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과 삼선동을 지나는 한양도성의 성벽 중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다. 한양도성 전체에 걸쳐 각각 축성 시기, 동원된 사람들의 출신 지역, 감독관 등의 내용이 일정한 거리마다 새겨져 있다. 이렇게 글자를 새긴 이유는 해당 구간을 누가 시공했는지를 밝히는 것으로 성벽이 무너지는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풍화에 의해 알아보기 힘든 것이 많다. 이와 같은 각자성석은 국가적인 토목공사에 백성들을 어떻게 동원하고 어떻게 작업이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골목의 끝에 강릉이 있다. 경신고등학교 뒤편 담장 어느 큼지막한 성돌에 한자로 새겨져 있는 두 글자. 풍설에 깎이어 희미해진 글씨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산에서 발견한 물고기 화석인양 신기한 눈으로 더듬더듬 판독한다. “야. 강릉이 여기 있네.” 그렇다. 강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각자刻字성돌로부터 왼쪽으로 600척(약 180미터) 되는 구간을 강릉에서 온 사람들이 쌓았다. 사정은 이렇다. 세종 3년(1421), 태조 때 축조한 도성이 20년이 지 나 무너지고 헐린 데가 많으므로 도성을 개축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얼마 후 도성수축도감이 만들어지고 둘레 5만 9,500척의 한양도성 전 구간을 석성으로 개축하기로 결정이 났다. 공사기간은 이듬해 음력 1월 15일부터 2월 25일까지 40일. 팔도의 역군 32만 2천여 명을 동시에 불러 모았다. 도성 둘레를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백악 정상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경기도, 함길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황해도 각 군현에 600척씩 공사량을 할당했다. 강릉 사람들은 바람 센 성북동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돌을 져 나르고 깎고 다듬고 쌓아 올렸다. 추위에도 공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부상자와 도망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왕명은 지엄했다.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월 17일
꿈속에서라도 다시 눈 쌓인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역군들은 이를 악물고 돌과 싸웠고 마침내 튼튼한 성벽 하나를 이룩했다. ‘이만하면 우리 고을 이름 깊게 새겨도 될 거야.’ 그렇게 새겼다. 江陵
그 골목의 끝에 강릉이 있다. 경신고등학교 뒤편 담장 어느 큼지막한 성돌에 한자로 새겨져 있는 두 글자. 풍설에 깎이어 희미해진 글씨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산에서 발견한 물고기 화석인양 신기한 눈으로 더듬더듬 판독한다. “야. 강릉이 여기 있네.” 그렇다. 강릉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각자刻字성돌로부터 왼쪽으로 600척(약 180미터) 되는 구간을 강릉에서 온 사람들이 쌓았다. 사정은 이렇다. 세종 3년(1421), 태조 때 축조한 도성이 20년이 지 나 무너지고 헐린 데가 많으므로 도성을 개축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얼마 후 도성수축도감이 만들어지고 둘레 5만 9,500척의 한양도성 전 구간을 석성으로 개축하기로 결정이 났다. 공사기간은 이듬해 음력 1월 15일부터 2월 25일까지 40일. 팔도의 역군 32만 2천여 명을 동시에 불러 모았다. 도성 둘레를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백악 정상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경기도, 함길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황해도 각 군현에 600척씩 공사량을 할당했다. 강릉 사람들은 바람 센 성북동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돌을 져 나르고 깎고 다듬고 쌓아 올렸다. 추위에도 공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부상자와 도망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왕명은 지엄했다. “도성을 수축한 후에 혹시 돌 한 개라도 무너져 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즉시 그 방면의 감독관으로 하여금 보수하게 하고, 모두 논죄할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1월 17일
꿈속에서라도 다시 눈 쌓인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일은 없어야 했다. 역군들은 이를 악물고 돌과 싸웠고 마침내 튼튼한 성벽 하나를 이룩했다. ‘이만하면 우리 고을 이름 깊게 새겨도 될 거야.’ 그렇게 새겼다. 江陵
1. 각자성석(刻字城石)의 유래와 가치
○ 한양도성은 태조대 축조 이후 세종~숙종~순조대에 걸쳐 수축을 거듭하면서 성벽 각 구간마다 공사를 책임졌던 지역민, 관리, 관청의 이름을 새겨두었는데 이는 성벽의 해당구간이 파손, 붕괴될 경우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두기 위함이었음.
○ 한양도성의 축조와 수축에 동원되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당시 상황과 애환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이들 각자성석은 현장 답사를 통한 역사 교육에 활용가치가 높음.
○ 많은 각자들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소멸되고 말았으나 일부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그동안 조사·연구를 통해 정확한 위치와 글자가 확인된 바 있음.
1. 각자성석(刻字城石)의 유래와 가치
○ 한양도성은 태조대 축조 이후 세종~숙종~순조대에 걸쳐 수축을 거듭하면서 성벽 각 구간마다 공사를 책임졌던 지역민, 관리, 관청의 이름을 새겨두었는데 이는 성벽의 해당구간이 파손, 붕괴될 경우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두기 위함이었음.
○ 한양도성의 축조와 수축에 동원되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당시 상황과 애환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이들 각자성석은 현장 답사를 통한 역사 교육에 활용가치가 높음.
○ 많은 각자들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소멸되고 말았으나 일부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그동안 조사·연구를 통해 정확한 위치와 글자가 확인된 바 있음.
공사는 철저한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한 글자 600척을 여섯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관리하였으며, 두 글자마다 한 사람씩 감역監役을 두었다. 그 위로 판사判事와 부판사副判事가 각각 한 명씩, 사使와 부사副使 그리고 판관判官이 열 두 명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감역을 비롯한 감독자와 축성 단위별 내역을 성벽을 구성한 돌에 새겨놓게 한 것이다. 일종의 공사 실명제가 실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축성 내역이 새겨진 돌들은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남산 동측 성벽에 경상도 구역 표시인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등의 문자가 있고, 낙산 성벽에도 결성結城, 동복同福 등의 지명을 볼 수 있다
공사는 철저한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한 글자 600척을 여섯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관리하였으며, 두 글자마다 한 사람씩 감역監役을 두었다. 그 위로 판사判事와 부판사副判事가 각각 한 명씩, 사使와 부사副使 그리고 판관判官이 열 두 명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감역을 비롯한 감독자와 축성 단위별 내역을 성벽을 구성한 돌에 새겨놓게 한 것이다. 일종의 공사 실명제가 실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축성 내역이 새겨진 돌들은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남산 동측 성벽에 경상도 구역 표시인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등의 문자가 있고, 낙산 성벽에도 결성結城, 동복同福 등의 지명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