雙城逸民’이라는 필명의 인사가 쓴 「청암사기靑巖寺記」는 이들이 경국사를 유람한 경위와 이튿날 경내를 둘러 본 소회를 적은 글이다. 다음은 그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삼각산의 한 지맥이 높이 치솟아 웅장한데 곧바로 동남쪽으로 치달리면 처음에는 굽이쳐서 둘러 감싸다가 마지막엔 평온하게 놓인다. 이 지맥의 끝부분이 왼편으로 갈라져서 굽이굽이 맑은 계곡을 이루고 오른편으로 열지어서 점점이 푸른 산록을 만들어내는데 그 가운데에 청암사가 있다. 절의 결구는 매우 왜소하여 그 유적하고 청한함이 도선道禪과 일인逸人이 거하는 곳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속된 생각에 젖어 빨리 돌아와 이 절을 한 번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는데, 금년 가을 서울 장안을 객으로 노니다가 갑자기 성 안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잠깐 성 밖으로 나가 머물러 숙박하기로 계획했다. 다만 가면서 웃고 떠들 동행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 날이 며칠 되었다.
하루는 편지를 받았는데 벗 최린崔麟이 나와 함께 유람하러 가자는 뜻으로 보낸 것이어서 마침내 벌떡 일어나 크게 한숨을 쉬면서 “질병은 진실로 환난 중에서도 가장 삼가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는 전염됨이 성화와 같으니 비록 가족이나 부자 같이 친밀한 사이일지라도 서로 피하여 보지 않은 것이 예사이다. 지금 최군은 쓸쓸한 나그네 신세로 덩굴과 바위 가운데서 방황하면서 일신의 안위는 스스로 보전할 겨를도 없이 동동거릴 뿐이지만 끝내 나를 생각해주고 멀리하여 버리지 않았다! 내 비록 완고하기가 돌 같지만 어찌 그 정을 느껴 알지 못하겠는가!”고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겸곡노사謙谷老師 박은식 씨에게 가서 상황을 소상히 말씀드리고 함께 행장을 꾸렸다. 성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푸른 산골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게 열지어선 것을 보고 계속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천천히 그 가운데로 들어갔다. 산의 중허리쯤 되는 곳에 당도하니 한 방에서 문을 열고 우리를 맞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바로 최崔군과 이은우, 한상우 군이 막 술상을 차리고 자리를 쓸어낸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밤을 타서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스님 몇 분을 초대하여 함께 시 한 수 씩 지을 것을 의논하였다. 스님들은 모두 문장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했으나 그 중에 박朴 처사라는 분이 계셔서 시짓기에 능한 고로 함께 상영지정觴詠之情을 풀어내었다.
다음날 이 절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여러 승도僧徒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호한 이야기만 하고 가버리니 맨 처음 창립 사적事蹟에 관해서는 애초에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오호라! 승도 제군들이여! 무릇 작은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절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의 땅으로 자처하는 곳이고 제군 역시 석가여래의 문도로서 특히나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반드시 먼저 세상을 구하겠다는 주의로 가르치고 배우지 않던가. 만약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상의 흥망역사를 살핀 연후에야 참되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제군들은 자기가 어떠한 연혁과 역사를 가졌는지도 살피지 않았으니 그 깨달음의 헛됨이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제군들이 불서의 뜻은 분명히 알고 있으나, 제군들의 배우지 않음은 미루어 알 수 있다. 백운유수 속에서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 제군들이여 이것이 도를 실천하는 것인가? 도는 도이나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련다. 홍진이 자욱한 거리로부터 발을 끊는 것, 제군들이여 이것이 낙이라 할 수 있는가? 낙은 낙이나 내가 부러워하기에는 부족하다. 단 제군들에게 구구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진실로 석가의 도를 배우고 석가의 행실을 실천하려거든 외교 사절로 바다를 건너가 임진왜란으로 잡혀 간 조선 포로들을 데리고 온 송운대사松雲大師(사명당 유정)의 씩씩한 기상을 배우고, 난리를 만나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싸운 영규靈圭(임진왜란시 승병장) 어른의 큰 용기를 본받는 것이다. 그러면 제군들의 가치는 비단 불문佛門에서 빛날 뿐 아니라 국가만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며 장차 극락세계에 가서 최후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니 제군들은 모두 이를 유념할진저.
이미 붓을 들었으니 부득불 간략하게 들은 것이나마 기록해 두어야겠다. 이 절에서 북쪽으로 5리 쯤 올라가면 옛날 백파선사百波禪師가 강도講道한 암자가 있었는데 암자가 닫힌 뒤 이 절을 지었으나 언제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지난 철종 때 경국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하며 그 후 대원군 왕전하께서 여러 번 이곳에 오셔서 불전에 참배했다고 할 뿐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최린, 박은식 등 서북학회 동지들과 경국사로 나오기까지의 과정도 재미있지만, 자신이 속한 절의 역사에조차 몽매한 경국사 스님들을 준열히 꾸짖는 대목에서는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 특유의 ‘진보적’ 사고방식을 이 조그만 산사에 와서도 가차 없이 실천으로 옮기는 광경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