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정조 13) 현재 정릉동 손가정 마을 사람들과 이 지역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김계연 사이에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이다. 손가정은 북한산 아래에 있어서 풍광이 빼어나 많은 사대부들이 찾는 명소였다. 사대부 중 손가정의 토지를 사들여 별장을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꾸미는 사람도 생겨났는데, 이들과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극심한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1789년에 정조가 능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손가정 마을의 손봉덕 등이 길을 막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사정이 드러나게 되었다. 별장과 정자를 소유한 김계연이 주민들이 개간하여 경작한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며 노비들을 풀어 위협하고 강제로 세를 걷어갔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직접 조사를 지시한 후 손가정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손가정은 서울 근교 북한산 아래에 있어서 그 풍광을 사랑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너무 깊은 사랑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치닫는 것일까? 지위나 재력 가진 도성 안 사대부 중에는 직접 손가정의 토지를 사들여 자신을 위한 별서를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꾸미는 사람도 생겨났다. 김려의 시에 나오는 조현명의 정자, 이승희의 일기에 나오는 김병기의 별서와 정원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이와 같은 도성 안 사대부들의 근교 사유지 확대는 손가정만이 아닌 교외의 모든 전원 마을이 겪는 운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들 ‘떵떵거리는’ 사람들의 별서 소유는 때로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극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조선시대 별서는 단순히 별장 건물 한 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별서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모두 포함하는 일정한 범위 내의 토지 지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서가 생긴 곳에서는 늘 별서 소유자와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요소가 잠복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1789년 가을, 손가정 주민들과 김계연 사이에 일어난 분쟁은 바로 그러한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 국왕 정조가 직접 팔을 걷고 나선 사건이었다.
손가정은 서울 근교 북한산 아래에 있어서 그 풍광을 사랑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너무 깊은 사랑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치닫는 것일까? 지위나 재력 가진 도성 안 사대부 중에는 직접 손가정의 토지를 사들여 자신을 위한 별서를 만들고 그 안에 정자를 꾸미는 사람도 생겨났다. 김려의 시에 나오는 조현명의 정자, 이승희의 일기에 나오는 김병기의 별서와 정원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이와 같은 도성 안 사대부들의 근교 사유지 확대는 손가정만이 아닌 교외의 모든 전원 마을이 겪는 운명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들 ‘떵떵거리는’ 사람들의 별서 소유는 때로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극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다. 조선시대 별서는 단순히 별장 건물 한 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별서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모두 포함하는 일정한 범위 내의 토지 지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서가 생긴 곳에서는 늘 별서 소유자와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요소가 잠복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1789년 가을, 손가정 주민들과 김계연 사이에 일어난 분쟁은 바로 그러한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 국왕 정조가 직접 팔을 걷고 나선 사건이었다.
영조 재위시 도승지와 강화유수를 지낸 김상익金尙翼(1699∼1771)
은 노년에 이르러 손가정의 빈 땅을 매입하여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이 정자는 그의 손자 김계연金啓演(?∼?)에 이르기까지 이들 강릉 김씨가문의 재산으로 대물림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강릉 김씨 가문은 김상익을 포함해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 퇴임관리들의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에 들어간 사람이 6인이나 되어 세상에서 복문福門이라 일컬을 정도로 명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니 근교의 작은 농촌에서 이 가문 사람들의 위세는 얼마나 당당했겠는가.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김계연이 소유한 정자로 인해 손가정 사람들과 김계연 사이에 말썽이 빚어졌다. 1789(정조13)년 음력 9월 19일 한성부에서 올린 계언啓言을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1789년 음력 9월 어느 날, 정조가 능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
자기 어가 앞에 웬 사람들이 나타나 징을 울리며 막아섰다. 이를 격쟁擊錚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이 간혹 있어서 관아에서 외면 받은 하층 평민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나마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하소연(발괄白活이라고도 하였다)했다. 그날 정조 앞에 징을 들고 나타난 사람들은 손가정의 농민들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손덕봉孫德奉이란 사람으로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전장田莊의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도 모두 손씨孫氏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온 물건입니다. 중간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김상익金尙翼이 정자의 터를 매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이 외에 동네의 터에서는 전과 똑같이 경작해 왔습니다. 그런데 김상익의 양손養孫 김계연이 자기 집 입안立案 중에 들어있는 토지라고 하면서 새로 개간한 땅이나 예전에 개간한 땅을 막론하고 종을 풀어 위협하여 모두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대로 전해 온 땅을 난데없이 잃게 되었으니 원통합니다.”
─ 『국역 일성록』 정조13년 9월 19일
손가정 일대는 논농사를 짓기에 좋은 땅은 아니다. 사질 토양이라 물이 금방 빠져버려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가 되었다. 게다가 넓은 땅에 비해 상주 인구가 적었으므로 황무지로 내버려둔 땅도 많았다. 성 안의 고관대작들은 그 한가운데 있는 빈 땅을 사들여 거기에 정자를 짓고 정원을 꾸몄다. 처음에는 평화로웠다. 정자는 원래 용도대로 휴양을 위해 쓰였고, 손가정의 농민들은 빈 땅을 개간해서 밭으로 일구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땅의 질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김상익의 손자 계연이 정자 주위의 개간된 땅에 대하여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김계연은 자신들의 노비를 풀어 ‘자기’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손가정 사람들로부터 소작료를 걷기 시작했다. 김계연은 정자 주변의 농토를 개인 소유의 장원莊園으로 만들어 버렸다. 손가정 사람들은 억울했다. 그들은 손가정의 개간지나 황무지나 다 손씨들의 소유로만 알아서 능력껏 자유롭게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가계를 꾸려나갔던 것인데 하루아침에 성 안 고관대작의 자손이 들이닥쳐, 개간한 땅은 이미 자신이 신고했다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니 어찌 할 것인가. 손가정 사람들은 막무가내의 권력 앞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왕은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 줄 유일한 권력이었다.
영조 재위시 도승지와 강화유수를 지낸 김상익金尙翼(1699∼1771)
은 노년에 이르러 손가정의 빈 땅을 매입하여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이 정자는 그의 손자 김계연金啓演(?∼?)에 이르기까지 이들 강릉 김씨가문의 재산으로 대물림되었다. 이 무렵 서울의 강릉 김씨 가문은 김상익을 포함해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 퇴임관리들의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에 들어간 사람이 6인이나 되어 세상에서 복문福門이라 일컬을 정도로 명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니 근교의 작은 농촌에서 이 가문 사람들의 위세는 얼마나 당당했겠는가. 그러나 곧 문제가 생겼다. 김계연이 소유한 정자로 인해 손가정 사람들과 김계연 사이에 말썽이 빚어졌다. 1789(정조13)년 음력 9월 19일 한성부에서 올린 계언啓言을 보면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1789년 음력 9월 어느 날, 정조가 능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
자기 어가 앞에 웬 사람들이 나타나 징을 울리며 막아섰다. 이를 격쟁擊錚이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이 간혹 있어서 관아에서 외면 받은 하층 평민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나마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왕에게 하소연(발괄白活이라고도 하였다)했다. 그날 정조 앞에 징을 들고 나타난 사람들은 손가정의 농민들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손덕봉孫德奉이란 사람으로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전장田莊의 풀 한 포기나 나무 한 그루도 모두 손씨孫氏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온 물건입니다. 중간에 고故 봉조하奉朝賀 김상익金尙翼이 정자의 터를 매입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기는 하였으나, 이 외에 동네의 터에서는 전과 똑같이 경작해 왔습니다. 그런데 김상익의 양손養孫 김계연이 자기 집 입안立案 중에 들어있는 토지라고 하면서 새로 개간한 땅이나 예전에 개간한 땅을 막론하고 종을 풀어 위협하여 모두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대대로 전해 온 땅을 난데없이 잃게 되었으니 원통합니다.”
─ 『국역 일성록』 정조13년 9월 19일
손가정 일대는 논농사를 짓기에 좋은 땅은 아니다. 사질 토양이라 물이 금방 빠져버려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가 되었다. 게다가 넓은 땅에 비해 상주 인구가 적었으므로 황무지로 내버려둔 땅도 많았다. 성 안의 고관대작들은 그 한가운데 있는 빈 땅을 사들여 거기에 정자를 짓고 정원을 꾸몄다. 처음에는 평화로웠다. 정자는 원래 용도대로 휴양을 위해 쓰였고, 손가정의 농민들은 빈 땅을 개간해서 밭으로 일구어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땅의 질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김상익의 손자 계연이 정자 주위의 개간된 땅에 대하여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김계연은 자신들의 노비를 풀어 ‘자기’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손가정 사람들로부터 소작료를 걷기 시작했다. 김계연은 정자 주변의 농토를 개인 소유의 장원莊園으로 만들어 버렸다. 손가정 사람들은 억울했다. 그들은 손가정의 개간지나 황무지나 다 손씨들의 소유로만 알아서 능력껏 자유롭게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가계를 꾸려나갔던 것인데 하루아침에 성 안 고관대작의 자손이 들이닥쳐, 개간한 땅은 이미 자신이 신고했다면서 소유권을 주장하니 어찌 할 것인가. 손가정 사람들은 막무가내의 권력 앞에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왕은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 줄 유일한 권력이었다.
김계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다음은 김계연이 한성부에 아뢴 내용이다.
“저의 할아비 김상익이 터를 매입하여 정자를 세운 뒤에 주인이 있는 땅은 값을 주고 매입하고 노는 땅에 대해서는 입안을 발급받았습니다. 다만 저의 할아비가 새로 점유한 땅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노속奴屬이나 동민洞民을 막론하고 그들이 먹고살도록 맡겨 두고 토지세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손가孫哥 등이 정자 부근의 노속들과 부화뇌동하여 정자 앞뒤의 땅을 점차 개간하여 서로 매매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아에 정소呈訴하고 세금을 거
두었습니다.”
─ 『국역 일성록』 정조13년 9월 19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김상익은 정자를 지은 뒤로 정자 주위의 주인 없는 빈 땅을 자기 이름으로 양안(토지대장)에 등록하여 자신의 소유지임을 문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손가정 농민들은 정자 앞뒤의 땅을 예전에 해왔던 것처럼 여느 황무지를 개간하듯이 개간했다. 처음에 김상익은 손가정 사람들이 농사를 짓든 말든 상관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자 김계연이 오면서부터는 농민들에게 토지사용료를 내도록 강제했다. 예전처럼 빈 땅을 찾아 자유롭게 농사를 짓던 손가정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쪽에서는 문서에 근거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한 쪽에서는 관습에 근거한 경작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성부와 국왕 정조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었을까? 다음은 그 판결 내용이다.
“김가(김계연 가)의 토지 매득 문서는 성출하여 입안한 것이니 다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저 손가정 마을은 본래 손가가 여러 세대 동안 살고 나는 땅이어서 개간하여 땅을 부쳐먹은 지가 이미오래인데다 서로 땅을 사고팔고 하여 누차 그 주인이 갈리었습니다.비록 김가가 정자를 짓고 입안한 후에도 일찍이 한 번도 손가정 사람들에게 수세한 일이 없는데 금년에 처음으로 오직 한 장의 입안에 근거해 전에 없는 도세를 징수하여 거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본 마을 백성들은 비단 올해 가을에 실업하였을 뿐 아니라 토지마저 장차 영구히 세를 무는 땅이 되고 말았으니 이와 같이 원망을 칭하는 일이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입안 중인 토지는 민인들에게 돌려주어 전과 같이 지어먹도록 할 것이며 금년에 징수한 도세 역시 다시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김가가 값을 치르고 매득한 땅은 이미 주인이정해진 땅이므로 손가들이 이 땅도 섞어서 칭원稱寃하는 일은 매우부당하니 구별하여 김가에게 주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김계연이 자기가 매득한 땅 외에 돌연 백성의 땅을 침탈한 죄는 논하지 않을 수 없고, 손덕봉 등이 외람되게 작은 일로써 감히 이때 전하의 행차를 막고 소리치며 발악하여 천청天聽을 놀라게 했으니민습이 무엄하여 매우 비통하고 놀랍습니다. 김계연과 장두 손덕봉은 모두 유사로 하여금 법에 따라 엄히 처벌토록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해라”고 하였다.
─ 『승정원일기』 정조13년 9월 19일
문서상 소유권보다 동성 마을의 관습을 존중하는 판결이었다. 비록 장두 손덕봉은 국왕의 행차를 가로막은 죄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손가정 사람들은 김계연에게 냈던 토지사용료를 돌려받았고 앞으로도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분쟁이 종결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듬해(정조14, 1790년) 2월 손가정에 사는 손양택孫良澤이란 자의 아버지인 손의대孫義大가 김계연으로부터 끝내 땅을 돌려받지 못해 울분을 못이겨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손의대의 모친 또한 아들이 비명에 죽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입안 중인 토지를 다시 농민들에게 돌려주라는 작년 9월의 판결이 이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형조판서에게 보고 받은 국왕 정조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정조는 이런 일조차 즉시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송관訟官(송사를 맡은 벼슬아치)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며 형조판서를 엄히 꾸짖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자신에게 들려온다면 관계된 당상관들을 모두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하였다(『승정원일기』정조13년 9월 19일). 영민하고 강력했던 군주 정조다운 판결이었다. 결국 반 년 넘게 끌어 온 손가정 사람들과 강릉 김씨 가문 간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렇지만 한 모자母子의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다면 아마 싸움은 더 길어졌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옛 정자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한 우리 민족의 고유의 정서가 반영된 훌륭한 건축양식으로 평가 받는다. 동시에 우리 옛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고 시문을 주고받은 공간으로서의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산실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정자를 엄연히 지배 계층이 여가를 즐기기 위한 사치물이었다고 본다면 그 폐해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강릉 김씨 가문의 경우와 같이 농민들의 거주지나 농토 한 가운데 땅을 사들여 짓는 정자는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정부나 국가의 역할인 바,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는 정자의 소유자 김계연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한편 손가정 농민들의 오랜 관습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갈등을 조정했던 것이다.
본래 땅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땅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과잠시 놀다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공평하게 풀기란 쉽지않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땅에서 수익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외부인과 땅을 살림살이의 유일한 터전으로 알고 살아가는 원주민 사이의 대립은 어느 고장에서든 비일비재한 일이다. 어쩌면 오늘날 땅을 둘러싼 여러 갈등을 해소하는데, 조선시대 정조 연간 손가정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조정 과정이 참고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
김계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다음은 김계연이 한성부에 아뢴 내용이다.
“저의 할아비 김상익이 터를 매입하여 정자를 세운 뒤에 주인이 있는 땅은 값을 주고 매입하고 노는 땅에 대해서는 입안을 발급받았습니다. 다만 저의 할아비가 새로 점유한 땅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노속奴屬이나 동민洞民을 막론하고 그들이 먹고살도록 맡겨 두고 토지세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손가孫哥 등이 정자 부근의 노속들과 부화뇌동하여 정자 앞뒤의 땅을 점차 개간하여 서로 매매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아에 정소呈訴하고 세금을 거
두었습니다.”
─ 『국역 일성록』 정조13년 9월 19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김상익은 정자를 지은 뒤로 정자 주위의 주인 없는 빈 땅을 자기 이름으로 양안(토지대장)에 등록하여 자신의 소유지임을 문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손가정 농민들은 정자 앞뒤의 땅을 예전에 해왔던 것처럼 여느 황무지를 개간하듯이 개간했다. 처음에 김상익은 손가정 사람들이 농사를 짓든 말든 상관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자 김계연이 오면서부터는 농민들에게 토지사용료를 내도록 강제했다. 예전처럼 빈 땅을 찾아 자유롭게 농사를 짓던 손가정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쪽에서는 문서에 근거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한 쪽에서는 관습에 근거한 경작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성부와 국왕 정조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었을까? 다음은 그 판결 내용이다.
“김가(김계연 가)의 토지 매득 문서는 성출하여 입안한 것이니 다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저 손가정 마을은 본래 손가가 여러 세대 동안 살고 나는 땅이어서 개간하여 땅을 부쳐먹은 지가 이미오래인데다 서로 땅을 사고팔고 하여 누차 그 주인이 갈리었습니다.비록 김가가 정자를 짓고 입안한 후에도 일찍이 한 번도 손가정 사람들에게 수세한 일이 없는데 금년에 처음으로 오직 한 장의 입안에 근거해 전에 없는 도세를 징수하여 거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본 마을 백성들은 비단 올해 가을에 실업하였을 뿐 아니라 토지마저 장차 영구히 세를 무는 땅이 되고 말았으니 이와 같이 원망을 칭하는 일이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입안 중인 토지는 민인들에게 돌려주어 전과 같이 지어먹도록 할 것이며 금년에 징수한 도세 역시 다시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김가가 값을 치르고 매득한 땅은 이미 주인이정해진 땅이므로 손가들이 이 땅도 섞어서 칭원稱寃하는 일은 매우부당하니 구별하여 김가에게 주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김계연이 자기가 매득한 땅 외에 돌연 백성의 땅을 침탈한 죄는 논하지 않을 수 없고, 손덕봉 등이 외람되게 작은 일로써 감히 이때 전하의 행차를 막고 소리치며 발악하여 천청天聽을 놀라게 했으니민습이 무엄하여 매우 비통하고 놀랍습니다. 김계연과 장두 손덕봉은 모두 유사로 하여금 법에 따라 엄히 처벌토록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해라”고 하였다.
─ 『승정원일기』 정조13년 9월 19일
문서상 소유권보다 동성 마을의 관습을 존중하는 판결이었다. 비록 장두 손덕봉은 국왕의 행차를 가로막은 죄로 처벌을 받았겠지만, 손가정 사람들은 김계연에게 냈던 토지사용료를 돌려받았고 앞으로도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분쟁이 종결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듬해(정조14, 1790년) 2월 손가정에 사는 손양택孫良澤이란 자의 아버지인 손의대孫義大가 김계연으로부터 끝내 땅을 돌려받지 못해 울분을 못이겨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손의대의 모친 또한 아들이 비명에 죽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입안 중인 토지를 다시 농민들에게 돌려주라는 작년 9월의 판결이 이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형조판서에게 보고 받은 국왕 정조는 불같이 화를 내었다. 정조는 이런 일조차 즉시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송관訟官(송사를 맡은 벼슬아치)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며 형조판서를 엄히 꾸짖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자신에게 들려온다면 관계된 당상관들을 모두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하였다(『승정원일기』정조13년 9월 19일). 영민하고 강력했던 군주 정조다운 판결이었다. 결국 반 년 넘게 끌어 온 손가정 사람들과 강릉 김씨 가문 간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렇지만 한 모자母子의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다면 아마 싸움은 더 길어졌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옛 정자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한 우리 민족의 고유의 정서가 반영된 훌륭한 건축양식으로 평가 받는다. 동시에 우리 옛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고 시문을 주고받은 공간으로서의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산실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러나 정자를 엄연히 지배 계층이 여가를 즐기기 위한 사치물이었다고 본다면 그 폐해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강릉 김씨 가문의 경우와 같이 농민들의 거주지나 농토 한 가운데 땅을 사들여 짓는 정자는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적지 않은 마찰을 빚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정부나 국가의 역할인 바, 당시 국왕이었던 정조는 정자의 소유자 김계연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한편 손가정 농민들의 오랜 관습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갈등을 조정했던 것이다.
본래 땅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그 땅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과잠시 놀다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공평하게 풀기란 쉽지않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땅에서 수익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외부인과 땅을 살림살이의 유일한 터전으로 알고 살아가는 원주민 사이의 대립은 어느 고장에서든 비일비재한 일이다. 어쩌면 오늘날 땅을 둘러싼 여러 갈등을 해소하는데, 조선시대 정조 연간 손가정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 조정 과정이 참고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