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후 수정] 성북구 솔샘로15다길 6-6(정릉동 716-172) 일대에 건설된 주택을 말한다. 영단주택은 조선주택영단(현 LH주택공사)에서 분양한 주택을 말하며, 자금 출처에 따라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 한다. 정릉1동에 지어진 재건주택은 주민들 사이에서 ‘영단주택’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 정릉1동 힐스테이트에서 우성아파트 사이에 위치하였다. 그 밖의 정릉천변에 지어진 재건주택은 당시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흙벽돌로 지었으며 연탄난방을 택했다. 정릉지역의 또 다른 영단주택인 부흥주택은 1957~1958년 사이에 정릉시장 서쪽 정든마을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시멘트 벽돌로 지어진 2층집으로 테라스가 갖추어져 있고, 한 건물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어 당시에는 획기적인 주거문화였다.
주소:02708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716-172 일대 (솔샘로15다길 6-6 일대)
비고:미아리 일대
1950년대 초, 전쟁이 끝나가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토박이 서울 사람,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지방 사람, 학업을 위해 상경한 학생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갔다. 미아리고개 아래에도 한 집 두 집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고, 길이뚫리고, 동네가 만들어졌다. 고개가 걸쳐 있는 개운산 등성이에도, 정릉천 가에도, 심지어 길음동 공동묘지 앞에도 집들이 들어섰다. 정부와 서울시도 미아리 일대의 넓은 토지를 사들여 ‘영단주택’이라고 이름붙인 주택단지를 건설하였다. 집과 집 사이 빈 땅은 호박밭으로 바뀌어갔고, 맑디 맑은 정릉천은 여자들의 빨래터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였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만 해도 미아리고개 아래 동네들은 반은 도시, 반은 시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속에서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말없이 보듬어주면서 굳센 의지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갔다.
1950년대 초, 전쟁이 끝나가면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토박이 서울 사람,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지방 사람, 학업을 위해 상경한 학생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갔다. 미아리고개 아래에도 한 집 두 집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고, 길이뚫리고, 동네가 만들어졌다. 고개가 걸쳐 있는 개운산 등성이에도, 정릉천 가에도, 심지어 길음동 공동묘지 앞에도 집들이 들어섰다. 정부와 서울시도 미아리 일대의 넓은 토지를 사들여 ‘영단주택’이라고 이름붙인 주택단지를 건설하였다. 집과 집 사이 빈 땅은 호박밭으로 바뀌어갔고, 맑디 맑은 정릉천은 여자들의 빨래터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였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만 해도 미아리고개 아래 동네들은 반은 도시, 반은 시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속에서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를 말없이 보듬어주면서 굳센 의지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나갔다.
정릉 주민들은 “정릉을 이야기할 때 영단주택을 빼고는 주택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정릉에서 영단주택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크다. 영단주택은 현재 LH 주택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에서 분양한 주택으로 재건주택, 부흥주택, 희망주택 등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붕괴된 현실과 절망을 다시 희망으로 바꾸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으리라. 영단주택은 자금출처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했다. 재건주택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이 원조하는 자재와 자금으로, 부흥주택은 당시 정부부처인 부흥부에서 발행한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희망주택은 대지와 공사비는 입주자가 부담하고 자재는 주택영단에서 배정하고 분양하는 주택이다.
재건주택은 성북구 안암동에 49채의 재건주택을 건축한 것을 시작으로 1954년에는 정릉동과 휘경동에 9평의 재건주택을 건설하였다. 정릉1동에 지어진 재건주택은 주민들 사이에서 ‘영단주택’으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 정릉1동 힐스테이트에서 우성아파트 사이에 위치하였다. 정릉천변에 지어진 재건주택은 당시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흙벽돌로 지었으며 연탄난방을 선택했다. 현관과 마루, 부엌, 침실이 건물 내부에 마련되어 있고, 바깥으로 출입해야 하지만 변소를 건물 내부에 둔 것은 당시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소설가 계용묵은 1954년 피난지에서 돌아와 1961년까지 약 7년을 정릉 재건주택에서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이규창 역시 1961년 정릉에서 터를 잡았던 곳이 바로 재건주택이었다.
재건주택이 지어졌던 자리에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주민들의 기억 속에 ‘영단주택(재건주택)’은 정릉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었다.
정릉지역의 또 다른 영단주택인 부흥주택은 1957~1958년 사이에 정릉시장 서쪽 정든마을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시멘트벽돌로 지어진 2층집으로 당시 부흥주택은 정부재원으로 지어지기는 했으나 융자금 이자가 상당히 높았다. 7~8회에 걸쳐 발행된 산업부흥국채를 재원으로 공급한 부흥주택은 당시 융자금 이자가 무려 11%에 이르렀고 원리금 상환기간은 고작 6년에 불과해 일반입주자들을 대상으로 한 주택분양은 매우 저조했다.
2층으로 지어진 부흥주택에는 테라스가 갖추어져 있고, 화장실에는 양변기가 설치, 욕실에는 커다란 쇠가마가 걸리는 등 한 건물 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주거문화였다.
1970년대에는 도시형한옥들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정릉2동과 3동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숭덕초등학교 대로 맞은 편, 경남아파트 아래 골목계단 양쪽으로 늘어선 한옥들은 흑벽 대신 시멘트벽에 타일로 꾸며진 것이 이색적이다. 한옥을 활용한 상업시설이 아닌 주거공간이 대부분이기에 실제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장소이다. 현재 이곳 근대한옥지역은 정릉에서도 보존이 잘 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정릉의 한옥들은 신규건축물들에게 조금씩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한옥이 있던 자리에는 빌라나 빌딩들이 하나 둘 자리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지어진 재건주택과 부흥주택, 1960년대 건축된 도시형한옥과 1970년대 이후 지어진 다세대주택에서 빌라, 정원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가 이어지는 교수단지와 삼덕마을의 주택들,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동방주택, 그리고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정릉동은 동네 전체가 ‘주택박물관’인 셈이다.
대한민국의 주거문화에서 변화상을 알고 싶다면 이곳, 정릉동의 마을들을 찾아보자. 정릉 마을을 걷다보면 마을마다 특색 있는 주택들과 마주할 수 있다.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다양한 주택들을 통해 시대별 특징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