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최용덕
- 성북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2년에는 의열단에 참여하여 폭탄운반 및 투척계획을 협의하는 등 의열활동을 지원하였다. 1922년 이후 1940년까지 중국 공군에서 교관, 수상비행대장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 참모처장, 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차관을 역임하였으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공군후방사령관·항공기지사령관·공군본부작전참모부장·공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용덕의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본적은 성북동 265번지(성북로 148-5)로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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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문
-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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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설리 여성노동자 파업
- 1933년 발생한 경성제사공장의 파업 사건이다. 9월 21일 숭인면 신설리(현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 있었던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일제 경찰과 회사 측은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파업참가자들을 체포했고 파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파업을 통해 당시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인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볼 수 있다. 1929년 기준 하루 임금이 일본인 남성노동자가 2.32원, 일본인 여성노동자가 1.01원, 조선인 남성노동자가 1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0.59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확산된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효정, 이병희, 허마리아 등이 주도한 당시의 파업에 이재유 등의 사회주의자도 연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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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