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교수단지(성북구 아리랑로 19다길 일대)에 위치한 주택이다. 주변 아파트와 빌라들이 생기기 전에는 정원에 각종 나무와 꽃, 뒷산 비탈길이 나무숲으로 둘러싸여서 시골풍경 같다 하여 ‘시골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시골집의 안주인 송홍자씨는 1979년 결혼할 당시 현재 살고 있는 터를 구입하여 건물 두채를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지었던 당시에는 북쪽으로는 북한산, 서쪽으로는 정릉이 보였으나 현재는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차단되었다고 한다.
정릉 속의 시골 풍경, 시골집
27세 출산 당시 난산을 한 후 남들보다 건강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송홍자씨. 60대부터 운동을 시작하면서 헬스장을 다녔으나 겨울이면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고 정릉으로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다. 푸른 나무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을 챙기고 있는 송홍자씨의 집은 마을에서 ‘시골집’이라 불리고 있다. 주변 아파트와 빌라들이 생기기 전에는 정원에 각종 나무와 꽃, 뒷산 비탈길이 나무숲으로 둘러싸여서 시골풍경 같다 하여 ‘시골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시골집의 안주인 송홍자씨는 1979년에 교수단지에 터를 잡고 36년째 거주하고 있다. 결혼할 당시 신혼집으로 현재 살고 있는 터를 구입해 건물 두 채를 지었다. 집 앞 길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정원에서 마을 풍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서쪽으로는 정릉이 보였다. 현재는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풍경이 차단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 채는 송홍자씨 부부가 거주했고, 한 채는 남동생이 거주했다.
자녀들이 자랄 때는 아이들의 친구들을 데려와 거실 벽난로 앞에서 기타를 치며 놀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릉의 능 주변이 울타리가 없어 아이들은 능에 기어 올라가거나 능 안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자녀들이 자랄 때에는 아이들의 소리가 많이 들렸으나, 현재는 아이들이 많지 않아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시골집의 자녀들은 모두 출가한 상태이며, 식구가 줄자 내부계단을 헐고 외부로 계단을 만들어 2층은 원룸으로 세를 줬다. 시골집의 또 다른 이름은 ‘금낭화 뜨락’이다. 정원에 금낭화가 많아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외부계단과 정원이 어우러져 마치 시골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정릉이 아닌 “강남으로 갔으면 재산이 10억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녀들이 정릉을 떠나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지금도 홀로 시골집을 지키고 있다. 정릉에 살다 보니 “이제는 이사를 할 생각도 없다”고 말한다.
송홍자씨 구술
50, 60세까지도 별로 안하고 생활이 바쁘잖아 바쁘니까 이제 내가 93년도에 혼자 됐는데 애들 뒷바라지 해 주고 애기 낳으면 애기 다 보고. 그래서 60 넘고 나서는 애들 어느 정도 컸으니까 운동을 조금씩 시작을 했지. 헬스를 다니다가 헬스를 하면 구석에서 먼지를 많이 먹게 되더라고. 겨울 같은 경우는 닫아놓고 하잖아.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 정릉을 다니기 시작했지. 거기 들어가면 나 혼자서 마음이 너무 좋은 거야. 이 공기하고 이 나무 푸르른 거에 젊은 사람은 잘 몰라도 우리 같은 사람은 너무 좋은 거야. 그러니까 이 정릉에서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해. 여기서 사는 게 복 받은 거지. 근데 애들은 여기가 경제성이 없잖아.
그 당시에 내가 79년도에 여기로 이사 안 오고 강남으로 갔으면 재산이 10억이 됐을 거 아냐. 처음에 여기 이사 왔을 때는 진짜 시골집이라고 불렀어요. 집이 얼마 없었거든. 우리 집 앞에 여기 대주 짓기 전에 소나무 산이고 있으니까 계속 여기서 살면서 우리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 볼까 했는데 그냥 그걸 하기도 힘들더라구. 내가 뭐 알지도 못하고. 살다 보니까 지금은 여기 이사를 할 생각은 없고 애들은 애들 아파트 가서 살고, 교수단지에 산 지 36년이 됐어.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실 쯤에 우리가 여기 왔지. 박정희 대통령 79년도인가 그때 돌아가셨을 걸.
친정집이 운니동, 계동에서 살았어. 신혼집은 종로에서 살았지. 친정집이 종로 한옥인데 내가 중2 때 그 집이 아버지가 지은 집이에요.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셨거든. 그래서 한옥을 크게 지었어.
종로에서 친정아버지가 소유한 건물에 학생다방을 운영했어. 그때 70년도, 70년도에 학생다방을 해가지고 다방하면 우중충한 이미지인데 우리는 오렌지색에 베이지색에 해가지고 다방이라는 인식이 아니지. 그래가지고 학생들이 엄청 많이 왔어요. 지금 그 학생들이 지금 60이 넘었는데 서로 연락을 해요. 다방은 진실다방이라고 우리 양반이 이름지었어. 학생다방 같지 않은 이름이잖아. 음악다방이지 음악다방. DJ도 있고 화려하게 해놨기 때문에 의자도 오렌지색으로 해 놓고 하여튼 일단 획기적이지 뭐. 하여튼 사람 엄청 많았어. 그전에는 다방이라면 다 우중충하고 그랬는데, 학생다방 할 때는 이제는 음악 판 있잖아 판 DJ가 노래시키면 노래 써주면 틀어주고 그랬잖아. DJ가 얼마나 인기인데 별걸 다 해서 메모 보내고 먹을 것도 해서 들여보내고. DJ가 얼마나 인기인데 말도 잘하고 아주 그냥 제가 그때는 전축이 좋은 걸로 해야 되잖아. 음악도 쾅쾅 잘 나오게 좋은 걸로 사람 엄청 많았어. 토요일, 일요일 되면 자리가 없어가지고.
이후 광화문에서 ‘푸른언덕’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어. 촌스럽지?(하하하) 푸른언덕이라고 레스토랑이 또 잘 됐어. 그 앞에 현대건설이 있어가지고 지금은 저쪽으로 계동으로 옮겼지만 그 당시에는 거기가 완전 중심이지. 그래가지고 지금 손님이 더 많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그거 한 몇 년 하다가 목욕탕으로 바꿨지. 우리는 거기다가 VIP라고 1층 2층 3층까지 했거든 일단 크게 했지. 그래서 손님들이 그냥 내 친구들이 나보고 저녁에 가면 “돈 주우러 간다”고 …… 직장인들이 많아 광화문이니까 직장인들이 많았어.
그때 그걸 가지고 뭐라도 하나 샀으면 지금 이 꼴이 아닌데. 지금은 내가 돈 안 쓰는 방향으로 하는 거지.
-송홍자(여, 72세)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