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쪽의 북한산에 쌓은 성곽이다. 서울의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 강북구와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걸쳐있다. 성북구에서는 정릉동의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이 입구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어 왔기에 여러 왕조에서 성을 쌓고 활용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은 숙종 37년(1711)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긴 전란을 겪은 후 도성 방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에는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3곳, 크고 작은 문이 13개소, 우물이 99곳, 창고가 8곳이 있다. 또한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도 여러 곳에 두었다.
3)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와 보국문·대성문 건립(普國門·大成門 建立)
북한산(北漢山)은 일명 삼각산(三角山)·화산(華山)·부아악(負兒岳)으로 불리는데, 고대(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國防上)의 요충지(要衝地)였다. 북한산(北漢山)의 지세(地勢)는 매우 험준(險峻)하며 방어처(防禦處)로써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對外的) 국방의식(國防意識)이 고조(高調)된 조선후기(朝鮮後期)의 관리(官吏)들은 북한산(北漢山) 지세(地勢)의 유리(有利)함을 들어 산성(山城)을 축조(築造)할 것을 건의(建議)하였다. 효종(孝宗) 때의 북벌론(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숙종(肅宗) 때에 와서도 북벌론(北伐論)은 대두(擡頭)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國內)에서의 군사상(軍事上) 유사시(有事時)에 대비(對備)하기 위한 방어책(防禦策)으로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가 제기(提起)되었다.
물론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조선 숙종(朝鮮 肅宗) 때 처음으로 축성(築城)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初期)부터 이미 북한성(北漢城)이 쌓여 삼국간(三國間)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개로왕(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北漢城)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高句麗)의 수중(水中)에 넘어갔으며 신라 진흥왕(新羅 眞興王) 때는 신라(新羅)가 점령(占領)하여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비봉(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와서도 중흥산성(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位置)하는 등 몇 차례 고성(古城)을 수축(修築)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存在)하는 산성(山城)의 형태(形態)는 조선 숙종(朝鮮 肅宗) 37년(1711)에 축조(築造)된 것으로 도봉구(道峰區)·성북구(城北區)·종로구(鍾路區)·은평구(恩平區)와 경기도 고양시(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론(築城論)은 숙종(肅宗) 초기(初期)부터 제기(提起)되어 숙종(肅宗)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成熟)되었고 숙종(肅宗) 자신도 축성(築城)의 결의(決意)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强硬)한 축성반대론(築城反對論)과 도성수축론(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 의지(意志)를 실현(實現)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肅宗) 36년(1710)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이 일단락되자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론(築城論)이 다시 대두(擡頭)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북한산(北漢山)의 형세(形勢)를 답사(踏査)하고 돌아온 이기하(李基夏)가 북성(北城) 축성(築城)을 주장(主張)한 이래 문의(問議)·논의(論議)·답사(踏査)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숙종(肅宗) 37년(1711) 2월 5일 숙종(肅宗)은 대신(大臣)들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북한산(北漢山)의 성지(城地)를 답사(踏査)하고 돌아온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형(李宇恒)의 보고(報告)를 듣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축(修築)을 결정(決定)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工事)를 착수(着手)하고 10월 25일에 완공(完工)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이 숙종(肅宗) 29년(1703) 이전(以前)의 논의(論議)와 달리 도성수축(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工事)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背景)을 살펴보자. 첫째,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이 전년(前年)인 숙종(肅宗) 36년(1710)에 완공(完工)되었고, 둘째, 청나라(淸國)에 해구(海寇)의 침입(侵入)이 있어 조선(朝鮮)에서도 방어(防禦)의 필요성(必要性)을 느꼈으며, 청(淸)에서 보내온 자문(咨文) 중에서도 해구(海寇)의 침입(侵入)에 대한 방어시설(防禦施設)에 유의(留意)하도록 요청(要請)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숙종 37년(肅宗 1711)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에 대한 결정(決定)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각 부서(部署)가 결정(決定)되고 4월 3일에는 공사(工事)를 착수(着手)하였다. 이 공사(工事)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삼군문(三軍門)이 담당(擔當)하였다.
축성(築城) 책임자(責任者)로는 전판서(前判書) 관진후(關鎭厚), 호비판서(戶費判書) 김우항(金宇杭), 행훈련원도정(行訓鍊院都正)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임명(任命)되었고, 그 아래 각 군문(軍門)에는 책임감독관(責任監督官)으로 낭청(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고, 공사별(工事別)로 부석패장(浮石牌將)·축성패장(築城牌將)·수구패장(水口牌將)·운석패장(運石牌將)·치도패장(治道牌將)과 니장변수(泥匠邊首)·치장변수(治匠邊首)·석수변수(石手邊首)·목수변수(木手邊首) 등의 감독원(監督員)을 두어 공사(工事)의 철저(徹底)를 기하였다.
그리고 성기(城基)는 고려(高麗) 이래(以來)의 기지(基址)에 따라 보현봉(普賢峰)·만경대(萬景臺)·백운대(白雲臺)·원효봉(元曉峰)·대서문(大西門)·의상봉(義湘峰)·승추봉(甑炊峰)·나한봉(羅漢峰)·문수봉(文殊峰) 등을 연결(連結)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現存)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기지(基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보(步), 즉 21리 60보(里 步)가 된다. 그 가운데 대서문(大西門) 북변(北邊) 옆에 있는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292보(步)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담당(擔當)하였고, 용암(龍岩) 남변(南邊)에서 보현봉(普賢峰)까지의 2,821보(步)는 금위영(禁衛營)에서,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까지의 2,507보(步)는 어영청(御營廳)에서 각각 담당(擔當)하여 쌓았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境界)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사(軍士)들이 축조(築造)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에서 담당(擔當)한 지역(地域)은 고축(高築) 474보(步), 반축(半築) 1,836보(步), 반반축(半半築) 511보(步), 여장합(女墻合) 1,107첩(堞)의 축성공사(築城工事)가 이루어졌다.
한편 축성(築城)에 필요한 노동력(勞動力)은 삼군문(三軍門)의 군사(軍士)는 물론 서울의 방민(坊民)이 동원(動員)되었고, 그밖에 역군(役軍)과 각종(各種) 공장(工匠)이 동원(動員)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방민(坊民)은 경상가(卿相家) 이하(以下) 각호(各戶)를 대(大)·중(中)·소(小)로 구분(區分)하여 대호(大戶)는 3명, 중호(中戶)는 2명, 소호(小戶)는 1명씩 식량(食糧)을 지참(持參)하고 취역(就役)하였으며, 모역군(募役軍)은 한 달에 쌀 9두(斗)와 면포(綿布) 2필(疋)씩이 지급(支給)되었다.
그리고 산성(山城)의 성문(城門)을 모두 13개로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 사이에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 있고, 용암북변(龍岩北邊)에서 보현봉(普賢峰) 사이에는 용암봉암문(龍岩峰暗門)·대동문(大東門)·보국문(輔國門)·대성문(大成門)이 있으며,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 사이에는 대남문(大南門)·가파동암문(架婆洞暗門)·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대서문(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境界)에는 높이 6척(尺) 6촌(寸), 폭 6척(尺) 5촌(寸)의 보국문(輔國門)과 높이 13척(尺), 폭 14척(尺)의 대성문(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성곽(城郭)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대(將臺)인데, 북한산성(北漢山城)에는 동장대(東將臺)·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의 세 지휘소(指揮所)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城北區) 지역(地域)의 산성(山城)에 해당(該當)되지는 않지만 보국문(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최고지휘관(最高指揮官)이 있는 곳으로 시단봉(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肅宗) 37년(1711) 7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한배주(韓配周)가 장대(將臺)의 공투(工投)는 재력(財力)이 있는 총융청(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建議)하여 숙종(肅宗)이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에게 형편(形便)을 물어 공사(工事)를 맡기었다.
그리하여 장대(將臺)의 축조(築造)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完工)되었다. 이때 숙종(肅宗)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친행(親幸)하여 시단봉(柴丹峰)까지 올라가서 대신(大臣)·승지(承旨)·사관(史官) 및 산성주관당상(山城主管堂上)·시위장사(侍衛將士) 등을 입시(入侍)하게 하여 산성(山城)에 관한 일을 의논(議論)하였으며, 북한산(北漢山)의 형세(形勢)를 보고 감탄(感嘆)하여 즉시(卽時) 6편의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산성(山城)의 수축론(修築論)이 전개(展開)되었을 때 반대론(反對論)의 중요한 이유(理由)가 되었던 것은 수천문제(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肅宗)은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과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耈) 등이 저수지(貯水池)와 우물(井)을 팔 것을 건의(建議)하자 즉시(卽時) 정지(井池)를 팔 것을 명(命)하였다.
우물(井)의 굴착(掘鑿)은 삼군문(三軍門)에서 각기 담당구역(擔當區域) 내에 설치(設置)하도록 하였는데 숙종(肅宗) 38년(1712) 10월에 완성(完成)되었다. 그리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11개소(個所), 어영청(御營廳) 12개소(個所), 금위영(禁衛營) 3개소(個所) 등 모두 26개소(個所)의 저수지(貯水池)를 확보(確保)하였으며 우물(井)은 모두 99개소(個所)에 달하였다.
이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를 갖는다. 첫째, 도성(都城)과 연결(連結)되어 수도(首都)를 보호(保護)하는 점에서 전략적(戰略的)으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갖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유사시(有事時)에 종종 도성(都城)을 버리고 어가(御駕)가 멀리까지 피난(避難)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은 이러한 일을 방비(防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성(山城) 축성(築城) 이후(以後) 국가적(國家的)인 큰 전쟁(戰爭)이나 정변(政變)이 없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역할(役割)을 실험(實驗)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朝鮮)의 전략상(戰略上) 상당히 진전(進展)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로 고적(古蹟)의 보존(保存)을 들 수 있다.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많은 사적(史蹟)들이 보호(保護)될 수 있었으며, 고대(古代)로부터 각축장(角逐場)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保存)되었다.
셋째로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성(山城)의 수축으로 수림(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일대 16만 8,989평을 사적(史蹟)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대남문(大南門)과 대성문(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보국문(輔國門) 또한 1993년의 보수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3)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와 보국문·대성문 건립(普國門·大成門 建立)
북한산(北漢山)은 일명 삼각산(三角山)·화산(華山)·부아악(負兒岳)으로 불리는데, 고대(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國防上)의 요충지(要衝地)였다. 북한산(北漢山)의 지세(地勢)는 매우 험준(險峻)하며 방어처(防禦處)로써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對外的) 국방의식(國防意識)이 고조(高調)된 조선후기(朝鮮後期)의 관리(官吏)들은 북한산(北漢山) 지세(地勢)의 유리(有利)함을 들어 산성(山城)을 축조(築造)할 것을 건의(建議)하였다. 효종(孝宗) 때의 북벌론(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숙종(肅宗) 때에 와서도 북벌론(北伐論)은 대두(擡頭)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國內)에서의 군사상(軍事上) 유사시(有事時)에 대비(對備)하기 위한 방어책(防禦策)으로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가 제기(提起)되었다.
물론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조선 숙종(朝鮮 肅宗) 때 처음으로 축성(築城)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初期)부터 이미 북한성(北漢城)이 쌓여 삼국간(三國間)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개로왕(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北漢城)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高句麗)의 수중(水中)에 넘어갔으며 신라 진흥왕(新羅 眞興王) 때는 신라(新羅)가 점령(占領)하여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비봉(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와서도 중흥산성(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位置)하는 등 몇 차례 고성(古城)을 수축(修築)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存在)하는 산성(山城)의 형태(形態)는 조선 숙종(朝鮮 肅宗) 37년(1711)에 축조(築造)된 것으로 도봉구(道峰區)·성북구(城北區)·종로구(鍾路區)·은평구(恩平區)와 경기도 고양시(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론(築城論)은 숙종(肅宗) 초기(初期)부터 제기(提起)되어 숙종(肅宗)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成熟)되었고 숙종(肅宗) 자신도 축성(築城)의 결의(決意)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强硬)한 축성반대론(築城反對論)과 도성수축론(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 의지(意志)를 실현(實現)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肅宗) 36년(1710)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이 일단락되자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론(築城論)이 다시 대두(擡頭)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북한산(北漢山)의 형세(形勢)를 답사(踏査)하고 돌아온 이기하(李基夏)가 북성(北城) 축성(築城)을 주장(主張)한 이래 문의(問議)·논의(論議)·답사(踏査)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숙종(肅宗) 37년(1711) 2월 5일 숙종(肅宗)은 대신(大臣)들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는 자리에서 북한산(北漢山)의 성지(城地)를 답사(踏査)하고 돌아온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형(李宇恒)의 보고(報告)를 듣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축(修築)을 결정(決定)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工事)를 착수(着手)하고 10월 25일에 완공(完工)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이 숙종(肅宗) 29년(1703) 이전(以前)의 논의(論議)와 달리 도성수축(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工事)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背景)을 살펴보자. 첫째, 도성(都城)의 수축(修築)이 전년(前年)인 숙종(肅宗) 36년(1710)에 완공(完工)되었고, 둘째, 청나라(淸國)에 해구(海寇)의 침입(侵入)이 있어 조선(朝鮮)에서도 방어(防禦)의 필요성(必要性)을 느꼈으며, 청(淸)에서 보내온 자문(咨文) 중에서도 해구(海寇)의 침입(侵入)에 대한 방어시설(防禦施設)에 유의(留意)하도록 요청(要請)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숙종 37년(肅宗 1711)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에 대한 결정(決定)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각 부서(部署)가 결정(決定)되고 4월 3일에는 공사(工事)를 착수(着手)하였다. 이 공사(工事)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삼군문(三軍門)이 담당(擔當)하였다.
축성(築城) 책임자(責任者)로는 전판서(前判書) 관진후(關鎭厚), 호비판서(戶費判書) 김우항(金宇杭), 행훈련원도정(行訓鍊院都正)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임명(任命)되었고, 그 아래 각 군문(軍門)에는 책임감독관(責任監督官)으로 낭청(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고, 공사별(工事別)로 부석패장(浮石牌將)·축성패장(築城牌將)·수구패장(水口牌將)·운석패장(運石牌將)·치도패장(治道牌將)과 니장변수(泥匠邊首)·치장변수(治匠邊首)·석수변수(石手邊首)·목수변수(木手邊首) 등의 감독원(監督員)을 두어 공사(工事)의 철저(徹底)를 기하였다.
그리고 성기(城基)는 고려(高麗) 이래(以來)의 기지(基址)에 따라 보현봉(普賢峰)·만경대(萬景臺)·백운대(白雲臺)·원효봉(元曉峰)·대서문(大西門)·의상봉(義湘峰)·승추봉(甑炊峰)·나한봉(羅漢峰)·문수봉(文殊峰) 등을 연결(連結)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現存)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기지(基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보(步), 즉 21리 60보(里 步)가 된다. 그 가운데 대서문(大西門) 북변(北邊) 옆에 있는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292보(步)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담당(擔當)하였고, 용암(龍岩) 남변(南邊)에서 보현봉(普賢峰)까지의 2,821보(步)는 금위영(禁衛營)에서,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까지의 2,507보(步)는 어영청(御營廳)에서 각각 담당(擔當)하여 쌓았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境界)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사(軍士)들이 축조(築造)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에서 담당(擔當)한 지역(地域)은 고축(高築) 474보(步), 반축(半築) 1,836보(步), 반반축(半半築) 511보(步), 여장합(女墻合) 1,107첩(堞)의 축성공사(築城工事)가 이루어졌다.
한편 축성(築城)에 필요한 노동력(勞動力)은 삼군문(三軍門)의 군사(軍士)는 물론 서울의 방민(坊民)이 동원(動員)되었고, 그밖에 역군(役軍)과 각종(各種) 공장(工匠)이 동원(動員)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방민(坊民)은 경상가(卿相家) 이하(以下) 각호(各戶)를 대(大)·중(中)·소(小)로 구분(區分)하여 대호(大戶)는 3명, 중호(中戶)는 2명, 소호(小戶)는 1명씩 식량(食糧)을 지참(持參)하고 취역(就役)하였으며, 모역군(募役軍)은 한 달에 쌀 9두(斗)와 면포(綿布) 2필(疋)씩이 지급(支給)되었다.
그리고 산성(山城)의 성문(城門)을 모두 13개로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 사이에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 있고, 용암북변(龍岩北邊)에서 보현봉(普賢峰) 사이에는 용암봉암문(龍岩峰暗門)·대동문(大東門)·보국문(輔國門)·대성문(大成門)이 있으며,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 사이에는 대남문(大南門)·가파동암문(架婆洞暗門)·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대서문(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境界)에는 높이 6척(尺) 6촌(寸), 폭 6척(尺) 5촌(寸)의 보국문(輔國門)과 높이 13척(尺), 폭 14척(尺)의 대성문(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성곽(城郭)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대(將臺)인데, 북한산성(北漢山城)에는 동장대(東將臺)·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의 세 지휘소(指揮所)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城北區) 지역(地域)의 산성(山城)에 해당(該當)되지는 않지만 보국문(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최고지휘관(最高指揮官)이 있는 곳으로 시단봉(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肅宗) 37년(1711) 7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한배주(韓配周)가 장대(將臺)의 공투(工投)는 재력(財力)이 있는 총융청(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建議)하여 숙종(肅宗)이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에게 형편(形便)을 물어 공사(工事)를 맡기었다.
그리하여 장대(將臺)의 축조(築造)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完工)되었다. 이때 숙종(肅宗)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친행(親幸)하여 시단봉(柴丹峰)까지 올라가서 대신(大臣)·승지(承旨)·사관(史官) 및 산성주관당상(山城主管堂上)·시위장사(侍衛將士) 등을 입시(入侍)하게 하여 산성(山城)에 관한 일을 의논(議論)하였으며, 북한산(北漢山)의 형세(形勢)를 보고 감탄(感嘆)하여 즉시(卽時) 6편의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산성(山城)의 수축론(修築論)이 전개(展開)되었을 때 반대론(反對論)의 중요한 이유(理由)가 되었던 것은 수천문제(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肅宗)은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과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耈) 등이 저수지(貯水池)와 우물(井)을 팔 것을 건의(建議)하자 즉시(卽時) 정지(井池)를 팔 것을 명(命)하였다.
우물(井)의 굴착(掘鑿)은 삼군문(三軍門)에서 각기 담당구역(擔當區域) 내에 설치(設置)하도록 하였는데 숙종(肅宗) 38년(1712) 10월에 완성(完成)되었다. 그리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11개소(個所), 어영청(御營廳) 12개소(個所), 금위영(禁衛營) 3개소(個所) 등 모두 26개소(個所)의 저수지(貯水池)를 확보(確保)하였으며 우물(井)은 모두 99개소(個所)에 달하였다.
이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를 갖는다. 첫째, 도성(都城)과 연결(連結)되어 수도(首都)를 보호(保護)하는 점에서 전략적(戰略的)으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갖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유사시(有事時)에 종종 도성(都城)을 버리고 어가(御駕)가 멀리까지 피난(避難)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築城)은 이러한 일을 방비(防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성(山城) 축성(築城) 이후(以後) 국가적(國家的)인 큰 전쟁(戰爭)이나 정변(政變)이 없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역할(役割)을 실험(實驗)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朝鮮)의 전략상(戰略上) 상당히 진전(進展)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로 고적(古蹟)의 보존(保存)을 들 수 있다.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많은 사적(史蹟)들이 보호(保護)될 수 있었으며, 고대(古代)로부터 각축장(角逐場)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保存)되었다.
셋째로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성(山城)의 수축으로 수림(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일대 16만 8,989평을 사적(史蹟)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대남문(大南門)과 대성문(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보국문(輔國門) 또한 1993년의 보수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84 북한산 성곽
삼국이 쟁탈전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
-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도 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 고려시대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토성을 석성으로 고쳤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84 북한산 성곽
삼국이 쟁탈전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
-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도 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 고려시대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토성을 석성으로 고쳤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3)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와 보국문·대성문 건립(普國門·大成門 建立)
북한산(北漢山)은 일명 삼각산(三角山)·화산(華山)·부아악(負兒岳)으로 불리는데 고대(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북한산(北漢山)의 지세는 매우 험준하며 방어처로써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인 국방의식이 고조된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관리들은 북한산(北漢山) 지세의 유리함을 들어 산성(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효종(孝宗) 때의 북벌론(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숙종(肅宗)때에 와서도 북벌론은 대두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군사상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가 제기되었다.
물론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조선 숙종 때 처음으로 축성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미 북한성(北漢城)이 쌓여 삼국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개루왕(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北漢城)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때는 신라가 점령하여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비봉(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와서도 중흥산성(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하는 등 몇 차례 고성(古城)을 수축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하는 산성(山城)의 형태는 조선 숙종(肅宗) 37년(1711)에 축조된 것으로 도봉구(道峰區)·성북구(城北區)·종로구(鍾路區)·은평구(恩平區)와 경기도 고양시(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 논의(築城論)는 숙종(肅宗) 초기부터 제기되어 숙종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되었고, 숙종 자신도 축성의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한 축성 반대론(築城反對論)과 도성 수축론(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 그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36년(1710) 도성(都城)의 수축이 일단락되자 북한산성 축성 논의(北漢山城築城論)가 다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북한산(北漢山)의 형세를 답사하고 돌아온 이기하(李基夏)가 북성축성(北城築城)을 주장한 이래 문의·논의·답사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37년(1711) 2월 5일 숙종(肅宗)은 대신(大臣)들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북한산(北漢山)의 성지(城地)를 답사하고 돌아온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항(李宇恒)의 보고를 듣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축을 결정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를 착수하고 10월 25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이 숙종 29년 이전의 논의와 달리 도성 수축(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도성 수축(都城修築)이 전년인 숙종 36년(1710)에 완공되었고, 둘째, 청나라(淸)에서 해적(海寇)의 침입이 있어 조선(朝鮮)에서도 방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청나라(淸)에서 보내온 자문(咨文) 중에서도 해적(海寇)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설에 유의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숙종 37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각 부서(各部署)가 결정되고 4월 3일에는 공사를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3軍門)이 담당하였다. 축성 책임자로는 전판서(前判書) 관진후(關鎭厚), 호비판서(戶費判書) 김우항(金宇杭), 행훈련원도정(行訓鍊院都正)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임명되었고, 그 아래 각 군문(軍門)에는 책임감독관으로 낭청(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고, 공사별(工事別)로 부석패장(浮石牌將)·축성패장(築城牌將)·수구패장(水口牌將)·운석패장(運石牌將)·치도패장(治道牌將)과, 니장변수(泥匠邊首)·치장변수(治匠邊首)·석수변수(石手邊首)·목수변수(木手邊首) 등의 감독원을 두어 공사의 철저를 기하였다.
그리고 성기(城基)는 고려(高麗)이래의 기지(基址)에 따라 보현봉(普賢峰)·만경대(萬景臺)·백운대(白雲臺)·원효봉(元曉峰)·대서문(大西門)·의상봉(義湘峰)·증취봉(甑炊峰)·나한봉(羅漢峰)·문수봉(文殊峰)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기지(基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보(步), 즉 21리 60보가 된다. 그 가운데 대서문(大西門) 북쪽 옆에 있는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292보(步)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담당하였고, 용암남변(龍岩南邊)에서 보현봉(普賢峰)까지의 2,821보(步)는 금위영(禁衛營)에서,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까지의 2,507보(步)는 어영청(御營廳)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사들이 축조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에서 담당한 지역은 고축(高築) 474보(步), 반축(半築) 1,836보(步), 반반축(半半築) 511보(步), 여장합(女墻合) 1,107첩(堞)의 축성공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축성(築城)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3軍門)의 군사(軍士)는 물론 서울의 방민(坊民)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역군(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방민(坊民)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各戶)를 대·중·소(大·中·小)로 구분하여 대호(大戶)는 3명, 중호(中戶)는 2명, 소호(小戶)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就役)하였으며, 모집군(募役軍)은 한 달에 쌀 9두(斗)와 면포 2필(疋)씩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산성(山城)의 성문을 모두 13개로,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 사이에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 있고, 용암북변(龍岩北邊)에서 보현봉(普賢峰) 사이에는 용암봉암문(龍岩峰暗門)·대동문(大東門)·보국문(輔國門)·대성문(大成門)이 있으며,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 남변(水門南邊) 사이에는 대남문(大南門)·가바동암문(架婆洞暗門)·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대서문(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성북구 북쪽 경계에는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의 보국문(輔國門)과 높이 13척, 폭 14척의 대성문(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성곽(城廓)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대(將臺)인데, 북한산성(北漢山城)에는 동장대(東將臺)·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의 세 지휘소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 지역의 산성에 해당되지 않지만 보국문(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최고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시단봉(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 37년(1711) 7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한배주(韓配周)가 장대(將臺)의 공투(工投)는 재력이 있는 총융청(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하였고, 숙종(肅宗)은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에게 형편을 물어 공사를 맡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대(將臺)의 축조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되었다. 이때 숙종은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친행(親幸)하여 시단봉(柴丹峰)까지 올라가서 대신(大臣)·승지(承旨)·사관(史官) 및 산성 주관 당상(山城主管堂上)·시위장사(侍衛將士) 등을 입사(入侍)하게 하여 산성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며, 북한산(北漢山)의 형세를 보고 감탄하여 즉시로 6편의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산성(山城) 수축론(修築論) 전개되었을 때 반대론(反對論)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수천문제(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肅宗)은 도제조(都提調) 이흘명(李頣命)과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耈) 등이 저수지와 우물을 팔 것을 건의하자 즉시 정지(井池)를 팔 것을 명하였다. 우물의 굴착은 3군문(3軍門)에서 각 담당 구역 내에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숙종 3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11개소, 어영청(御營廳) 12개소, 금위영(禁衛營) 3개소 등 모두 26개소의 저수지(貯水池)를 확보하였으며, 우물은 모두 99개소에 달하였다.
이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도성과 연결되어 수도(首都)를 보호하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유사시에 종종 도성을 버리고 어가(御駕)가 멀리까지 피난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은 이러한 일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성 축성 이후 국가적인 큰 전쟁이나 정변이 없어 북한산성의 역할을 실험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의 전략상 상당히 진전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 고적(古蹟)의 보존을 들 수 있다.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많은 사적(史蹟)들이 보호될 수 있었으며, 고대로부터 각축장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셋째,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성의 수축으로 수림(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 일대 16만 8,989평을 사적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1992년 대남문(大南門)과 대성문(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보국문(輔國門) 또한 1993년의 보수 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3)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築造)와 보국문·대성문 건립(普國門·大成門 建立)
북한산(北漢山)은 일명 삼각산(三角山)·화산(華山)·부아악(負兒岳)으로 불리는데 고대(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북한산(北漢山)의 지세는 매우 험준하며 방어처로써 제 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인 국방의식이 고조된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관리들은 북한산(北漢山) 지세의 유리함을 들어 산성(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효종(孝宗) 때의 북벌론(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숙종(肅宗)때에 와서도 북벌론은 대두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군사상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가 제기되었다.
물론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조선 숙종 때 처음으로 축성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미 북한성(北漢城)이 쌓여 삼국 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개루왕(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北漢城)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때는 신라가 점령하여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가 비봉(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와서도 중흥산성(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하는 등 몇 차례 고성(古城)을 수축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하는 산성(山城)의 형태는 조선 숙종(肅宗) 37년(1711)에 축조된 것으로 도봉구(道峰區)·성북구(城北區)·종로구(鍾路區)·은평구(恩平區)와 경기도 고양시(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 논의(築城論)는 숙종(肅宗) 초기부터 제기되어 숙종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되었고, 숙종 자신도 축성의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한 축성 반대론(築城反對論)과 도성 수축론(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 그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36년(1710) 도성(都城)의 수축이 일단락되자 북한산성 축성 논의(北漢山城築城論)가 다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북한산(北漢山)의 형세를 답사하고 돌아온 이기하(李基夏)가 북성축성(北城築城)을 주장한 이래 문의·논의·답사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숙종 37년(1711) 2월 5일 숙종(肅宗)은 대신(大臣)들과 비국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북한산(北漢山)의 성지(城地)를 답사하고 돌아온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와 사직(司直) 이우항(李宇恒)의 보고를 듣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수축을 결정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를 착수하고 10월 25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이 숙종 29년 이전의 논의와 달리 도성 수축(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도성 수축(都城修築)이 전년인 숙종 36년(1710)에 완공되었고, 둘째, 청나라(淸)에서 해적(海寇)의 침입이 있어 조선(朝鮮)에서도 방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청나라(淸)에서 보내온 자문(咨文) 중에서도 해적(海寇)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설에 유의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숙종 37년 2월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각 부서(各部署)가 결정되고 4월 3일에는 공사를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3군문(3軍門)이 담당하였다. 축성 책임자로는 전판서(前判書) 관진후(關鎭厚), 호비판서(戶費判書) 김우항(金宇杭), 행훈련원도정(行訓鍊院都正)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임명되었고, 그 아래 각 군문(軍門)에는 책임감독관으로 낭청(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내책응(內策應)·외책응(外策應)·독책장(督策將)을 두었고, 공사별(工事別)로 부석패장(浮石牌將)·축성패장(築城牌將)·수구패장(水口牌將)·운석패장(運石牌將)·치도패장(治道牌將)과, 니장변수(泥匠邊首)·치장변수(治匠邊首)·석수변수(石手邊首)·목수변수(木手邊首) 등의 감독원을 두어 공사의 철저를 기하였다.
그리고 성기(城基)는 고려(高麗)이래의 기지(基址)에 따라 보현봉(普賢峰)·만경대(萬景臺)·백운대(白雲臺)·원효봉(元曉峰)·대서문(大西門)·의상봉(義湘峰)·증취봉(甑炊峰)·나한봉(羅漢峰)·문수봉(文殊峰)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하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기지(基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보(步), 즉 21리 60보가 된다. 그 가운데 대서문(大西門) 북쪽 옆에 있는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까지의 2,292보(步)는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담당하였고, 용암남변(龍岩南邊)에서 보현봉(普賢峰)까지의 2,821보(步)는 금위영(禁衛營)에서,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남변(水門南邊)까지의 2,507보(步)는 어영청(御營廳)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따라서 성북구(城北區) 북쪽 경계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사들이 축조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에서 담당한 지역은 고축(高築) 474보(步), 반축(半築) 1,836보(步), 반반축(半半築) 511보(步), 여장합(女墻合) 1,107첩(堞)의 축성공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축성(築城)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3軍門)의 군사(軍士)는 물론 서울의 방민(坊民)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 역군(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방민(坊民)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各戶)를 대·중·소(大·中·小)로 구분하여 대호(大戶)는 3명, 중호(中戶)는 2명, 소호(小戶)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취역(就役)하였으며, 모집군(募役軍)은 한 달에 쌀 9두(斗)와 면포 2필(疋)씩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산성(山城)의 성문을 모두 13개로, 수문북변(水門北邊)에서 용암(龍岩) 사이에 수문(水門)·북문(北門)·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 있고, 용암북변(龍岩北邊)에서 보현봉(普賢峰) 사이에는 용암봉암문(龍岩峰暗門)·대동문(大東門)·보국문(輔國門)·대성문(大成門)이 있으며, 보현봉(普賢峰)에서 수문 남변(水門南邊) 사이에는 대남문(大南門)·가바동암문(架婆洞暗門)·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대서문(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성북구 북쪽 경계에는 높이 6척 6촌, 폭 6척 5촌의 보국문(輔國門)과 높이 13척, 폭 14척의 대성문(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성곽(城廓)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대(將臺)인데, 북한산성(北漢山城)에는 동장대(東將臺)·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의 세 지휘소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 지역의 산성에 해당되지 않지만 보국문(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최고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시단봉(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숙종 37년(1711) 7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 한배주(韓配周)가 장대(將臺)의 공투(工投)는 재력이 있는 총융청(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하였고, 숙종(肅宗)은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에게 형편을 물어 공사를 맡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대(將臺)의 축조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되었다. 이때 숙종은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친행(親幸)하여 시단봉(柴丹峰)까지 올라가서 대신(大臣)·승지(承旨)·사관(史官) 및 산성 주관 당상(山城主管堂上)·시위장사(侍衛將士) 등을 입사(入侍)하게 하여 산성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며, 북한산(北漢山)의 형세를 보고 감탄하여 즉시로 6편의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산성(山城) 수축론(修築論) 전개되었을 때 반대론(反對論)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수천문제(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肅宗)은 도제조(都提調) 이흘명(李頣命)과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耈) 등이 저수지와 우물을 팔 것을 건의하자 즉시 정지(井池)를 팔 것을 명하였다. 우물의 굴착은 3군문(3軍門)에서 각 담당 구역 내에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숙종 3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11개소, 어영청(御營廳) 12개소, 금위영(禁衛營) 3개소 등 모두 26개소의 저수지(貯水池)를 확보하였으며, 우물은 모두 99개소에 달하였다.
이러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도성과 연결되어 수도(首都)를 보호하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유사시에 종종 도성을 버리고 어가(御駕)가 멀리까지 피난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축성은 이러한 일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성 축성 이후 국가적인 큰 전쟁이나 정변이 없어 북한산성의 역할을 실험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조선의 전략상 상당히 진전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 고적(古蹟)의 보존을 들 수 있다. 북한산(北漢山)에 있는 많은 사적(史蹟)들이 보호될 수 있었으며, 고대로부터 각축장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셋째,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성의 수축으로 수림(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 일대 16만 8,989평을 사적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1992년 대남문(大南門)과 대성문(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보국문(輔國門) 또한 1993년의 보수 계획에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