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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박은
- 조선 초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고 종암동에 거주했던 문신이다. 고려 말 학자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아들이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사위이다. 제1,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웠다. 우의정에 오른 후에도 조밥으로 식사하며 재물에 욕심내지 않는 박은의 청빈함에 감명을 받은 태종이 북바위 근처의 밭(지금의 종암중학교 부근)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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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안암교회
- 안암교회는 1948년 1월 22일에 교회설립을 목적으로 첫 예배를 드리고, 같은해 2월 1일 안암동5가 134에서 창립예배를 시작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6.25전쟁을 거치고 1954년 9월 1일에 안암동5가 134-2에 128평 규모의 대지를 구입하고 교회를 신축했다. 이후 1980년 8월 3일 보문동 신축부지에서 기공예배를 드리고, 다음해인 1981년 4월 2일 지금의 자리인 보문로98(보문동4가 4)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전체 4층으로 되어있고, 건물의 1층에는 NH농협은행 보문동지점과 안암교회 부설유치원 동선유아학교가 들어서 있다. 안암교회는 개신교 분파인 장로교로 그중에서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 개신교 분파 중 대한성공회와 함께 진보성향의 교단으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인원, 노동, 통일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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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신암교회
- 신암교회는 1935년 김영식 목사 사택을 기도소로 쓰면서 다수의 신도들과 함께 교회설립을 계획하였다. 1936년 현재(보문로 27길 15)의 교회 대지의 건물을 임시 예배처로 정하고 정식교회로 발족하였다. 6.25전쟁 동안 부산의 기독교서회 사무실을 임시 예배처로 삼았다가 1953년 돌아온 기간을 제외하면 줄곡 지금의 위치에서 종교활동을 해왔다. 또한 신암교회는 1954년 분립되어 보문동1가에 세워진 성암교회의 모체이기도 하다. 2017년에는 교회설립 8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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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보문제일교회
- 보문제일교회는 1916년 경기도 고양군 신설리150번지(현 종로구 숭인공 710)에서 첫모임을 시작하였다. 1919년에 기도처를 신설리150-3으로 이전하였는데 당시 신도는 40명 정도였다. 당시 동대문 지역에는 북감리회 동대문교회의 기도처 용두동교회와 왕십리교회가 있었고, 남감리회는 광희문교회의 기도처 신설리교회와 수철리교회가 있었다. 이중 보문제일교회는 신설리교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1967년 현 보문동6가 337번지에 132평을 매입하고 신축을 결의하였다. 이후 1968년 교회를 준공하고 이전하였다. 한때 감리회는 교회분열이 일어났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통합되어 '하나된 감리교회'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보문제일교회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세워진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의 교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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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 보문사 불화
- 보문사(普門寺)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지장보살도>를 소장하고 있다. 석가불도(釋迦佛圖)는 보문사 대웅전 내에 그려진 140×180㎝ 크기의 불화이다. 석가여래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묘사했다. 중앙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신중도(神衆圖)도 역시 대웅전 내에 200×140㎝의 크기로 그려진 것이다.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신(土俗神)인 신중(神衆)을 그렸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인데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중도에는 화기(畵記)가 남아있어 불화 조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상궁(尙宮)의 시주로 불화 조성 경비가 마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는 묘승전 내에 지장보살을 그린 것으로 145×200㎝ 크기이다.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그 좌우에 가까이 모시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를 그렸으며, 이들 삼존상(三尊像)의 뒷면에는 금색의 빛을 발하는 원형광배(圓形光背)를 표현하였다. 보문사의 대웅전이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불화들은 이로부터 2년 후인 186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비단에 채색하였고,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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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돈암육교(미아리고개)
- 2022년 7월 26일 오전 10시~오후 12시경 돈암동 돈암육교 위에서 촬영한 미아리고개 일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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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월곡역 육교
- 2022년 7월 13일 오후 2시~4시경 종암동 월곡역 육교 위에서 찍은 월곡역 일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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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국민대 꽃갈피 프로젝트
- 꽃갈피 프로젝트는 성북구 어르신 책친구만들기 프로젝트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꽃갈피팀'이 주최했다. 이 프로젝트는 2022년 5월 4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되었고, 청년층과 노년층이 세대 구분없이 함께 책친구가 되어 시니어 그림책을 감상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활동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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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인터뷰 영상 편집본
- 이문수 가브리엘 신부 인터뷰
내용 요약
글라렛선교수도회 소속 신부이자 청년문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문수 신부의 수도자로서의 삶과 청년문간 운영,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 등을 담은 구술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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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서울연구원 서울경관기록화 사업 (2020년 성북구)
- 서울연구원에서 진행한 서울경관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된 사진들이다. 서울경관기록화 사업은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서울의 대표적인 장소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모습을 5년마다 주기적으로 촬영하는 사업이다. 2019/2020년에는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주제로 약 9000여 장의 사진이 촬영되었고, 그 중 성북구는 300여 장이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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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2018 장위부마축제
- 제8회 장위부마축제 현장 사진이다. 장위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무대에서 행사가 진행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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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2022년 의릉문화축제
- 2022년 의릉 문화축제 당시 행사를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축제에 참여한 많은 주민들이 의릉 문화축제 공연을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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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2022 유러피언 크리스마스 마켓(2)
- 2022년 12월 10일부터 11일 까지 진행된 제 11회 유러피언 크리스마스 마켓 축제 중 12월 11일자 마켓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한성대입구역 2번 출구 앞 성북천 분수마루에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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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2022 유러피언 크리스마스 마켓(1)
- 2022년 12월 10일부터 11일 까지 진행된 제 11회 유러피언 크리스마스 마켓 축제 중 12월 10일자 공연을 촬영한 사진이다. 한성대입구역 2번 출구 앞 성북천 분수마루에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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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류
- 2022 제14회 성북세계음식축제 누리마실(2)
- 2022년 9월 25일 진행된 제14회 성북세계음식축제 누리마실 현장 사진이다. 축제 메인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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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에 나타난 문화적 기억과 작품연구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을 중심으로-
- 본 연구는 과거 미아리고개라는 장소가 오늘날 어떻게 이질적 공간으로 배척되고 있었는지를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오늘날 그 터의 의미와 집단의 장소 기억이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순수미술작가들의 작품을알라이다 아스만이 말한 문화적 기억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공간은미아리 공동묘지, 미아리 점성촌, 그리고 미아리 고가 하부공간에 형성된 복합문화예술공간 미인도이다. 위 공간들에서 영감 받은 작품과 실제 미인도에서 진행된 기획전시 작품을 토대로 미아리고개와주변 공간이 오늘날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 문화적 기억을 환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분석을 통해서 미아리고개라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가 오늘날 더는 타자화된 공간이 아닌, 생동감 있는 공간이자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재생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런 점에서 미아리고개와 주변 공간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업은 오늘날 대중에게 다양한 문화적 기억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 다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는 오늘날 무분별하게상실되어가는 장소 기억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상징적인 장소들을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들과 그 장소가 가진 기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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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서울 미아동의 문학지리학- 도시개발사와 문학적 재현
- 이 논문은 일제하부터 1990년대까지 미아동의 구체적인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동을 문학지리학적 관점에서 되짚어봄으로써, 미아동이 실제 행정구역으로서의 미아동과 심상적 지리로서의 미아리가 중첩되고 혼재된 동네였음을 분석하였다. 또한 이광수, 김동명, 서정주, 김소진, 윤대녕 등의 문학텍스트에 재현된 도시공간과 실제 도시공간의 개발사를 연관시키면서, 일제하 공동묘지 형성부터 난민정착지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달동네의 모습까지 도시개발의 역사에 따라 시기적으로 변화해온 미아동의 문학적 재현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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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소수자 배제에서 포용으로의 사회공간적 변화 연구: 서울시 동선동 점복촌의 시각장애인 역학사를 사례로
- 본 연구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점복촌을 사례로 시각장애인 역학사에 대한 배제와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의 사회공간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포용도시 구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 판수라 불렸던 시각장애인 역학사는 국가의 지원 하에 점복·독경을 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6·25 전쟁 후 서울 남산 자락과 종로 3가 등에 점복촌이 형성되었으나 도시정비사업으로 철거되고, 1970년대에 지가가저렴하고 유동인구가 많던 미아리 고개 주변에 점복촌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동선동에서 점자도서관설립 반대, 전통거리 조성 사업의 무산, 역학원 운영에 대한 주민과의 마찰과 같은 사회공간적 차별과 배제가 나타났다. 2010년 이후에는 시각장애인의 점복·독경에 대한 법적·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도시재생활동을 통해 점복촌이 역사·문화적 가치를 지닌 장소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지역 통합과 포용으로의 관계적 변화는, 배제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적 전략으로서의 점복촌 형성 등 시각장애인 역학사 개인 및 집단 차원에서 전개한 주체적노력과 지역공동체 중심의 재생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이는 포용도시의 비전을 공유하기 위한 수행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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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서울의 문화유적과 콘텐츠화 방안-성북구 낙산지역을 중심으로-
- 본고는 서울시 성북구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낙산지역의 콘테츠화 방안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낙산지역의 문화콘텐츠화의 필요성으로서 낙산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위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조선시대 낙산지역은 도성의 동쪽을 방어하는 성곽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뛰어난 경치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경치를 遊賞하던 문화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낙산지역의 주요 문화유적들을 점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콘텐츠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몇 가지 첨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복원하지 못한 역사․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낙산지역의 문화유적들은 복원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석양루가 한 예가 될 것이다. 현재 석양루터는 이화동 주민들의 주거공간에 위치하여 복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잇는 복원사업의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문화재의 복원은 도시의 이미지와 가치를 제고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효종대 최고의 甲第이자 사대부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석양루를 복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둘째, 현재 복원된 문화유적들은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庇雨堂과 淨業院터가 예가 될 것이다. 비우당의 경우, 비교적 복원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비우당의 구체적인 의미와 이수광의 삶과 학문을 좀더 적극적으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정업원터의 경우는 관람공간도 협소하고 해설이 소략하여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낙산지역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부분 성곽을 돌고 이화동 벽화마을만 구경하고 돌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문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 담긴 표지석과 영상 안내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셋째, 낙산공원의 산책로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유적과 연결된 낙산공원의 산책로는 성곽 안쪽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성곽 바깥쪽인 창신동․삼선동․숭인동의 문화유적들은 관람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 결과 비우당․정업원․청룡사․동망봉․삼군부 총무당 등은 있는지조차 모르는 관람객들이 많다. 따라서 낙산 정상에 있는 놀이광장에서부터 창신동․숭인동․삼선동을 연결하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로서의 산책로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관람객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조직해야 한다. 2장에서 언급했던 ‘巡城놀이’는 현재 서울시에서 프로그램화하여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낙산지역이 조선시대 저명인사들이 많이 거처하였고 별장을 중심으로 酬唱과 풍류 문화가 이루어졌던 공간임을 착안하여 주변 한성대학교와 연계하여 문학 관련 행사를 마련하거나 국악 관련 공연을 개최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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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자료
- 옛 文人들이 사랑한 서울의 동북 지역
- 조선 시대 文人들은 도성 생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양의 동북 지역에 별장과 정자를 짓고 노닐었다. 吳泰周와 吳瑗은 鍾巖洞에 별장을 지어 詩酒와 書畵를 즐기며 文友들과 교유하였다. 종암의 별장을 배경으로 한 오원의 시에는 부친인 오태주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洪良浩는 牛耳洞에 별장을 꾸미고 독서와 사색으로 이루어진 한가한 삶을 영위하였다. 소의 귀가 지니는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安分自足하는 은거를 꿈꾸었다.
石串洞에 東庄이라는 거처를 마련한 金昌業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집과 주위의 모든 사물에 대해 큰 애정을보였다. 나무, 꽃, 풀, 과일, 채소 등에 대한 연작시는 조선 후기에 새로이 나타난 주거의 양상을 보여준다는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서울의 동북 지역에 있는 北漢山은 유명한 관광지였을 뿐만 아니라 학업에 힘쓰는 공간 등 다양한 성격을지니고 있었다.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道峯山과 水落山은 번잡한 도성을 떠나 은거를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이사랑하였던 곳이다. 도봉산에는 趙光祖와 劉希慶, 수락산에는 金時習과 朴世堂의 자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