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과 시장
도축업
도축업은 식생활을 비롯한 기타 소비생활에서 필요한 고기肉, 기름脂, 뼈骨, 털毛, 가죽皮 등을 생산할 때 가장 우선 단계로서 동물을 도살, 해체하는 업을 말한다.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있는 신근솔이라는 곳은 솔밭이 많아 풍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다. 지방에서 소를 몰고 서울로 들어올 때에는 신근솔에서 숙박을 하고 소를 매어 놓았다가 장위동 노변 도살장에서 소를 매도한 다음 돌아갔는데 소장사들이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26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도살은 국가에서 허가된 곳에 한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고, 도살을 하는 사람들은 백정이라고 하여 천민으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도축업의 중심 재정원財政源인 도장屠場 경영은 관영과 사설이 있었으나 그 비중 및 양상은 일제에 의하여 수차례 변하였다. 1896년 「포사규칙庖肆規則」은 농상공부 허가를 통하여 일반인의 사도私屠 운영을 할 수 있게 하였으나, 1905년 9월 『도수장병수육판매규칙屠獸場竝獸肉販賣規則』은 도장을 관설官設로 정하여 그 경영을 관에 제한하였고 수육판매업은 관청 신고제로 정하였다. 이때 일제는 도축업의 주요 재원인 도장 경영권을 종래 시도들로부터 완전히 박탈함과 동시에 도축 관련업의 모든 수취권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1909년 8월에는 「도수규칙屠獸規則」을 통하여 허가에 의한 사설도장 운영을 하도록 다시 전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는 전국의 소규모 도장에 대하여 경영상 통일의 필요성과 위생 풍교시설
등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강매를 통한 관영화를 계속 강행하였다.
『서울통계자료집(일제강점기편)』 ‘경성부 부근읍면 일반경제 재산명세표’를 보면 1933년 3월 말 현재 숭인면의 공용 및 공공용 재산부분에서 도장屠場 항목이 빠져 있다. 또 ‘경성부 부근읍면 1933년도 세입 세출 결산표’ 위생비 세출에서도 숭인면의 도장비屠場費 항목은 공란으로 남아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숭인면에 공설 도장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018년 민속조사에서 장위동, 월곡동, 석계동 토박이들은 해방 전까지 장위동에서 미아사거리로 가는 길에 큰 도살장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도살장은 사설 도장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후에도 도살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 한국산업은행에서 출간한 『광업 및 제조업 사업체명부』에는 하월곡동 79번지에 사장 현종玄種 씨가 운영하는 미아리도살장이 등록되어있다. 장위동 토박이 우덕수 씨는 어려서 도살장에 많이 갔었다고 한다. 그 위치가 대략 예전 중외제약 근처, 즉 창문여고 맞은편이라고 하고, 근처에는 다른 도살장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동일한 도살장일 가능성이 크다. 1961년에 마장동에 ‘동양 최대 규모’의 도축장이 개장하였는데, 그 후 이 미아리도살장은 마장동으로 이전해 갔고, 소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으로 바뀌게 되면서 이 도살장을 기반으로 한 아교공장, 피혁공장 등도 점차 근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공설이나 사설과는 별개로 장위동 · 석관동 지역에는 무허가 도살장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마을사람들은 그 당시 농사도 했고 또 암암리에 소도 잡아 팔았어요. 당시 단속이 심해서 한 곳에서 오래 하지를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했는데, 혹시라도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쳐 들키면 잡혀 가서 벌금을 내곤 했었죠. 한번 소를 잡으려면 다섯 명에서 여섯 명 정도 투입되었어요. 그렇게 소를 잡아 파는 사람이 무려 7~8명 정도 되었어요. 소는 주로 경기도 우시장에 가서 암소를 사요. 그러면 소를 끌어다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요. 잡은 소는 주로 뼈째로 각을 떠서 바로 시내로 들어갔죠. 큰 시장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나온 가죽은 가죽공장에 팔았죠. 종암동에 가죽공장이 있었어요. (석관동 강명복 씨 구술. (2018년 조사, 면담자: 류영희))
미아리도살장 및 무허가 도살장이 있음으로 하여 장위동 근처에 마방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마방에서 야윈 소를 데려다가 먹여 살을 찌워 되파는 사람도 있었다. 또 도살장에서 나오는 가죽으로 생가죽장사를 하던 사람도 있었고, 가죽을 가공하는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소뼈를 끓여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공장은 주로 타동 사람들이 했었는데 상월곡동 정보센터 쪽으로 한 집 있었다. 아교공장은 맥주공장이 들어오기 전에 주로 종암동에 많았다고 한다. △△△씨는 생가죽장사로 돈을 번 유명한 장사꾼 중의 한명이다. 장위동, 월곡동, 석관동 일대에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하고, 그 자손들이 아직도 장위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갖바치라고 하면 자손들이 듣기 거북해 한다고 하면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를 꺼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