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면은 독자가 투고하는 글을 싣는 란이었다.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가명을쓴 사람이 삼산학교의 상황을 알리는 글을 투고했다. 이 기사의 시작 부분을 길지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군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짖는 현재의 향학열을 보라.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 의 작물을 가지고 금의옥식錦衣玉食으로 지내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백의인으로 동족인 제군은 제14회의 졸업생을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 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 한가. 전 교주 황수연씨가 죽은 뒤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 면장 김기택金基宅씨, 안응선安應善씨의 노심초사로 겨우 유지하였다.
(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사람은 삼산학교를 도울 것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 지면은 독자가 투고하는 글을 싣는 란이었다.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가명을쓴 사람이 삼산학교의 상황을 알리는 글을 투고했다. 이 기사의 시작 부분을 길지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군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짖는 현재의 향학열을 보라.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 의 작물을 가지고 금의옥식錦衣玉食으로 지내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백의인으로 동족인 제군은 제14회의 졸업생을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 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 한가. 전 교주 황수연씨가 죽은 뒤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 면장 김기택金基宅씨, 안응선安應善씨의 노심초사로 겨우 유지하였다.
(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사람은 삼산학교를 도울 것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했다.)
1916년 사실상 홀로 삼산의숙을 운영하던 황수연이 별세했다. 삼산의숙은 자금난에 부딪치게 된다.지역 주민들이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걷어 운영 경비를 대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지역유지, 면장 등이 적극적으로 학교를 지키려 노력하여 간신히 유지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성북동 부호들이 삼산의숙 운영에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