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이다. 외사촌 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고, 1938년 ‘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를 통해 성악가로 데뷔한다. 이듬해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한 뒤, 1943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다. 1944년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해방 이후 배재중학교와 경동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49년 우리나라 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한 공연 <파우스트> 의 대본을 직접 번역하고 주연을 맡았다. 1955년 오페라와 실내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향성회’를 조직하고, ‘한국가곡’이란 용어를 처음 규정한 『한국가곡집』을 편찬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고, 1974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규동·이관옥 부부는 1950년대부터 삼선동에 거주했는데 음악가 전봉초, 소설가 정한숙 가족과 서로 오가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한국 가곡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성악가이다. 외사촌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인 테너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9년 조선일보 주최의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하고,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유학한다.
1944년 5월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한다. 1949년 1월에는 우리나라 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한 공연 <파우스트Faust>를 번역, 각색하고 주연을 맡는다. 오페라와 실내악을 널리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1955년 향성회響聲會를 조직하고, 『한국가곡집』을 편찬하며 우리나라 가곡을 ‘한국가곡’이란 정식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1950년대부터 삼선동에 거주하였다. 1973년 6개월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아내 이관옥과 음악회를 열고 한국 가곡을 알렸다.
한국 가곡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성악가이다. 외사촌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인 테너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9년 조선일보 주최의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하고,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유학한다.
1944년 5월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한다. 1949년 1월에는 우리나라 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한 공연 <파우스트Faust>를 번역, 각색하고 주연을 맡는다. 오페라와 실내악을 널리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1955년 향성회響聲會를 조직하고, 『한국가곡집』을 편찬하며 우리나라 가곡을 ‘한국가곡’이란 정식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1950년대부터 삼선동에 거주하였다. 1973년 6개월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아내 이관옥과 음악회를 열고 한국 가곡을 알렸다.
성악가 한규동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들어가지만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두었던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을 그만둔다. 외사촌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인 테너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고, 1938년 스물 여섯 살 때‘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를 통해 성악가로 데뷔한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한 뒤,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한다.
귀국 후 1944년 5월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한다. 슈베르트의 가곡과 이탈리아의 가곡 <마농레스코>의 아리아 등을 선보여 다채롭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돋보이는 테너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이후 배재중학교와 경동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순수한 음악문화의 발전과 민족음악의 수립을 위해 동료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대한연주가협회에서 활동한다. 한편, 한국 오페라가 막 싹을 틔우던 1949년 1월, 한국과 프랑스 친선문화단체 한불협회가 첫 번째 사업으로 선정한 오페라 <파우스트> 공연에 참여한다. 공연을 위해 1년 여 간 대본을 직접 번역하고, 주인공 파우스트 역을 맡았다. 5월 앵콜 공연까지 한 <파우스트>는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1955년에는 오페라와 실내악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음악가들의 모임인 ‘향성회響聲會’를 만들어 음악 연구에 매진한다. 그 결과 ‘한국가곡’이란 용어를 처음 규정한 『한국가곡집韓國歌曲集』이 편찬된다. 책 출판을 기념하며 음악회를 개최하고, 한국가곡의 위상을 세우고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해나간다. 같은 해에는 한국교육음악협회가 주최하는 목요음악 감상회에 참여한다. 고전 클래식부터 현대 음악, 샹송, 재즈까지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한규동, 김동진, 이흥렬, 김천애 등의 성악가들이 노래를 하고, 곡 해설을 해주었다. 대중들에게 가곡을 친숙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던 중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가곡을 틀게 했다. 김대현이 작곡한 <자장가>는 한국방송 심야프로그램 시그널 음악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곡이다.
한국가곡과 서양고전음악을 알리는 활동 외에도 분열된 음악계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음악가들의 개성과 활동은 존중하며 우리나라 음악계를 발전시키려면 하나의 목소리로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음악가협회와 음악단체연합회로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원로와 젊은 음악가들을 중재하고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그 결실로 1961년 한국음악협회가 생겼고, 한규동과 조상현이 부이사장을, 이유선이 이사장을 맡았다.
1957년부터 1977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와 학장을 지내고, 1974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에는 약 6개월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아내 이관옥과 음악회를 개최하여 한국 가곡을 해외에 알린다. 한국 가곡의 태동기에 성악가와 음악교육자로서 발전을 이끈 한규동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음악활동을 뒤로한 채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머물다 1996년 생을 마감한다.
성악가 한규동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들어가지만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두었던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을 그만둔다. 외사촌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인 테너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고, 1938년 스물 여섯 살 때‘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를 통해 성악가로 데뷔한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한 뒤,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한다.
귀국 후 1944년 5월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한다. 슈베르트의 가곡과 이탈리아의 가곡 <마농레스코>의 아리아 등을 선보여 다채롭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돋보이는 테너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이후 배재중학교와 경동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순수한 음악문화의 발전과 민족음악의 수립을 위해 동료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대한연주가협회에서 활동한다. 한편, 한국 오페라가 막 싹을 틔우던 1949년 1월, 한국과 프랑스 친선문화단체 한불협회가 첫 번째 사업으로 선정한 오페라 <파우스트> 공연에 참여한다. 공연을 위해 1년 여 간 대본을 직접 번역하고, 주인공 파우스트 역을 맡았다. 5월 앵콜 공연까지 한 <파우스트>는 우리나라 오페라 공연의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1955년에는 오페라와 실내악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음악가들의 모임인 ‘향성회響聲會’를 만들어 음악 연구에 매진한다. 그 결과 ‘한국가곡’이란 용어를 처음 규정한 『한국가곡집韓國歌曲集』이 편찬된다. 책 출판을 기념하며 음악회를 개최하고, 한국가곡의 위상을 세우고 알리는 일을 꾸준히 해나간다. 같은 해에는 한국교육음악협회가 주최하는 목요음악 감상회에 참여한다. 고전 클래식부터 현대 음악, 샹송, 재즈까지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한규동, 김동진, 이흥렬, 김천애 등의 성악가들이 노래를 하고, 곡 해설을 해주었다. 대중들에게 가곡을 친숙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던 중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으로 가곡을 틀게 했다. 김대현이 작곡한 <자장가>는 한국방송 심야프로그램 시그널 음악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곡이다.
한국가곡과 서양고전음악을 알리는 활동 외에도 분열된 음악계를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음악가들의 개성과 활동은 존중하며 우리나라 음악계를 발전시키려면 하나의 목소리로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음악가협회와 음악단체연합회로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원로와 젊은 음악가들을 중재하고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그 결실로 1961년 한국음악협회가 생겼고, 한규동과 조상현이 부이사장을, 이유선이 이사장을 맡았다.
1957년부터 1977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와 학장을 지내고, 1974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에는 약 6개월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아내 이관옥과 음악회를 개최하여 한국 가곡을 해외에 알린다. 한국 가곡의 태동기에 성악가와 음악교육자로서 발전을 이끈 한규동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음악활동을 뒤로한 채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머물다 1996년 생을 마감한다.
1912 서울 출생
1938 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 데뷔
1943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
1944 제1회 독창회 개최
1949 오페라 <파우스트> 주연
1955 한국가곡집 출간
1961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역임
1957~1977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학장 역임
1974 숙명여자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수여
1996 별세
1912 서울 출생
1938 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 데뷔
1943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
1944 제1회 독창회 개최
1949 오페라 <파우스트> 주연
1955 한국가곡집 출간
1961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역임
1957~1977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학장 역임
1974 숙명여자대학교 명예박사 학위 수여
1996 별세
정의
해방 이후 경동중학교 교사,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 학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성악가.
내용
1912∼1996. 서울 출생. 안기영(安基永)에게 성악을 배운 후 1938년 6월 27일부민관(府民館)에서 개최된 ‘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를 통해 데뷔를 하였다. 1939년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을 하였고, 선린상업고등학교와 1943년일본고등음악학교(日本高等音樂學校)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배재중학교와 경동중학교 음악교사를 거쳐 해군정훈음악대(海軍政訓音樂隊)의 총무부장으로 활동을 하였고, 한국음악협회 초대 사무총장과 부이사장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7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고, 1974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4년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국 오페라의 초창기 시절인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초연인 구노(Gounod)의 오페라 「파우스트(Faust)」에 출연하였다. 195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국가곡집(韓國歌曲集)』(향성회)을 편찬하였는데, 이 가곡집의 출판을 계기로 한국 가곡이 정착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그 정형이 결정되었다.
1973년에는 약 6개월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뱅쿠버 등지에서 부인인 소프라노 이관옥(李觀玉)과 함께 독창회와 이중창의 밤을 개최하여 한국 가곡을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다. 성악가와 음악교육자로서 한국 음악예술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특히 한국가곡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