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이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으로 인해 보통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1917년 간도로 이주하였으나 더욱 가난해져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한다. 이후 그는 많은 소설을 썼다. 그는 「탈출기」, 「기아와 살육」, 「살려는 사람들」, 「가난한 아내」 등 소설 속에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계급문학으로 문단의 인기를 끌었다. 1932년 7월 유문협착증 치료를 받다가 삶을 마쳤다.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에는 묘비가 세워진 해인 1935와 서해(曙海)라는 그의 호만 새겨져 있었다. 1958년 9월 미아리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그의 유해는 망우리로 옮겨졌다.
故曙海崔鶴松(고서해최학송) 移葬(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 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한다고 한다.
이장시일 = 25일 상오 12시 미아리 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 망우리 공동묘지
발 기 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명
경향신문 1958. 9. 21
故曙海崔鶴松(고서해최학송) 移葬(이장)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우리 문단 초기에 「그믐밤」, 「탈출기」, 「혈흔」 등 많은 단편 역작을 내어 우리 문단에 사실주의 소설의 첫걸음을 남기고 작고한 서해 최학송 선생의 유해를 미아리 공동묘지를 없애게 됨에 따라 문화계에서는 그 이장식을 다음과 같이 거행한다고 한다.
이장시일 = 25일 상오 12시 미아리 공동묘지 집합
이장장소 = 망우리 공동묘지
발 기 인 = 오상순, 염상섭, 박종화, 모윤숙, 유진오, 이관구, 윤봉춘, 이승만, 정홍교 외 46명
경향신문 1958. 9. 21
최학송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그는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다니던 성진 보통학교도 중퇴해야 했다.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 그도 간도를 기회의 땅으로 여겼다. 1917년 그는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이주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실패했다. 그는 더욱 가난해져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경험과 기억을 갖고 쓴 작품이 『탈출기』이다.
김군!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오년 전이다. 이것은 군도 아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내가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간 것은 너무도 절박한 생활에 시들은 몸에 새 힘을 얻을까하여 새 희망을 품고 새 세계를 동경하여 떠난 것도 군이 아는 사실이다. ‘간도는 천부금탕이다.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를 가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농사를 지으면 쌀도 흔할 것이다. 삼림이 많으니 나무 걱정도 될 것이 없다.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리라. 이렇게 하면,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할수 있다.’이것이 간도 갈 때의 내 머릿속에 그리었던 이상이었다. … 김군! 그러나 나의 이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간도에 들어서서 한 달이 못되어서부터 거칠은 물결은 우리 세 생령(生靈)의 앞에 기탄없이 몰려왔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밭을 구하였다. 빈 땅은 없었다. 돈을 주고 사기 전에는 한 평의 땅이나마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소설「탈출기」중에서)
위는 「탈출기」의 내용이다. 주인공은 가난을 이기고자 간도로 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간도는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서든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수확도 좋고, 땔감 걱정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저 이상이었음을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도의 땅이 기름질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땅은 남아 있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을 사야 했고, 가난한 그에겐 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간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나무하러 가서 중국인들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두부 장수를 하고, 노동판에서 십장 노릇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 1923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가족까지―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한다. 이후 그는 많은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은 「탈출기」, 「기아와 살육」, 「살려는 사람들」, 「가난한 아내」 등 제목만 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었다. 사회주의 문학이 인기를 끌던 그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재가 된 그의 소설은 계급문학으로 문단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932년 1월, 그는 위 협착증 수술을 받다 가난한 삶을 마쳤다. 그가 묻힌 곳은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간도에서 한 평의 땅도 살 수 없었던 그는 죽어서야 제 몸 하나 뉘일 땅을 얻었다. 죽고 3년이 지나서야 그는 묘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나마도 가난한 문인들이 돈을 모아 만든 것이라 조잡하기까지 했다. 거기에는 묘비가 세워진 해인 1935와 서해曙海라는 그의 호만 새겨져 있었다.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그의 묘는 망우리로 옮겨졌다. 그때 세워진 묘비는 이제 조금 더 번듯한 것으로 바뀌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최학송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그는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다니던 성진 보통학교도 중퇴해야 했다.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 그도 간도를 기회의 땅으로 여겼다. 1917년 그는 어머니와 함께 간도로 이주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실패했다. 그는 더욱 가난해져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경험과 기억을 갖고 쓴 작품이 『탈출기』이다.
김군!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오년 전이다. 이것은 군도 아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떠났다. 내가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간 것은 너무도 절박한 생활에 시들은 몸에 새 힘을 얻을까하여 새 희망을 품고 새 세계를 동경하여 떠난 것도 군이 아는 사실이다. ‘간도는 천부금탕이다.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를 가든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농사를 지으면 쌀도 흔할 것이다. 삼림이 많으니 나무 걱정도 될 것이 없다. 농사를 지어서 배불리 먹고 뜨뜻이 지내자. 그리고 깨끗한 초가나 지어놓고 글도 읽고 무지한 농민들을 가르쳐서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리라. 이렇게 하면,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할수 있다.’이것이 간도 갈 때의 내 머릿속에 그리었던 이상이었다. … 김군! 그러나 나의 이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간도에 들어서서 한 달이 못되어서부터 거칠은 물결은 우리 세 생령(生靈)의 앞에 기탄없이 몰려왔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밭을 구하였다. 빈 땅은 없었다. 돈을 주고 사기 전에는 한 평의 땅이나마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소설「탈출기」중에서)
위는 「탈출기」의 내용이다. 주인공은 가난을 이기고자 간도로 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간도는 기름진 땅이 흔하여 어디서든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수확도 좋고, 땔감 걱정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저 이상이었음을 확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도의 땅이 기름질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땅은 남아 있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을 사야 했고, 가난한 그에겐 땅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간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나무하러 가서 중국인들에게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두부 장수를 하고, 노동판에서 십장 노릇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극복할 수 없었다. 1923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가족까지―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이라는 단편으로 등단한다. 이후 그는 많은 소설을 썼다. 그의 소설은 「탈출기」, 「기아와 살육」, 「살려는 사람들」, 「가난한 아내」 등 제목만 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었다. 사회주의 문학이 인기를 끌던 그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재가 된 그의 소설은 계급문학으로 문단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932년 1월, 그는 위 협착증 수술을 받다 가난한 삶을 마쳤다. 그가 묻힌 곳은 미아리 공동묘지였다. 간도에서 한 평의 땅도 살 수 없었던 그는 죽어서야 제 몸 하나 뉘일 땅을 얻었다. 죽고 3년이 지나서야 그는 묘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나마도 가난한 문인들이 돈을 모아 만든 것이라 조잡하기까지 했다. 거기에는 묘비가 세워진 해인 1935와 서해曙海라는 그의 호만 새겨져 있었다.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그의 묘는 망우리로 옮겨졌다. 그때 세워진 묘비는 이제 조금 더 번듯한 것으로 바뀌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