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서 거주한 문인이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그해 4월 『동아일보』에 동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시 「가련아」로 등단했다. 1922년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고, 이듬해 5월 토월회 귀국공연을 위해 귀국했다. 1925년 카프(KAPF)’를 창립했다. 1934년 일제의 문화 운동 탄압 사건인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될 당시 형 김복진과 함께 성북동 175번지에 살고 있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애련모사」, 「붉은 쥐」, 「해조음」 등이 있으며, 조선일보 사회부장, 매일신보 사회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4년 국민총력 조선연맹에서 조직한 보도특별정신대의 강사로 파견된 것 외에도 다수의 친일좌담회에 참석하고 이와 관련된 다수의 글을 남겼다. 이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1925년 8월, 계급의식에 입각한 조직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22년 만들어진 사회주의 문학단체 염군사焰群社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피스큘라(PASKYULA)계가 합쳐져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성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송영, 김복진, 최승일, 심대섭, 조명희, 이기영, 박팔양, 김양, 김온 등이다.
(중략)
1934년에도 2월부터 8월까지 80여 명이 검거되면서 카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1931년 김남천, 임화, 김기진이 상호 협의 하에 경기도 경찰서에 해산계를 제출하며 소멸되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1925년 8월, 계급의식에 입각한 조직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22년 만들어진 사회주의 문학단체 염군사焰群社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피스큘라(PASKYULA)계가 합쳐져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성 당시 구성원은 박영희, 김기진,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송영, 김복진, 최승일, 심대섭, 조명희, 이기영, 박팔양, 김양, 김온 등이다.
(중략)
1934년에도 2월부터 8월까지 80여 명이 검거되면서 카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1931년 김남천, 임화, 김기진이 상호 협의 하에 경기도 경찰서에 해산계를 제출하며 소멸되었다.
○ 문학
김기진(金基鎭, 1903~1985)
·문학평론가·소설가, 조각가 김복진의 동생
·호 팔봉(八峰). 충북 청원(현 청주시) 출생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 활발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로 활동
·형 김복진과 함께 성북리 175번지 거주
※ 1934년 12월 13일 새벽 김복진, 김기진 외 수 명이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
·1989년 『김팔봉 문학전집』(전7권) 발간
·친일반민족행위자
○ 문학
김기진(金基鎭, 1903~1985)
·문학평론가·소설가, 조각가 김복진의 동생
·호 팔봉(八峰). 충북 청원(현 청주시) 출생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만들었으며, 영화사 등에서 활약하였고 문학평론가로서의 집필 활발
·조선문인부국회 상무이사 등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로 활동
·형 김복진과 함께 성북리 175번지 거주
※ 1934년 12월 13일 새벽 김복진, 김기진 외 수 명이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
·1989년 『김팔봉 문학전집』(전7권) 발간
·친일반민족행위자
본적: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
주소: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 성북동 175번지에서 검거
계열과 단체: 신건설사 사건
<활동 내용>
1934년 12월 13일 새벽 성북동 175번지에서 김복진, 김기진 외 수명을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4.12.14., 2면 8단, <경찰부돌연활동 성북동 일대 대수색 김기진 김복진 등 다수검거>
『일제감시대상카드』
본적: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
주소: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 성북동 175번지에서 검거
계열과 단체: 신건설사 사건
<활동 내용>
1934년 12월 13일 새벽 성북동 175번지에서 김복진, 김기진 외 수명을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4.12.14., 2면 8단, <경찰부돌연활동 성북동 일대 대수색 김기진 김복진 등 다수검거>
『일제감시대상카드』
정의
1903~1985. 시인·평론가.
개설
일제강점기에 형인 김복진과 함께 일본 릿쿄[立敎]대학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를 설립했다. 1923년 귀국 이후 문예단체 파스큐라 및 카프 창립에 참가해, 다수의 시와 수필 및 비평문을 발표했으며 『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일보』 등의 기자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기에는 다수의 친일 시와 글들을 남겼으며, 해방 이후 '애지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했으며, 다수의 수필집과 역사소설을 남겼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3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 이후 충청북도 황간(黃澗)·제천·영동(永同)군수를 지낸 김홍규(金鴻圭)가 부친이고,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또는 金福鎭)은 형이다. 1913년 부친의 영동군수 부임으로 영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6년 졸업했다. 그해 4월 형 김복진과 함께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 1920년 초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해 4월 『동아일보』에 동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시 「가련아(可憐兒)」로 등단했다. 1921년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예과에 입학했고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2년 5월 형인 김복진·박승희(朴勝喜)·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재동경조선인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주도적으로 결성했고, 이듬해 5월 토월회 귀국공연을 위해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귀국했다.
1923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개벽(開闢)』 1923.7)이라는 비평문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정식 등단했고, 9월 문학동인지 『백조(白潮)』의 창립 동인으로 참가했다. 1924년 새로운 경향의 문학을 제창하며 문예단체 파스큐라(PASKYULA)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고, 10월부터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 기자로 이직했으며, 8월 문예단체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가 합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발족할 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시대일보』의 폐간과 『개벽』의 무기정간으로 『조선지광(朝鮮之光)』으로 발표 지면을 옮겼고, 1926년부터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취직했다. 1927년 영화연구모임 찬영회(讚映會)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처가가 있는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 공장을 설립했다가 실패했다. 1930년 『중외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다가, 8월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정어리 공장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장편소설 「해조음」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자술서를 쓰고 1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전주 사건 또는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으로 형 김복진과 함께 전주경찰부에서 조사를 받고 7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8년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으로 취직, 1940년까지 근무했다. 1938년 9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호남과 남해안 시찰에 동행하며 기사 '남총독 수행기'를 썼다.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로써 설립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일제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읊은 시 「아세아의 피」(『매일신보』 1941.12.13·16)를 발표했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촉탁을 지내면서 「조선영화의 새출발[朝鮮映畵の新出發)」(『춘추(春秋)』 1942.8)라는 글을 통해 조선영화가 추구해야 될 안건으로 '국어(일본어)의 보급, 내선일체 철저, 직역봉공(職域奉公)' 등을 거론했고, 일본군의 필리핀 마닐라 점령을 축하하는 「대동아전쟁송」(『조광(朝光)』 1942.2)을 썼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조선문인협회를 포함한 4개 단체가 통합·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의 평론수필부회 평의원, 이듬해 상무이사가 되었다. 또한 1943년 8월에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비롯하여 징병과 학병을 선전·선동하는 「나도 가겠습니다」(『매일신보』 1943.11.6)·「가라! 군기(軍旗)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매일신보』 1943.11.6) 등의 시를 썼다.
1944년 2월 태평양전쟁 3주년 기념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조직한 보도특별정신대(報道特別挺身隊)의 강사로 강원도 지역에, 5월에는 증산위문 파견행사의 일환으로 함경북도 길주의 북선제지(北鮮製紙)공장으로 파견되었다. 6월에는 조선인문인보국회 주최 결전태세즉응재선문학자총궐기대회(決戰態勢卽應在鮮文學者總蹶起大會) 준비위원을 맡았고, 역시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8월 17일 부민관(府民館)에서 열린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미영 격파와 아시아의 해방, 전력의 급속 증강, 반도 문화인의 사명'을 강조한 「문화인에 격(檄)함」(『신시대(新時代)』 1944.9)이라는 강연을 했다. 또한 11월에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개최된 제3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 7월 대일본흥아회(大日本興亞會) 조선지부 총무위원 등을 맡았다. 이외에도 다수의 친일좌담회에 참석했고 다수의 관련 글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34년 김복진과 함께 설립했다가 실패한 출판사 애지사(愛智社)를 재설립·운영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7월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닷새 뒤에 다시 살아났고, 이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해 1951년 「나는 살아 있다」라는 글을 썼다. 1951년 5월 대구로 피난,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했고 이듬해 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며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3년까지 주로 '전선문학'에 관한 글을 썼다. 1954년 「나의 토월회 시대」 등과 같은 수필류와 문단 관계 회고류의 글을 썼고, 역사소설류의 글인 『통일천하』를 1955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같은 역사소설류의 글들을 썼다.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를 비판했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을거쳐, 1966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 1967년 소아마비특수아동보육협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등을 비롯하여 한국펜클럽·한국문화협회 고문, 세계복지연맹한국본부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85년 5월 8일 사망했다. 1989년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이 발간되었다.
상훈과 추모
금성화랑무공훈장(1952),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8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