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연주자이다. 평양사범학교에서 선교사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일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창립멤버로 참가하였다. 6.25전쟁기에는 서울교향악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해군정훈음악대(현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에 한규동·이관옥의 집에 살던 전봉초가 이사하면서 집이 비자 이봉수에게 소개해 주었고, 거처를 삼선동으로 옮기게 된다. ‘바이올린 소나타의 밤’을 비롯하여 수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를 선보인 이봉수는 한국 교향악단 개척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교육자로서 한국근대음악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악장을 맡은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일본고등음악학원에 유학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 징집을 피해 김동조, 전봉초 등과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연주자로 활동한다.
1957년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악장을 맡아 이끌었다. 1960년대 삼선동으로 이사한다. 이관옥과 한규동 부부가 마련한 집에 살던 전봉초 가족이 근처로 이사한 곳에 들어간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전봉초와 함께 실내악을 보급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악장을 맡은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일본고등음악학원에 유학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 징집을 피해 김동조, 전봉초 등과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연주자로 활동한다.
1957년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악장을 맡아 이끌었다. 1960년대 삼선동으로 이사한다. 이관옥과 한규동 부부가 마련한 집에 살던 전봉초 가족이 근처로 이사한 곳에 들어간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전봉초와 함께 실내악을 보급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들을 통해 바이올린을 배운다.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고등음악학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하지만 태평양전쟁 때 징집을 피해 1942년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한다. 신경교향악단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동조, 첼리스트 전봉초 등 일본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건너가 활동한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 들어간다. 지휘 계정식, 악장 김생려, 수석연주자 전봉초 외에 이흥렬, 정희석, 나운영, 임원식 등 서양음악의 1세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계정식이 지휘자에서 사퇴하고 현제명이 연구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재정까지 악화되며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민족음악 양성에 뜻을 같이하던 계정식, 김생려, 전봉초 등이 의기투합하여 1946년 10월 서울관현악단을 창립(1947년 서울교향악단으로 개칭)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교향악단 활동이 이어지지 못한다. 서울교향악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해군정훈음악대 단원으로 편입하여 연주자로서 기량을 키워간다. 해군정훈음악대는 1954년 해군교향악단,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른다. 초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아 우리나라 고향악단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6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강사로 활동하던 중 삼선동으로 이사한다. 삼선동 집은 일본과 만주, 부산 피난시절에 동고동락하며 악단생활을 함께 한 전봉초가 살던 집이었다. 이관옥의 집에 살던 전봉초가 바로 윗 골목으로 이사하며 집이 비자 이봉수가 소개를 받아 거처를 옮겼다. 명절이나 축하 할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모였고, 아이들은 피아노를 치거나 함께 뛰놀며 어울렸다.
강사로 나가던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교수로 자리 잡아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전봉초와 함께 실내악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1967년에는 ‘바이올린 소나타의 밤’을 개최하였고 이후에도 꾸준히 바이올린 독주회를 선보인다. 1972년에는 바로크합주단 연주회에서 윌리엄스의 협주곡 D단조를 초연하는 등 새로운 음악 흐름을 주시하며 음악계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국 교향악단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바이올린 연주자와 교육자였던 이봉주는 한국근대음악의 발전에 공헌을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1917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들을 통해 바이올린을 배운다.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고등음악학원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전공하지만 태평양전쟁 때 징집을 피해 1942년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한다. 신경교향악단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동조, 첼리스트 전봉초 등 일본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건너가 활동한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 들어간다. 지휘 계정식, 악장 김생려, 수석연주자 전봉초 외에 이흥렬, 정희석, 나운영, 임원식 등 서양음악의 1세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계정식이 지휘자에서 사퇴하고 현제명이 연구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재정까지 악화되며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수한 민족음악 양성에 뜻을 같이하던 계정식, 김생려, 전봉초 등이 의기투합하여 1946년 10월 서울관현악단을 창립(1947년 서울교향악단으로 개칭)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교향악단 활동이 이어지지 못한다. 서울교향악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해군정훈음악대 단원으로 편입하여 연주자로서 기량을 키워간다. 해군정훈음악대는 1954년 해군교향악단,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른다. 초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아 우리나라 고향악단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6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의 강사로 활동하던 중 삼선동으로 이사한다. 삼선동 집은 일본과 만주, 부산 피난시절에 동고동락하며 악단생활을 함께 한 전봉초가 살던 집이었다. 이관옥의 집에 살던 전봉초가 바로 윗 골목으로 이사하며 집이 비자 이봉수가 소개를 받아 거처를 옮겼다. 명절이나 축하 할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모였고, 아이들은 피아노를 치거나 함께 뛰놀며 어울렸다.
강사로 나가던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교수로 자리 잡아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전봉초와 함께 실내악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활동에 참여한다. 1967년에는 ‘바이올린 소나타의 밤’을 개최하였고 이후에도 꾸준히 바이올린 독주회를 선보인다. 1972년에는 바로크합주단 연주회에서 윌리엄스의 협주곡 D단조를 초연하는 등 새로운 음악 흐름을 주시하며 음악계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국 교향악단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바이올린 연주자와 교육자였던 이봉주는 한국근대음악의 발전에 공헌을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의
1917∼1996. 바이올리니스트.
내용
황해도 은율 출생.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해방 전에는 만주의 신경교향악단(新京交響樂團)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을 하였고, 해방 후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창립멤버로 참가하였다.
한국 전쟁기에는 해군정훈음악대 단원으로 활약을 하였고, 이어 해군교향악단 단원 및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역임하였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강사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바이올린소나타의 밤’을 비롯하여 수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진 바 있다. 선교사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제1세대에 이어 외국에서 정식으로 공부한 제2세대 바이올린 연주자에 해당한다. 한국 교향악단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바이올린 연주자와 교육자로서 한국근대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