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성북동의 연혁과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설치되어 붙은 이름이다. 한성부에 속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변화에 따라 관할 지역이 몇 번 바뀌었고, 해방 후 1949년 성북구 성북동으로 정해졌다. 성북동은 옛날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마을로 알려졌으며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의 거주지로도 유명하며, 1940년대 초에는 경성제국대학, 보성전문, 중동학교 등에 다니는 학생 및 교사, 방송사 직원 등이 거주하는 청년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의 거주지이기도 하였다.
좌우의 소용돌이, 그리고 상처
일제강점기 이래 성북동은 문인들의 이주로 유명하다. 아직 성북동이 고급 주택가의 이미지로 기억되기 보다는 호젓한, 문인의 품격과 꿩의 바다와 같은 풍경과 이미지로 기억되던 시기였다. 성북동 골짜기 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흐르던 이른바 ‘안감내安甘川’라는 천이 흐르는 시원함이 성북동의 정취를 돋우었다. 그런 곳에 해방 후의 여러 문인, 화가, 작가들이 자리를 틀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성북동은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 정갈한 사찰의 풍광과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기억되는 길상사는 한때 요정 대원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대원각은 백석의 ‘나타샤’ 김영한金英韓이 1951년 650만원의 거금을 주고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청암장’을 인수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길상사로부터 나타샤의 애한과 백석의 치기어린 사랑이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정화되는 이미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장면 하나가 잘리워져 나갔음을 간과하곤 한다. 김영한이 인수하기 전 청암장은 이봉재李鳳載가 요리집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이 요리집은 해방 공간에서 이런 저런 곡절 속에서도 제법 그 위세를 자랑했다. 특히 통일된 남북한 정부수립을 위해 내한해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인도대표 ‘싱’씨에 대한 환영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의 한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성북동이 바로 정부 수립 후 한국정치의 가능성을 내포했던 중도파의 희망과 아픔이 함께 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성북동, 조금 범위를 더 넓혀 성북구 전체에서 가장 유명했던 중도파 정치인을 꼽으라면 조소앙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의 일화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전 비사를 통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이후 두 번째였던 이 선거는 당대에 바람의 선거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국회 내 제 3세력이라고 불리웠던 중도파, 남북협상파들이 대대적으로 당선되었던 선거였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조소앙은 당대의 유력자이자 미 군정청 경무국장을 역임했던 조병옥의 갖은 선거 공작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당시 조소앙은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 쓴 게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 벽보와 삐라 때문에 30일 새벽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등, 갖은 고초 끝에 당선되었다. 조소앙을 필두로 한 이들 중도파들은 한국 정치에서 큰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에 상처를 크게 입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미아리에서의 초창기 전선이 무너지면서 서 울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옥이 찾아왔다. 인민군이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대통령도 없는 서울 하늘 아래 사람들은 발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한강철교는 너무 일찍 끊어졌고, 정부의 왜곡된 라디오 방송으로 인해 피난길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의 소용돌이는 아마도 그 후 성북동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소란의 와중의 모습은 일관되지 않다. 저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한국전쟁의 초입은 문화재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으로 기억된다. 전쟁 초입 인민군들은 남침 경로의 중앙에 있는 돈암동과 성북동에 진을 쳤다. 이어 서울이 함락된 이후에는 저 유명한 간송 전형필의 문화유산의 보고인 ‘보화각’이 그네들의 손에 들어갔다. 최순우 선생 등의 기지로 이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그러나 이 혼란의 시기에 김용준 등 혹자는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주로 많은 문인들과 화가들이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걸음걸음에는 아마도 이후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기치 못하게 납북된 인사들이 많았다. 오늘날 납북자의 전체적인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서울 시민들의 경우 2~4천명 사이로 납북자 수가 추정되고, 성북구의 경우 225명 정도가 납북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중에는 안재홍, 조소앙 선생, 역사학자 손진태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름 없는 청년단원, 여학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와 증언의 차이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성북동은 당시 이들 중요 인사들이 연금되어 있던 안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주로 인민군의 대남방송에 활용되었다가 8월 중순에서 9월 사이에 납북되었다. 그러나 많은 납북자들이 피신하는 도중 공습에 명을 달리하였고, 나머지도 전쟁 후 북에 남거나 소식만 간간히 들려오는 등 중도파들의 명맥은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쇠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중도파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다간 땅이 바로 여기 성북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도파의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던 조소앙은 이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지만, 1958년경 수상스럽게도 물에 빠져 그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좌우의 소용돌이, 그리고 상처
일제강점기 이래 성북동은 문인들의 이주로 유명하다. 아직 성북동이 고급 주택가의 이미지로 기억되기 보다는 호젓한, 문인의 품격과 꿩의 바다와 같은 풍경과 이미지로 기억되던 시기였다. 성북동 골짜기 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흐르던 이른바 ‘안감내安甘川’라는 천이 흐르는 시원함이 성북동의 정취를 돋우었다. 그런 곳에 해방 후의 여러 문인, 화가, 작가들이 자리를 틀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성북동은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오늘날 정갈한 사찰의 풍광과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기억되는 길상사는 한때 요정 대원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대원각은 백석의 ‘나타샤’ 김영한金英韓이 1951년 650만원의 거금을 주고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청암장’을 인수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길상사로부터 나타샤의 애한과 백석의 치기어린 사랑이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정화되는 이미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장면 하나가 잘리워져 나갔음을 간과하곤 한다. 김영한이 인수하기 전 청암장은 이봉재李鳳載가 요리집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이 요리집은 해방 공간에서 이런 저런 곡절 속에서도 제법 그 위세를 자랑했다. 특히 통일된 남북한 정부수립을 위해 내한해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인도대표 ‘싱’씨에 대한 환영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의 한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성북동이 바로 정부 수립 후 한국정치의 가능성을 내포했던 중도파의 희망과 아픔이 함께 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성북동, 조금 범위를 더 넓혀 성북구 전체에서 가장 유명했던 중도파 정치인을 꼽으라면 조소앙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의 일화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전 비사를 통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이후 두 번째였던 이 선거는 당대에 바람의 선거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국회 내 제 3세력이라고 불리웠던 중도파, 남북협상파들이 대대적으로 당선되었던 선거였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조소앙은 당대의 유력자이자 미 군정청 경무국장을 역임했던 조병옥의 갖은 선거 공작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당시 조소앙은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 쓴 게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 벽보와 삐라 때문에 30일 새벽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등, 갖은 고초 끝에 당선되었다. 조소앙을 필두로 한 이들 중도파들은 한국 정치에서 큰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에 상처를 크게 입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미아리에서의 초창기 전선이 무너지면서 서 울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옥이 찾아왔다. 인민군이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대통령도 없는 서울 하늘 아래 사람들은 발길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한강철교는 너무 일찍 끊어졌고, 정부의 왜곡된 라디오 방송으로 인해 피난길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른바 도강파와 잔류파의 소용돌이는 아마도 그 후 성북동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소란의 와중의 모습은 일관되지 않다. 저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한국전쟁의 초입은 문화재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으로 기억된다. 전쟁 초입 인민군들은 남침 경로의 중앙에 있는 돈암동과 성북동에 진을 쳤다. 이어 서울이 함락된 이후에는 저 유명한 간송 전형필의 문화유산의 보고인 ‘보화각’이 그네들의 손에 들어갔다. 최순우 선생 등의 기지로 이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그러나 이 혼란의 시기에 김용준 등 혹자는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주로 많은 문인들과 화가들이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걸음걸음에는 아마도 이후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기치 못하게 납북된 인사들이 많았다. 오늘날 납북자의 전체적인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서울 시민들의 경우 2~4천명 사이로 납북자 수가 추정되고, 성북구의 경우 225명 정도가 납북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중에는 안재홍, 조소앙 선생, 역사학자 손진태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름 없는 청년단원, 여학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와 증언의 차이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성북동은 당시 이들 중요 인사들이 연금되어 있던 안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주로 인민군의 대남방송에 활용되었다가 8월 중순에서 9월 사이에 납북되었다. 그러나 많은 납북자들이 피신하는 도중 공습에 명을 달리하였고, 나머지도 전쟁 후 북에 남거나 소식만 간간히 들려오는 등 중도파들의 명맥은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쇠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중도파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다간 땅이 바로 여기 성북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도파의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던 조소앙은 이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지만, 1958년경 수상스럽게도 물에 빠져 그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성북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한양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어영청 소속 북둔(北屯)]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성부에 속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변화에 따라 관할 지역이 몇 번 바뀌었다.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년), 경성부 성북정(1914년), 동대문구(1943년)에 속하다가 해방 후 1949년 성북구 성북동으로 정해졌다. 성북동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마을로 알려졌다. 조선 정조 때 지리지인 『한경지략(漢京識略)』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성북둔 주변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하였다.
‘성북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한양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어영청 소속 북둔(北屯)]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성부에 속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변화에 따라 관할 지역이 몇 번 바뀌었다.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년), 경성부 성북정(1914년), 동대문구(1943년)에 속하다가 해방 후 1949년 성북구 성북동으로 정해졌다. 성북동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마을로 알려졌다. 조선 정조 때 지리지인 『한경지략(漢京識略)』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성북둔 주변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북성北城 주맥主脈의 동북쪽에 빈 골짜기가 하나 있어 지면이 매우 평평하고 넓은데, 나무꾼들이 함부로 들어가 벌채하여 민둥산이 되어 나무가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일 수십 호의 인가人家를 두어 살게 한다면, 가히 도성都城을 수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박전薄田약간 경頃이 선잠단先蠶壇근처에 있는데, 군사軍士의 늠료稟料를 먹는 자로 하여금 그 땅에 살게 하되 그 밭을 경작하게 하고 그 세금을 감하여 주어 그들에게 생활을 정착하게 한다면, 가히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영조 105권, 41년(1765)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북성北城 주맥主脈의 동북쪽에 빈 골짜기가 하나 있어 지면이 매우 평평하고 넓은데, 나무꾼들이 함부로 들어가 벌채하여 민둥산이 되어 나무가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일 수십 호의 인가人家를 두어 살게 한다면, 가히 도성都城을 수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박전薄田약간 경頃이 선잠단先蠶壇근처에 있는데, 군사軍士의 늠료稟料를 먹는 자로 하여금 그 땅에 살게 하되 그 밭을 경작하게 하고 그 세금을 감하여 주어 그들에게 생활을 정착하게 한다면, 가히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는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영조 105권, 41년(1765)
2.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 성북동
- 시골의 경관을 띠고 있으면서도 경성부내와 통신이 비교적 편리
→ 독립운동가들의 은거, 피신 용이(의열단)
- 삼산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 자치조직 운영
→ 기존 마을 조직이나 학교를 기반으로 계몽, 사회운동 전개(서광훈)
- 인접 혜화동, 동숭동에 형성된 ‘학교촌’의 배후지 역할
→ 학생들끼리의 비밀 모임 장소 제공 가능성
2.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 성북동
- 시골의 경관을 띠고 있으면서도 경성부내와 통신이 비교적 편리
→ 독립운동가들의 은거, 피신 용이(의열단)
- 삼산학교를 중심으로 한 마을 자치조직 운영
→ 기존 마을 조직이나 학교를 기반으로 계몽, 사회운동 전개(서광훈)
- 인접 혜화동, 동숭동에 형성된 ‘학교촌’의 배후지 역할
→ 학생들끼리의 비밀 모임 장소 제공 가능성
6. 일제강점기 성북동에서의 조언비어(造言蜚語)
1940년대 초 성북동은 경성제국대학, 보성전문, 중동학교 등에 다니는 학생 및 교사, 방송사 직원 등이 거주하는 청년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의 거주지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고, 조국 해방의 길을 찾고자 하였다.
청년 지식인과 화이트칼라의 민족 지도자들은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송출된 단파방송을 듣고 전쟁 상황을 파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성북동과 삼청동의 은밀한 곳 등지에서 전쟁 상황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민족의 진로와 독립의 방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6. 일제강점기 성북동에서의 조언비어(造言蜚語)
1940년대 초 성북동은 경성제국대학, 보성전문, 중동학교 등에 다니는 학생 및 교사, 방송사 직원 등이 거주하는 청년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의 거주지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고, 조국 해방의 길을 찾고자 하였다.
청년 지식인과 화이트칼라의 민족 지도자들은 미국과 중국 등지에서 송출된 단파방송을 듣고 전쟁 상황을 파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성북동과 삼청동의 은밀한 곳 등지에서 전쟁 상황을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민족의 진로와 독립의 방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조선후기 영조 때 도성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성북둔(城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
○ 단순하게는 ‘한양도성의 북쪽’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 조선초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 조선후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 조선말기
-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1895)
○ 일제강점기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1914)
- 경성부 성북정(1936)
-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1943)
-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1944)
○ 8.15해방~현재
- 서울특별자유시 동대문구 성북동(1946)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949
○ 조선후기 영조 때 도성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성북둔(城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
○ 단순하게는 ‘한양도성의 북쪽’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 조선초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 조선후기
-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
○ 조선말기
-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소문외계 성북동(1895)
○ 일제강점기
-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성북동(1911)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1914)
- 경성부 성북정(1936)
-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1943)
- 경성부 동대문구 성북정(1944)
○ 8.15해방~현재
- 서울특별자유시 동대문구 성북동(1946)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