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승려이다. 혜근이라고도 한다. 21세 때 공덕산 묘적암에 있는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는 참선과 교학을 같이 닦음으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 고려 말의 선풍을 새롭게 선양하였다. 또한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우왕 2년(1376)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정릉 2동에 있는 봉국사는 원래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된 약사사(藥師寺)였는데 조선 현종 10년(1669)에 현재의 명칭인 봉국사로 고쳤다.
◎ 懶翁 1320(충숙왕 7)∼1376(우왕 2)
高麗말의 고승. 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牙氏, 속명은 元惠, 호는 懶翁 또는 江月軒이며 善官署令 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공덕산 妙寂庵에 있는 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檜巖寺에서 大悟하였다. 1347년(충목왕 3) 元나라로 건너가서 燕京 法源寺에 머물면서 4년 동안 인도승 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 에 그의 곁을 떠나 平江府 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냈고, 다시 慈禪寺의 處林을 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이듬해 溟州의 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1352년에는 伏龍山의 千巖長을 찾았다. 그의 소문을 들은 원나라 順帝는 연경의 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는 金爛袈裟를 하사하고 지극한 예우로써 우대하였으나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공민왕 7년(1358)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神光寺에 머물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뒤 功夫選의 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1373년 無學에게 法을 이어 주었으며, 1376년(우왕 3) 에는 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나옹은 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習定均慧와 動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禪을 이해시키고자하였다. 또한 그의 〈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戒律觀에서도 三歸依가 아닌 四歸依를 주장하고 있는 바, 戒目으로는 ① 受淨信四歸依, ② 懺除諸三業罪, ③ 發弘誓六大願, ④ 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나옹은 고려말 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密陽 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록사에서 입적하였다. 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제자로는 自超·智泉 등 2,000여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懶翁和尙語錄》 1권과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禪覺이다.
한편 나옹이 신이 도운 인물이라고 하는 說話가 있는데, 문헌설화는 〈나옹화상 행장〉에 부분적으로 언급이 있고, 출생에 관한 부분은 《영해군읍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나옹의 행장에서는 나옹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다고만 했는데, 출생지인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변 현지의 구전에 의하면 가난해서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못해 어머니가 관가에 잡혀가는 도중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무도한 관속들이 계속 어머니를 끌고 가자 핏덩이인 채로 거기 버림받았던 아이를 날짐승이 날개로 덮어 주어 살아났다. 열살쯤 되었을 때, 외를 동냥하러 온 스님을 따라 나서서 출가를 했다. 득도해서 자기 고장을 떠나면서 지팡이를 꽂고,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 가지가 무성하면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그나무가 지금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서 반송으로 크게 자랐는데, 최근에는 시들기 시작해서 나옹이 이제 죽었다고들 한다.
성북구 貞陵 2동에는 奉國寺가 있다. 이 절은 고려 恭愍王 3년(1354)에 왕사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法殿의 12大願을 안에 藥師如來像을 봉안하였음으로 하여 藥師寺로 이름하였는데, 조선 顯宗 10년(1669)에 절 남쪽에 있는 神德王后의 貞陵을 修封하고 제사드리면서 이 절을 願刹로 하고 이름을 奉國寺로 고쳤다.
◎ 懶翁 1320(충숙왕 7)∼1376(우왕 2)
高麗말의 고승. 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牙氏, 속명은 元惠, 호는 懶翁 또는 江月軒이며 善官署令 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공덕산 妙寂庵에 있는 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檜巖寺에서 大悟하였다. 1347년(충목왕 3) 元나라로 건너가서 燕京 法源寺에 머물면서 4년 동안 인도승 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 에 그의 곁을 떠나 平江府 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냈고, 다시 慈禪寺의 處林을 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이듬해 溟州의 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1352년에는 伏龍山의 千巖長을 찾았다. 그의 소문을 들은 원나라 順帝는 연경의 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는 金爛袈裟를 하사하고 지극한 예우로써 우대하였으나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공민왕 7년(1358)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神光寺에 머물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뒤 功夫選의 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1373년 無學에게 法을 이어 주었으며, 1376년(우왕 3) 에는 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나옹은 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習定均慧와 動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禪을 이해시키고자하였다. 또한 그의 〈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戒律觀에서도 三歸依가 아닌 四歸依를 주장하고 있는 바, 戒目으로는 ① 受淨信四歸依, ② 懺除諸三業罪, ③ 發弘誓六大願, ④ 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나옹은 고려말 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密陽 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록사에서 입적하였다. 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제자로는 自超·智泉 등 2,000여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懶翁和尙語錄》 1권과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禪覺이다.
한편 나옹이 신이 도운 인물이라고 하는 說話가 있는데, 문헌설화는 〈나옹화상 행장〉에 부분적으로 언급이 있고, 출생에 관한 부분은 《영해군읍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나옹의 행장에서는 나옹이 태어날 때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다고만 했는데, 출생지인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변 현지의 구전에 의하면 가난해서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못해 어머니가 관가에 잡혀가는 도중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무도한 관속들이 계속 어머니를 끌고 가자 핏덩이인 채로 거기 버림받았던 아이를 날짐승이 날개로 덮어 주어 살아났다. 열살쯤 되었을 때, 외를 동냥하러 온 스님을 따라 나서서 출가를 했다. 득도해서 자기 고장을 떠나면서 지팡이를 꽂고,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나 가지가 무성하면 자기가 살아 있는 줄 알라고 하였다, 그나무가 지금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서 반송으로 크게 자랐는데, 최근에는 시들기 시작해서 나옹이 이제 죽었다고들 한다.
성북구 貞陵 2동에는 奉國寺가 있다. 이 절은 고려 恭愍王 3년(1354)에 왕사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法殿의 12大願을 안에 藥師如來像을 봉안하였음으로 하여 藥師寺로 이름하였는데, 조선 顯宗 10년(1669)에 절 남쪽에 있는 神德王后의 貞陵을 修封하고 제사드리면서 이 절을 願刹로 하고 이름을 奉國寺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