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이다.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수(建築技手)로 들어가, 당시 시공중이던 조선총독부청사 감독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관철동에 박길룡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건축가들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그는 최초로 서구식 건축술의 전문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합리주의적 형태이면서도 경박한 모더니즘을 따르지 않는 중후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경성제국대학 본부(1931)·동일은행 남대문지점(1931)·한청빌딩(1935)·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및 강당(1937)·혜화전문학교 본관(1943) 등이 있다.
보화각은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설계했다. 박길용은 조선인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건축가이다. 보화각은 전쟁을 겪고 난 뒤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이었다.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한 것이었다. 수입 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부 장식을 최대한 하지 않고,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의 설계를 추구했다. 박길용은 전형필이 원하는 수준의 건물을 완성하려면 일본에 있는 건축자재상을 통해 자재를 수입하고 지하에 수장고도 만들어야 하니, 최소 3년이 걸린다고 보았다. 웬만한 건물을 짓는 데는 6~8개월이면 충분했던 당시였지만 최고급 자재로 튼튼하고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보화각은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설계했다. 박길용은 조선인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한 건축가이다. 보화각은 전쟁을 겪고 난 뒤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이었다.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한 것이었다. 수입 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부 장식을 최대한 하지 않고,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의 설계를 추구했다. 박길용은 전형필이 원하는 수준의 건물을 완성하려면 일본에 있는 건축자재상을 통해 자재를 수입하고 지하에 수장고도 만들어야 하니, 최소 3년이 걸린다고 보았다. 웬만한 건물을 짓는 데는 6~8개월이면 충분했던 당시였지만 최고급 자재로 튼튼하고 우아한 건물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