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3] 주민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개운산
- 성북구에는 여러 산이 있어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기 좋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북구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산이 있는데요, 바로 개운산(開運山)입니다. 개운산은 북한산(835.6m)이나 북악산(342m) 등 성북구의 다른 산들과 비교하면 야트막한 134m 높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접근성이 좋아 주민들에게 친근한 공간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개운산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전형필
- 간송미술관(당시 명칭 보화각)을 설립한 문화재 수집가이다. 간송은 그의 호이다. 1906년 종로의 거상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민족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귀국하여 오세창의 도움을 받아 문화재의 수집과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4년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연구할 장소를 물색하다 현재 성북구 간송미술관 자리에 대지를 마련하였고, 오세창은 그곳에 ‘북단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8년에는 북단장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완공하였다. 그가 수집한 주요 문화재에는 김정희,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서화 뿐만 아니라 국보와 보물급의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었다. 1962년 사망하였는데, 문화재 수호 행적을 기려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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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미당
-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연충효이나 1938년 임시정부가 장사로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을 사용하였다. 1920년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했다가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 사망 후 상하이에 정착하였으며, 1927년 3월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상해여자청년동맹, 한인애국단, 임시의정원, 한국독립당, 한국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엄항섭이 1945년 11월에 환국하였고, 연미당과 가족들은 1946년 6월 입국하였다. 엄항섭·연미당 가족은 경교장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후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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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원
- 소설가이다. 192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시 「누님」과 1930년 『신생(新生)』에 발표한 「수염」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인회’에 참여하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천변풍경」(1936~1937), 「여인성장」(1941~1942) 등을 발표하였다. 근대시기 서울의 모습과 서울 사람들의 생활, 서울말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로 꼽힌다. 돈암동 487-22번지에 땅을 마련하고 직접 설계한 집을 지어 살다가 소설 『약산과 의열단』(1947)을 내고 인세 대신 성북동 230번지 집을 받아 이사하였다. 1950년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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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연현
-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인이다. 1933년 중동중학교에 편입하여 김광섭 시인을 담임으로 만난다. 1938년 한글동인지 『아(芽)』, 1939년 『시림』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걷는다. 1942년 창씨명으로 「동양에 대한 향수」를 발표하였고, 몇 편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과 교류하며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어 문단 활동을 함께 하였고, 1949년 『예술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55년에는 순수 문예지인 『현대문학』의 주간을 맡는다. 1972년 정릉동에 이층 양옥을 마련해 이사하였다. 1981년 해외여행 도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조연현문학상’을 제작하여 신진작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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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