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에 있던 국가기관으로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하였다. 석관동 본청 자리는 의릉이 있어 넓은 부지가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다. 본 청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은 1962년부터 자리를 잡았다. 1968년 항공사진을 보면, 전체 부지에서 본관(멸실)과 운동장(멸실), 강당(현존) 등 몇 개의 건물과 도로구조가 완성되었고 천장산 주변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세워진 남산 중앙정보부 분청은 정치공작, 대공업무 등 이른바 ‘핵심업무’를 담당했고, 석관동 본청에서는 자료 수집·보관, 교육·훈련, 해외 업무 등 배후 기능을 담당했다. 1995년 청사가 내곡동으로 옮겨가며 석관동 본청은 사라지고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서 있다.
석관동과 남산
보통은 ‘남산’의 청사가 잘 알려져 있어서 중앙정보부 하면 남산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 본청은 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 현재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지에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시작은 서울 중심부였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두 명의 차장은 서울 태평로에 있는 국회 제3별관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2국은 남산 북쪽 숭의학원 인근에, 3국은 무교동 서린호텔 자리에, 서울 분실은 남산3호 터널 입구 사무실을 사용했다. 창립 초기라 6개의 국과 실이 모두 들어갈 자리도 구할 수 없었고, 보안상의 이유로 다 모아 둘 수도 없었다. 곧 본청을 만들 곳을 찾았다. 석관동 자리는 이영근이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다니다 선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관동 본청 자리는 의릉이 있어 넓은 부지가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 본청 건물에서는 주로 자료 수집 · 보관, 교육 · 훈련, 해외 업무 등 배후 기능을 담당했다.
남산 청사는 중구 예장동 4-5번지 일대에 있었다. 이 남산 청사에서 정치공작, 대공업무 등 이른바 ‘핵심업무’를 담당했다. 부장을 비롯한 차장 등 핵심 인사들도 본청보다는 주로 남산 청사에 머물렀다. 대통령이 부르면 달려가기 편했기 때문이다. 1972년 남산 본관이 만들어지는데, 이미 당시까지 40여 동의 건물을 사용했다. 공포의 남산시대는 이렇게 막을 열었다.
하지만 양쪽의 업무가 확연히 갈라진 것은 아니었다. 석관동 청사에서도 고문이 자행됐다. 동백림사건의 당사자들이 끌려간 곳 역시 남산과 석관동 청사였다. 후술하겠지만 7 ·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곳도 석관동 본청의 강당이었다. 그러니 ‘핵심업무’를 진행하는 곳이 아니라고 해도, 본청 직원들의 기세도 대단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술을 먹고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일도 일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술을 마시고 담벼락에 소변을 본 사람들을 직원들이 구타하는 일도 있었다. 주민들은 석관동이 개발되지 않은 이유를 중앙정보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개발이 아니라 미개발의 근거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때문에 주민들의 주장을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기세등등한 중앙정보부의 본청이 석관동에 있었고 이곳의 미개발, 직원들의 행패 등을 포함하여 석관동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주민들의 믿음과 기억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그리고 내곡동 시대
막강한 권력기관이자 정권 유지의 수단 중앙정보부 시대의 끝은, 바로 그 수장인 중정부장의 손에 의해 이뤄진다. 중정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한 것이다. 심지어 그 암살은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중정 소유의 ‘안전가옥(이른바 안가)’에서 일어났다. 10 · 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1981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바뀔 때까지 국가정보기관 수장의 임기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이것은 12 · 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아직 완전하게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립하며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한다. 중앙정보부는 그 이후 국가안전기획부라는 명칭으로, 기존의 중앙정보부보다 대공, 대북, 방첩업무와 정보수집 업무를 강화하여 확대한 형태로 발족한다.
안기부 역시 정권 사수를 위한 기관이었고, 중앙정보부의 임무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청사를 바꿀 이유가 없었다. 남산과 석관동의 청사는 그대로 유지됐다. 특히 1961년부터 긴 시간 중정에게 자리를 빼앗긴 의릉은 왕릉이 아니라 정원의 역할을 했고, 거기에 맞추어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 중정 직원들의 횡포는 안기부 직원들의 횡포로 바뀌었을 뿐 주민들이 당하는 억압도 변하지 않았다. 이 석관동과 남산의 중앙정보부 시대는 1995년 양 청사가 모두 내곡동으로 옮겨가며 끝난다. 남산도 의릉도 이때 비로소 시민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옮겨간 내곡동 역시 조선왕릉인 헌릉과 인릉(헌인릉)이 위치한 곳이다. 또 왕릉 옆으로 간 것이다. 서울 안에 대규모 시설을 수용할 부지가 왕릉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이라는 강력한 기관이 아니었다면, 또 정권수호기관이 아니었다면, 국가가 쉽게 왕릉 옆 부지를 내주었을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 의릉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헌인릉의 일부 권역은 다시 시민으로부터 멀어졌다.
석관동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창설한 국가정보기관이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청사의 후보지 중에서 의릉을 정했다고 하며 본 청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은 1962년부터 자리잡게 된다. 1968년 항공사진을 보면, 전체 부지에서 본관(멸실)과 운동장(멸실), 강당(현존), 현 미술원 전문사동, 현 무대제작 실습장 및 회전교차로 등 몇 개의 건물과 도로구조가 완성되었고 천장산 주변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정보기관의 기능이 확장되면서 현대사의 기억으로 언급되는 중앙정보부는 남산에 분청을 열게 된다. 남산에 중앙정보부 분청이 세워지면서, 고문으로 유명했던 남산 분청은 주로 국내 분야를 담당했고, 석관동 본청은 해외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남산의 중앙정보부는 네거티브 헤리티지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며 남산의 북사면에 자리한 많은 건물들이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남아 서울유스호스텔, 서울소방재난본부, 문학의 집 서울 등으로 사용되었다.
석관동 중앙정보부에서는 국내외 전 분야에 다양한 정보활동이 이루어졌는데, 1964년에는 이집트에서 볍씨를 훔쳐왔고, 1966년 북한이 잉글랜드월드컵 8강에 진출하자 당시 부훈이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이름을 딴 ‘양지축구단’을 창단했다고 한다. 이 축구단 선수들은 군복무를 대신하면서 실업팀 수준의 월급을 받는 등 특급대우를 받았고, 바로 이 석관동 중앙정보부 내 잔디구장에서 맹훈련을 했다고 전한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저 캄캄한 ‘양지’의 꿈 석관동 중앙정보부 옛 청사」, 『희망세상』, 2008, 124쪽)
공개된 정보가 없어, 석관동 중앙정보부의 많은 건물들이 어느 해에 단계적으로 건립되었는지는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968년과 1982년의 서울시 항공사진을 통해 14년의 시간 동안 중앙정보부 내의 시설 건립 현황을 추정해 볼 수 있고, 또한 중앙정보부의 건물이 설계 작품 이력으로 기록된 건축가 정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앙정보부 본관은 건축가 나상진의 작품 목록에 올라와 있다. 나상진은 국내파 건축가 중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사람으로, 군 관련 인물들과의 교류나 행정 관청과의 관계를 통하여 공공청사 분야에 상당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군사정권에서는 공공청사나 보안시설들을 공개적으로 매체에 소개하기 어려웠기에, 향후 기록이나 연구를 통해 그 작품들을 주목하거나 추적하기에 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공공청사에서 보여준 중정中庭형식의 건축계획은 건축가 사후에도 두드러져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상진(1923-1973)은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화가로 알려진 부친의 영향으로 예술적 감각을 익혔으리라 짐작이 되며, 1940년 전주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1945년까지 일본회사 카지마쿠미에서 일한다. 광복과 전쟁을 거쳐 1952년부터 독자적인 설계사무소를 운영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나상진은 연합참모본부와 관계된 일을 여러가지 진행하다가 1960년대 5.16 군사혁명 이후 정부와 관련된 많은 일을 하였다고 알려져있다.
밀실정치의 공간으로 사용되던 안가를 상당수 설계하였으나, 정부 관련 시설은 보안상의 이유로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 상대적으로 당시의 다른 건축가들보다 현대인들에게 인지도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현대건축』이라는 협회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나, 1973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이후 나상진설계사무소는 해체되었고 당시의 직원들도 각기 흩어지면서 나상진의 작품에 관한 많은 자료들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이행철, 「건축가 나상진과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20~21쪽.
나상진설계사무소 연표에 따르면, 나상진은 1965년 중앙정보부 본 청사를 작품 이력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드러내놓고 작품을 밝히기 어려웠으나, 설계사무소의 직원으로 근무했던 사람들과 이후 근현대건축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나상진은 1965년 중앙정보부 본청사를 설계하기에 앞서, 1963년 경기도청사를 설계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중앙정보부 본청사를 나상진의 건축계획으로 볼 수 있는데, 2년의 시차를 두고 설계된 두 건물은 모두 1960년대 관공서 청사로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중정형식의 평면계획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청사는 건축가 김희춘과 나상진이 공동으로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중정형의 사무실은 채광과 환기에 유리하며, 기존의 중복도식 건물에서는 사무공간 별로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다른데 비해 중정형 평면은 사무공간과 복도를 통해 항상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중앙정보부 본관은 현재 사라져 항공사진과 멸실 전 사진자료를 통해 중정형 구조를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 국가정보대학원 건물에서도 중정형이 적용된 것으로 미루어, 본관 외의 건물도 나상진이 설계하였거나, 기존 본관의 건물을 참고하여 이후 지어진 건물에 계획 형식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