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229] 52년 미용 인생, 한정숙 님 이야기
- 이번 주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의 주인공은 통영에서 태어나 서울로 온 뒤, 성북에서 오래도록 미용 생활을 이어 나가고 계신 미용사 한정숙 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김용준
- 한국미술사학자, 화가, 평론가, 수필가이다. 1920년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통학을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고 동양화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1934년 노시산방(성북동 274-1)로 이사하여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1944년 노시산방은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1949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는 한국의 미술사를 다루면서 대화하듯이 쉽게 읽히도록 구어체를 사용하여 저술하였다. 수필로는 1948년에 출간한 『근원수필』이 있다. 6.25 전쟁 이후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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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쾌대
- 서양화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3년 일본의 제국미술학교로 유학하였다.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제25회 이과전(二科展)에 〈운명〉을 출품해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하였다. 1941년 도쿄에서 이중섭, 진환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1944년까지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전을 가졌다. 이시기 그는 인물상에 주력하며 표현주의적 수법으로 인물의 개성을 강하게 포착해냈다. 해방 직후에는 어지러운 사회상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1946년 봄부터 성북회화연구소(현 성북구 보문로39길 34)를 창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1948년 명륜동으로 이사했다. 동소문동에 있던 연구소는 이쾌대의 사재로 임대한 40평의 공간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강제부역을 하다가 연합군의 서울 수복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1953년 남북 포로교환때 자의로 북한으로 넘어간 후 조선미술가 동맹 소속 화가로 활동하였다. 이쾌대는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한국적 전통을 서양화폭에 담으려고 시도한 화가이자, 한국 현실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군상〉, 〈걸인〉, 〈송아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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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갑주
- 국악인이다. 1924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갑주는 대표적인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명인 한성태의 아들이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창악적 구비록사시(口碑錄事詩)이다. 판소리 보유자의 경우 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법과 판소리 다섯마당, 즉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의 6분야에 각각의 보유자가 복수로 지정되는데, 한갑주는 적벽가의 보유자였다. 성북구 정릉 2동에 거주하면서 공연과 전수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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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