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 1909년 04월 24일 - 1990년 06월 07일
- 문인 · 인물 · 개인 · 정치인
- 시인이다.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4월 북간도 용정(龍井)에 위치한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에 교사로 재직했다. 같은 해 12월 잡지 『동광(東光)』에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을 발표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사였던 안호상과 혼인하여 성북천변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35년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월간 문예지 『문예』를 창간하였고, 이후 예술원회원, 펜클럽 한국위원장, 8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논개』, 『시몬은 누구인가』, 『렌의 애가』 등이 있다. 모윤숙은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와 국민의용대 등에서 활약하였고, 학도병출정을 고무하는 글을 썼다. 이상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 시대:일제강점기
- 시기:1909년 04월 24일 - 1990년 06월 07일
- 주소:서울특별시 성북구
- 비고:성북천변에 거주함
- ·성북천변 모윤숙의 집(박화성 회고담) 동글납작한 얼굴에 안경을 쓰고 시종 웃음을 띤 겸손한 자세의 그 청년을 춘원은 우리에게 독일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어제 귀국한 안호상씨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는 굵지 않은 음성으로 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답게 세련된 인사를 치른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주로 춘원과 주고받으며 식사와 환담을 끝내고 돌아갈 때는 안박사와 모양이 동반하여 무슨 음악회인가를 간다고 하였다. 이날밤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들 사이에는 우정과 애정이 급하게 진전되었던 모양으로 끝내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춘원선생이 중매한 셈이 된 것 같아 훗날 내가 그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선생님께서 그렇게 되길 희망하시구 소개하셨던가요?』『누가 저희들더러 결혼하라구만나게 해줬나? 그냥 알구 지내는게 좋을거 같아서 소개한거지.』두덜대는 것처럼 그런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작가들에겐 참 솔직하고 순진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모윤숙은 성북동 천로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집에 신접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은 몇사람을 저녁만찬에 초대하였다. 팔봉이 그 집을 알고 있어서 그와 동행하였더니 안 박사가 새신랑답게 한복차림을 하고 주인노릇을 하느라고 상냥한 웃음으로 대청에서 손님을 맞아들이고 주부인 모여사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뛰쳐나와 그의 독특한 응석조의 어투와 쉰듯한(요새말로는 「허스키」) 음성으로 기름묻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아이 형님 어서 오세요. 나 이젠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우』하는데 어찌된 일일까, 결혼 후에 처음 만나는 감회 탓일까,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던 기억이 지금도 새로운 것이다. 방안에는 개벽사의 사장인 청오 차상찬씨와 이태준씨가 아랫목에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하였고 맨나중에 상허 이태준보다 훨씬 다듬어진 미남이 들어왔는데 그를 심훈씨라고 하였다.상허는 『오몽녀』때문에 성명도 생소하지 않았고 『천사의 분노』『실락원의 얘기』 『구원의 여인상』등의 소설에서 그의 탁월한 재능에 호감이 갔을뿐더러 어떤 기회에서인지 이미 지면이 되어 있었다. 차씨도 두어번인가 만난 적이 있는 숙면이지만 심씨만이 초대면이어서 누군가의 소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심씨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안경테를 한번 만지더니 이내 방바닥에 두손을 집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어 말했다. 『나 심대섭입니다. 글로는 숙면인데 처음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나는 얼떨떨해서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답례하는데 누군가가 심씨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아 덮어놓고 자천을 하다니. 그 버릇 여전하군.』 『척 보면 몰라서 덮어놓고야? 자네들처럼 둔감한 줄 아나? 안 그래요?』심씨는 내게 동의를 구하며, 처음부터 익살을 떨었고 남의 말끝마다에서 꼬리와 티를 잡아 묘한 말을 만들어내면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려서 시종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기만 하였다. 당시에 심씨는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이니 『불사조』니를 심대섭이라는 본명으로 발표하였으나 1935년엔가 「동아일보」에 당선소설 『상록수』가 연재되면서떨쳤던 것이다.어쨌거나 그날 밤의 향연은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모윤숙은 시만 잘 쓰는게 아니라 음식 만드는 솜씨까지가 훌륭하여서 모든 게 겸비한 여성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 무렵 서해는 조운의 누이 분려와 (1927년쯤결혼)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인 성해 이탄감씨집 사랑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매일신보」의 기자인 서해는 내가 갔을때에도 병석에 있었다. 파란만장의 그의 일생이나마 길지 않을 듯 싶어 비참해지는 심경으로 있는 내게 성해는 「매일신보」에 집필을 강권하였다. 매월 8원씩 주겠다고 역설(그때 딴신문은 2원)하는 것을 내가 끝내 거절하니까『후생이 가외로군』하고 비꼬았으나 총독부의 기관지임을 꺼려 훗날까지 기고하지 않는 지조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중앙일보』 1977. 12. 26.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8-159쪽
- ·성북천변 모윤숙의 집(박화성 회고담) 동글납작한 얼굴에 안경을 쓰고 시종 웃음을 띤 겸손한 자세의 그 청년을 춘원은 우리에게 독일에서 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어제 귀국한 안호상씨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는 굵지 않은 음성으로 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답게 세련된 인사를 치른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주로 춘원과 주고받으며 식사와 환담을 끝내고 돌아갈 때는 안박사와 모양이 동반하여 무슨 음악회인가를 간다고 하였다. 이날밤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들 사이에는 우정과 애정이 급하게 진전되었던 모양으로 끝내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던 것인데, 그렇다면 춘원선생이 중매한 셈이 된 것 같아 훗날 내가 그에게 물어본 일이 있다.『선생님께서 그렇게 되길 희망하시구 소개하셨던가요?』『누가 저희들더러 결혼하라구만나게 해줬나? 그냥 알구 지내는게 좋을거 같아서 소개한거지.』두덜대는 것처럼 그런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작가들에겐 참 솔직하고 순진한 일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모윤숙은 성북동 천로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집에 신접살림을 차려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은 몇사람을 저녁만찬에 초대하였다. 팔봉이 그 집을 알고 있어서 그와 동행하였더니 안 박사가 새신랑답게 한복차림을 하고 주인노릇을 하느라고 상냥한 웃음으로 대청에서 손님을 맞아들이고 주부인 모여사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뛰쳐나와 그의 독특한 응석조의 어투와 쉰듯한(요새말로는 「허스키」) 음성으로 기름묻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아이 형님 어서 오세요. 나 이젠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우』하는데 어찌된 일일까, 결혼 후에 처음 만나는 감회 탓일까,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던 기억이 지금도 새로운 것이다. 방안에는 개벽사의 사장인 청오 차상찬씨와 이태준씨가 아랫목에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하였고 맨나중에 상허 이태준보다 훨씬 다듬어진 미남이 들어왔는데 그를 심훈씨라고 하였다.상허는 『오몽녀』때문에 성명도 생소하지 않았고 『천사의 분노』『실락원의 얘기』 『구원의 여인상』등의 소설에서 그의 탁월한 재능에 호감이 갔을뿐더러 어떤 기회에서인지 이미 지면이 되어 있었다. 차씨도 두어번인가 만난 적이 있는 숙면이지만 심씨만이 초대면이어서 누군가의 소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심씨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안경테를 한번 만지더니 이내 방바닥에 두손을 집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쳐다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어 말했다. 『나 심대섭입니다. 글로는 숙면인데 처음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나는 얼떨떨해서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답례하는데 누군가가 심씨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아 덮어놓고 자천을 하다니. 그 버릇 여전하군.』 『척 보면 몰라서 덮어놓고야? 자네들처럼 둔감한 줄 아나? 안 그래요?』심씨는 내게 동의를 구하며, 처음부터 익살을 떨었고 남의 말끝마다에서 꼬리와 티를 잡아 묘한 말을 만들어내면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려서 시종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기만 하였다. 당시에 심씨는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이니 『불사조』니를 심대섭이라는 본명으로 발표하였으나 1935년엔가 「동아일보」에 당선소설 『상록수』가 연재되면서떨쳤던 것이다.어쨌거나 그날 밤의 향연은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데, 모윤숙은 시만 잘 쓰는게 아니라 음식 만드는 솜씨까지가 훌륭하여서 모든 게 겸비한 여성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 무렵 서해는 조운의 누이 분려와 (1927년쯤결혼)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인 성해 이탄감씨집 사랑채에서 살고 있었는데 「매일신보」의 기자인 서해는 내가 갔을때에도 병석에 있었다. 파란만장의 그의 일생이나마 길지 않을 듯 싶어 비참해지는 심경으로 있는 내게 성해는 「매일신보」에 집필을 강권하였다. 매월 8원씩 주겠다고 역설(그때 딴신문은 2원)하는 것을 내가 끝내 거절하니까『후생이 가외로군』하고 비꼬았으나 총독부의 기관지임을 꺼려 훗날까지 기고하지 않는 지조만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중앙일보』 1977. 12. 26.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8-159쪽
- 생애 및 활동사항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永生普通學校), 1927년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1931년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4월 북간도 용정(龍井)에 위치한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에 교사로 재직했다. 같은 해 12월 잡지 『동광(東光)』에 시「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을 발표했다. 1932년 5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1933년 10월 조선창문사(朝鮮彰文社)에서 첫 시집 『빛나는 지역(地域)』을 출간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安浩相)과 혼인했다. 1934년 12월부터 1938년 3월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을 지냈고, 1935년 경성중앙방송국에 취직했다. 같은 해 2월부터 12월까지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청구문화사에서 산문과 시의 중간 형식인 『렌의 애가(哀歌)』를 출간했으며, 1938년 1월부터 4월까지 『삼천리문학』에서 근무했다.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문예경연대회에서 시를 낭독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했다.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1941년 1월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 5월 『매일신보』에 시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채권가두유격대’를 꾸려 ‘애국채권’을 팔 때 종로대원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부 발기인 겸 산하 부인대의 간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사업부 부원을 맡았고,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군복 수리 근로와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이 주최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 연사,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 12월 ‘대동아전(大東亞戰)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 참여했다. 1943년 3월과 8월 작사한 군국 가요 「군국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희망」이 방송되었고, 8월 경성부와 대일본부인회 경성지부가 공동 개최한 부인계발강연회에 ‘시국에 처한 부인의 각오’란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11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를 발표하고,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 선동하기 위해 조직한 전위여성격려대의 강사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의용대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시집 『옥비녀』를 출간했고,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49년 월간 문예지 『문예(藝術)』를 창간했으며, 1950년 5월 한양 여성클럽 회장, 12월 대한여자청년단총본부 단장을 맡았다. 1951년 4월부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했으며, 1954년 9월 국제펜클럽 본부 부위원장, 1955년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1955년 5월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을 맡았다. 1959년 일문서관에서 시집 『정경(情景)』과 소설집 『그 아내의 수기』를 출간했다.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으며, 수필집 『포도원』을 발간했고,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 1962년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으며, 1963년 7월 예술원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했다. 1969년 여류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 시집 『풍토』와 수필집 『밀물 썰물』을 발간하고, 국민훈장 모란장(牡丹章)을 받았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1973년 『호반의 목소리』를 출간하고, 한국현대시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77년 5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황룡사 9층 석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82년 『모윤숙 전집』, 1986년 『영운 모윤숙 문학전집』이 간행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90년 6월 7일 사망했으며, 다음 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1959년 시집 『정경(情景)』, 1964년 『구름의 연가(戀歌)』, 1970년 『풍토(0風土)』 등이 있고, 1974년 서사 시집 『논개(論介)』, 1953년 수필집 『내가 본 세상』, 1960년 『포도원』이 있다. 이밖에 1974년 『모윤숙 시 전집』과 1982년 『모윤숙 전집』, 1987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등이 출판되었다. 모윤숙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90∼3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모윤숙
- 작성자:오진아
- 작성일: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