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996년 겨울호에 발표된 중편소설로, 길음동의 골목 골목이 전형적인 산동네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막 재개발이 시작되어 산동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 모습도 확인된다. 주인공 '재덕'은 학보사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현경'과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빵집을 찾아가 할아버지의 과거를 취재한다. 그 과정에서 '재덕'은 자신이 살아왔던 과정을 회상하며, 가정사라는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 내가 함께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기억을 매개로 얽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있다.
높다란 철책을 두른 안쪽에 위장용 얼룩 무늬 칠을 한 콘크리트 물탱크 밑 한길이 바로 종점 차부였다. 방금 오르막길을 헐떡이며 기어 오른 낡은 마을버스가 차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려놓느라 앞으로 밀고 뒤로 빼고 하며 일그러진 배기통으로 시커먼 매연을 토해냈다. 현경은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돌산이 병풍처럼 막아서 있었다. 그 절벽 아래 원래는 채석장 터였던 곳에는 돌산 정상과 이마를 맞대어 있는 고층 아파트 세 채가 들어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폐타이어가 줄줄이 쌓여 있는 초등학교 담벼락을 에둘러 후문 쪽으로 구불구불 길이 뻗어 있었고 뒤쪽으로는 반대편 산동네로 가파르게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어귀가 보였다.
학생운동에 투신한 ‘재덕‘이 극적으로 풀려난 후, ‘현경‘은 ‘재덕‘에게 그의 할아버지 취재를 제의하고, 둘은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의 빵집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 할아버지와 ‘재덕‘의 기억이 어떠한 모습인지가 확인된다. 이 장면은 ‘재덕‘과 ‘현경‘이 버스에서 내린 후 주변 경관을 묘사한 것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버스 종점과 채석장 터, 고층 아파트 등은 현재의 정릉천과 미아리고개 일대의 지역인 것으로 추측된다.
재덕은 빵집 뒤 돌산 쪽으로 오르는 짧은 가풀막길을 올랐다. 시야가 툭 트인 길가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삼양동이라고 불리는 산자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무너진 집들이 몇 채 눈에 띄었다. 재개발 지역인 모양이었다. 재덕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재개발 사업이 이뤄지는 바로 옆 구와 경계선을 이루는 한길 가에 있는 할아버지의 빵집도 어쩌면 일이년 사이에 철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지금 할아버지가 근근히 손에 쥔 자금력으로 얻 딴 데다 이런 빵집을 차릴 수 있을까? 아니 그만한 근력이 앞으로 얼마나 갈 것인가?
‘현경‘과 함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던 ‘재덕‘은 잠시 그곳을 빠져나와 집 뒤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자신이 나눈 대화와 자신의 과거 행적들을 회상한다. 이 장면은 언덕에 오른 ‘재덕‘이 언덕 아래에 있는 삼양동을 바라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삼양동 산자락이 내려다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작품 속 공간 배경이 미아리고개 또는 길음동 재개발 지역 인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재덕은 손가락 사이에 잡히는 대로 굵은 흙알갱이를 몇 알 움켜쥐고 허공중에 뿌렸다. 길바닥이 아니었더라면 왠지 드러눕고 싶었다. 발치 밑은 사방공사를 해놓은 위로 심은 나무들이 어른 키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곳은 루핑(검은 기름 종이)으로 지붕을 인 낮은 블록벽 집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들도 고개를 숙여야 이마를 찧지 않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빈민촌 중간에 모래자루를 매달아놓은 터가 있었다. 그 터 옆에는 이파리가 무성하게 오른 무밭이 있었다. 오후부터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고무줄놀이나 치기 장난을 했으며 일부는 제법 누렇게 바랜 도복을 갖춰 입고 기합 소리를 지르며 태권도 발차기 연습을 하였다. 가끔 교련복을 입은 형들이 올라와 아이들의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물론 권투 연습도 이뤄졌다. 학교 급식 빵처럼 검고 두터운 권투 장갑을 낀 채 둘씩 맞붙기도 했다.
할아버지와의 취재 중 잠시 집 뒤 언덕에 오른 ‘재덕‘은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과 작은아버지와의 일화를 회상한다. 그리고는 이곳을 찾아온 ‘현경‘과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간다. 이 장면은 어린 시절의 ‘재덕‘이 ‘챔피언‘과의 권투 시합을 하기 전 당시 이곳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다. ‘루핑으로 지붕을 인 낮은 블록집 벽‘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정릉천 일대와 산기슭에 있었던 빈민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 살배기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풀빵 기계 앞에서 찍은 사진 밑에서 어머니와 가발공장 사장은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재덕은 오줌을 누겠다며 빠져나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로 올라왔었고 아래 빈민촌을 내려보다 귀밑 뺨이 발그레 상기된 채 비탈을 타고 그 마당가로 다가섰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집에 ‘재덕‘의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재혼을 위해 인사를 오게 된다. 이후 ‘재덕‘은 ‘챔피언‘과의 권투 시합을 벌이게 된다. 이 장면은 재혼 인사 중인 집에서 잠시 나온 재덕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사전 설명이다. 빈민촌이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보아, 현재 ‘재덕‘이 있는 공간과 그 빈민촌은 미아리고개와 정릉천 일대에 있었던 판자집들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풍근씨는 부득부득 배웅을 하겠다고 나섰다. 네 사람은 마을버스에 시동이 걸리길 기다리며 나란히 서서 잔모래 같은 불빛으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다보았다.
“재덕아!” “예.” “재덕아!” “예, 할아버지!” “저 불빛들 보이지?” “예.”
“저 불빛들이 이렇게 멀리서 보면 가물가물한 게 불면 곧 꺼질 것 같지만 그 둘레에 서너 명의 식구들이 곤한 몸으로 모여앉아 힘겹게 빚어내는 것이라는 생각 안 해봤니? 저 혼자 고립된 불빛들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단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럼 불빛과 불빛 사이는 모두 길이겠네요 할아버지.”
“응? 그렇지 허허. 이럴 땐 호랭이가 물어갈 만큼 영특도 허지. 아무렴 끊어진 길이란 없지, 없어.”
‘재덕‘과 ‘현경‘의 취재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이 둘을 배웅하러 집 인근 버스 기점이자 종점까지 나간다. 둘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나누고 버스는 길을 떠난다. 이 장면은 할아버지와 ‘재덕‘의 작별 인사이다. 인사 속 ‘저 불빛‘들은 할아버지의 집 뒤편 언덕에서도 바라보이는 정릉천 일대의 판자촌에서 나오는 불빛이다. 당시 정릉천 일대에는 이 장면에서 묘사된 ‘불빛‘들이 많이 보였던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