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다. 1925년 「추석전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하였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백화」(1932)는 첫 장편 연재소설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상을 작품 속에 그려냈다. 1958년 정릉동 130-1번지에 ㄷ자 구조인 스무 평 남짓 되는 한옥을 마련하였다. 1963년 하월곡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정릉집은 고향 목포 출신 예술인들과 문단 후배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작품으로는 「백화」,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봄 안개」(1946) 등이 있다.
목포에서 태어난 박화성은 여섯 살 때 들어간 학교에서 월반을 거듭해 동년배를 가르칠 만큼 총명하였다. 어린 시절 『숙영낭자전』, 『유충렬전』 같은 고전소설을 외워 이야기해 줄 정도로 문학에 관심 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한글을 배우자마자 소설 읽기에 빠져 지냈다. 다른 집에서 책을 빌려다 읽고서도 모자라 집에 있는 책을 몇 번씩 읽곤 했다.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열다섯 살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후 천안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영광중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때 시인 조운을 만나 문학 공부를 하며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시 짓는 법을 배우고, 습작을 보이며 필력을 키워나갔다. 조운이 박화성을 문학으로 이끈 사람이라면, 소설가 이광수는 문단 활동의 지원자였다. 추석 전날 밤 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을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한 『추석전야』를 조운이 이광수에게 보냈고, 이광수가 이를 《조선문단》에 추천하여 1925년 문단에 정식 등단한다.
교원들의 거의가 문학애호가이며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시인 조 운씨가 있는 환경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문학도가 되어갔다. 한 번은 학교 뜰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 매어 놓은 그네의 노래를 청하기에 4줄 2절의 노래를 지어 보였더니 선생들과 운씨가 대단히 칭찬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남몰래 노래와 글을 써 모았던 4권의 노트를 운씨에게 보여 여러 가지의 평을 듣고 시 짓는 법을 배웠다.
- 박화성, 「1923년 9월 1일」-
스물두 살이란 나이에 등단까지 하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공부에 대한 열의로 모교에 다시 편입하여 어린 후배들과 수업을 들었다. 학제가 바뀌며 대학을 가려면 고등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녀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졸업 후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합격하고,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드디어 유학을 간다. 유학 중에 구상한 소설 『백화』는 이광수의 추천으로 1932년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여류 문인이 쓴 첫 장편연재소설이자 박화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백화』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남성들에게 억압받고, 사회의 불합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백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름다운 기생인 백화의 사랑 이야기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었다.
박화성은 평생 글을 쓰는 동안 정해진 원고량 보다 두 배 가까이를 쓸 정도로 작품마다 공을 들여 완성했다. 『백화』는 네 번이나 고쳐 쓰다가 펜을 쥔 손에 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원고지에 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듭 쓰다보면 원고지 위는 글씨로 가득차기 마련이었다. 고심하여 다시 쓴 문장을 새 종이에 깨끗이 쓴 뒤 오려서 고칠 문장 위에 붙이거나 틀린 곳을 칼로 긁어 지우고 다시 써나갔다. 원고를 받는 편집자에겐 고마운 일이지만 작가로서는 고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온 힘을 다 해 쓴 자신의 글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이 과정까지도 박화성에게는 글쓰기의 일부였다.
또한 등장인물의 말투를 신문사에서 표준어로 바꾸는 것이 걱정되어 원고를 보내며 특정한 표현을 그대로 실어달라고 따로 당부 할 정도로 꼼꼼하였다. 신문에 연재한 「고개를 넘으면」을 쓸 때는 대학원생인 등 장인물들의 생활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며 법학, 공학 같은 각 전공 강의까지 들어가며 글을 썼다. 제목과 인물, 관계도, 기획 진행도를 다 짜서 갖추고, 문장이 머리에 떠오른 뒤에야 펜을 드는 철두철미한 글쓰기였다. 바닥에 며칠이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작품구상을 하는 습관 때문에 집필하는 방 천장 색과 모양은 늘 밝고 반듯하게 마감해놓았다. 여러 준비를 마치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물이 흐르듯 20~30장을 써나갔는데, 새벽부터 아침까지가 가장 집중해서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붓대는 정직해야 한다. 내 삶의 전모가 나타나 있는 생활기록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재주껏 성의껏 쓰면 되는 것이다.
- 박화성, 『순간과 영원 사이』-
점차 문화예술인과 교류가 넓어지며 지인들이 관계된 여러 지면에 글이 실렸다. 1930년대는 대표작인 『백화』외에 단편 『홍수전후』, 장편연재소설 『북국의 여명』을 포함해 소설, 희곡, 동화 등 25편을 발표하였다. 박화성은 경주, 부여, 강서고분 등지로 답사를 다니며 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하였다. 유적지만 보는 답사가 아니라 농촌이나 영세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소설 속에 그려냈다. 글을 통해 착취당하며 가난하게 사는 이들을 대변하고, 참담한 사회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어디에선가 내게 대한 기록을 보니까 1926년부터 1930년까지는 공백기간이라고 했는데, 나는 혼자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공백기라고 하는 그 기간에 나는 눈을 버리며 잠자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워 학과를 전공하면서도 틈틈이 전부터 품고 있던 내 소설의 소재를 살려 장편으로 이룩하려는 큰 욕망에서 피땀을 흘리며 초고를 작성했다.
- 박화성, 「나의 교우록」-
글을 쓰는 한편 아이를 낳아 키우며 집을 가꾸고 가정을 이뤄나갔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 덕분에 꽃동산이라고 할 만큼 꽃과 나무가 많은 집에서 자라서인지 어려운 시절 작은 집을 옮겨 다니며 살 때도 자투리 공간에 늘 꽃을 가꿔 집 안 분위기를 돋우었다. 동네 사람들은 박화성의 집을 일컬어 ‘꽃재(꽃 화花, 성 성城이란 이름에서 따온 말)’라고 할 정도였다.
어머니이자 아내로 가정을 꾸리면서도 시간을 쪼개 글을 썼다. 수입이 변변치 않던 때에도 글 쓸 시간을 마련하려고 아이 둘을 유치원에 보내기도 했다. 박화성에게 글쓰기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횡포로 국어를 쓰지 못하게 되자 집필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해방 때까지 글을 쓰지 않았다.
1950년대에 들어 목포와 서울을 오갈 일이 많아졌고,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에도 집이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산 후암동에 살다가 종로로 이사하여 사간동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후 남편 사업이 기울며 팔판동, 가회동, 권농동, 인의동(원남동)으로 한 곳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전셋집을 전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원고료가 유일한 수입이었고, 「고개를 넘으면」, 「 사랑」,「 벼랑에 피는 꽃」까지 잇달아 신문소설을 연재하며 몸도 약해졌다. 서울에서 전셋집을 옮겨 다닌 4년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1958년 6월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한 「내일의 태양」이 60회를 넘겼을 때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영화사에 준 돈을 밑천으로 정릉동에 집을 샀다. 아들 셋의 학비를 부담하고, 병석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일군 집이었다.
아리랑고개와 미도극장 중간쯤에 있던 집(정릉동 130-1번지)은‘ㄷ’자로 된 스무 평 정도의 한옥이었다. 방 다섯 개는 박화성 부부와 아들 삼형제가 나누어 쓰고, 한 쪽 방은 박화성이 집필실 겸 서재로 썼다. 이곳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둘째 며느리를 맞았고, 셋째 아들까지 대학을 졸업했다.
구월 초순에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내일의 태양」을 육십 회가 자칫 넘어서 영화사에 넘겼더니 적으나마 한꺼번에 받을 수 있어서 정릉에 이십 평짜리 집을 샀는데, 대학생 셋의 학비를 부담하고 병자를 낀 살림을 하면서 그래도 삼십만 환 전셋집에서 이만큼 늘려 온 자신의 힘이 신통하게도 생각되었다.
- 박화성, 「눈보라는 개이려나」-
성실과 검소, 꼼꼼함은 박화성이 삶을 사는 태도였다.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자세로 살라고 가르쳤고, 광고지나 파지 뒷면을 모아 초고를 쓸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손님이 올 때면 하얀 장갑을 끼어 손을 보이지 않았고, 단정한 옷차림과 맵시에 신경을 썼다.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다시 시작한 향학열, 교사생활까지 한 교육열을 가졌던 박화성이 어머니여서일까, 세 아들 승준, 승세, 승걸 또한 글과 관련된 길을 걸었다. 서울과 목포를 오갈 때면 며칠 후에 만날 텐데도 기차 안에서 집에 있는 어린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쓰게 하였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효당曉堂, 송영松影, 세암歲巖처럼 각자 필명을 두세 개씩 만들어 글을 써서 엮고, 어머니에게도 글을 받아 열 쪽이 넘는 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책과 글이 익숙한 집안 분위기가 낳은 작품이었다.
목포 출신 문인들에게 박화성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극작가 차범석 이나 평론가 최일수 같은 후배들이 서울에 오면 정릉 집으로 박화성을 찾았고, 박화성은 그들이 서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세 아들이 주축이 된 목포 출신 대학생들의 모임인‘유달문학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던 시인 김하림이나 김송희, 정규남, 둘째 아들 천승세의 친구인 유현종, 이근배, 이이화도 정릉 집에 자주 들리곤 했다. 집에서 30분쯤 거리에는 소설가 박경리의 집이 있어 박화성과 비슷한 연배인 박경리의 어머니와 방아잎이나 깻잎을 다듬어 나누기도 하는 등 서로 오가며 지냈다. 1963년 하월곡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5년 동안 지낸 정릉 집은 박화성과 가족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기억되는 집이었다.
박화성은 서울에 올라온 이후 문인들이 많이 모이던 갈채다방에서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과 안면을 익혔다. 한말숙이나 손소희도 이때 처음 만났고, 모윤숙은 이광수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같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친분을 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조각가라 할 수 있는 김정숙은 ‘평범해 보이는 외모 속에 깊은 내면을 감추고 계신 분’이라고 박화성을 기억하며 여러 가르침을 받은 어른이라고 회고하였다. 비슷한 시기 활발하게 활동한 최정희와는 『여류한국』(1965)을 함께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고, 집안 살림과 글쓰기를 병행하느라 사회활동을 할 시간도 없었다. 후에 자서전에서‘문단과 거리, 시골에 서한 문학수업, 문우들과 거리’를 문단생활에 지장을 준 요인으로 꼽 기도 했는데, 자식들이 모두 성장하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1960년대 들어서야 문학계의 원로로 여러 활동을 펼쳤다. 한국문인협회 창립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 등을 지냈고, 여러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격려하였다.
“여자란 아내라거나 어미라거나 그런 책임만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주제에 소설을 쓴다니 천만부당하지 않느냐?” 그러나 여성의 임무가 내 천직이라면 소설을 쓴다는 것, 즉 창작이란 ‘박화성’이라는 특정한 인간의 천직일 것이다. 다만 여자인 까닭에 피할 수 없는 천직이 두 개가 거듭 내 등에 지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 박화성, 『눈보라의 운하』-
여성 문인들의 활동을 돕는 원로작가로, 목포 출신 후배들의 스승 같은 선배로 활동하는 한편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한 해에 한 두 작품씩 지면에 발표하고, 글을 모아 책을 엮어냈다. 여든 다섯 살, 생을 마치는 그 해까지 문학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박화성. 100편이 넘는 작품은 2004년 전20권인 『박화성문학전집』으로 세상에 다시 소개되었다.
박화성이 문단에 나와 활동할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적고, 여성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작가라는 말 앞에 늘 ‘여류’라는 수식이 따랐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글을 써서 주목을 받은 것이 아닌, ‘박화성’이라는 작가로 우리 문단에 이름을 남겼 다. 1992년 목포에서는 ‘소영 박화성 문학기념관’을 세워 박화성을 기념하였다. 친필 원고와 작품, 집필실을 재현한 공간이 2007년 목포문학관으로 옮겨졌고, 박화성의 이름을 건 전국백일장, 문학페스티발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목포에서 태어난 박화성은 여섯 살 때 들어간 학교에서 월반을 거듭해 동년배를 가르칠 만큼 총명하였다. 어린 시절 『숙영낭자전』, 『유충렬전』 같은 고전소설을 외워 이야기해 줄 정도로 문학에 관심 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한글을 배우자마자 소설 읽기에 빠져 지냈다. 다른 집에서 책을 빌려다 읽고서도 모자라 집에 있는 책을 몇 번씩 읽곤 했다.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열다섯 살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후 천안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영광중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근무를 시작하였다. 이때 시인 조운을 만나 문학 공부를 하며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시 짓는 법을 배우고, 습작을 보이며 필력을 키워나갔다. 조운이 박화성을 문학으로 이끈 사람이라면, 소설가 이광수는 문단 활동의 지원자였다. 추석 전날 밤 한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을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한 『추석전야』를 조운이 이광수에게 보냈고, 이광수가 이를 《조선문단》에 추천하여 1925년 문단에 정식 등단한다.
교원들의 거의가 문학애호가이며 그 중에 가장 뛰어난 시인 조 운씨가 있는 환경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문학도가 되어갔다. 한 번은 학교 뜰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 매어 놓은 그네의 노래를 청하기에 4줄 2절의 노래를 지어 보였더니 선생들과 운씨가 대단히 칭찬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남몰래 노래와 글을 써 모았던 4권의 노트를 운씨에게 보여 여러 가지의 평을 듣고 시 짓는 법을 배웠다.
- 박화성, 「1923년 9월 1일」-
스물두 살이란 나이에 등단까지 하였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공부에 대한 열의로 모교에 다시 편입하여 어린 후배들과 수업을 들었다. 학제가 바뀌며 대학을 가려면 고등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녀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졸업 후 일본여자대학 영문과에 합격하고,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드디어 유학을 간다. 유학 중에 구상한 소설 『백화』는 이광수의 추천으로 1932년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여류 문인이 쓴 첫 장편연재소설이자 박화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백화』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남성들에게 억압받고, 사회의 불합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백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나타내고자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름다운 기생인 백화의 사랑 이야기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었다.
박화성은 평생 글을 쓰는 동안 정해진 원고량 보다 두 배 가까이를 쓸 정도로 작품마다 공을 들여 완성했다. 『백화』는 네 번이나 고쳐 쓰다가 펜을 쥔 손에 혹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원고지에 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듭 쓰다보면 원고지 위는 글씨로 가득차기 마련이었다. 고심하여 다시 쓴 문장을 새 종이에 깨끗이 쓴 뒤 오려서 고칠 문장 위에 붙이거나 틀린 곳을 칼로 긁어 지우고 다시 써나갔다. 원고를 받는 편집자에겐 고마운 일이지만 작가로서는 고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온 힘을 다 해 쓴 자신의 글을 정확히 전달하려는 이 과정까지도 박화성에게는 글쓰기의 일부였다.
또한 등장인물의 말투를 신문사에서 표준어로 바꾸는 것이 걱정되어 원고를 보내며 특정한 표현을 그대로 실어달라고 따로 당부 할 정도로 꼼꼼하였다. 신문에 연재한 「고개를 넘으면」을 쓸 때는 대학원생인 등 장인물들의 생활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며 법학, 공학 같은 각 전공 강의까지 들어가며 글을 썼다. 제목과 인물, 관계도, 기획 진행도를 다 짜서 갖추고, 문장이 머리에 떠오른 뒤에야 펜을 드는 철두철미한 글쓰기였다. 바닥에 며칠이고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작품구상을 하는 습관 때문에 집필하는 방 천장 색과 모양은 늘 밝고 반듯하게 마감해놓았다. 여러 준비를 마치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물이 흐르듯 20~30장을 써나갔는데, 새벽부터 아침까지가 가장 집중해서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붓대는 정직해야 한다. 내 삶의 전모가 나타나 있는 생활기록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재주껏 성의껏 쓰면 되는 것이다.
- 박화성, 『순간과 영원 사이』-
점차 문화예술인과 교류가 넓어지며 지인들이 관계된 여러 지면에 글이 실렸다. 1930년대는 대표작인 『백화』외에 단편 『홍수전후』, 장편연재소설 『북국의 여명』을 포함해 소설, 희곡, 동화 등 25편을 발표하였다. 박화성은 경주, 부여, 강서고분 등지로 답사를 다니며 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하였다. 유적지만 보는 답사가 아니라 농촌이나 영세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소설 속에 그려냈다. 글을 통해 착취당하며 가난하게 사는 이들을 대변하고, 참담한 사회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어디에선가 내게 대한 기록을 보니까 1926년부터 1930년까지는 공백기간이라고 했는데, 나는 혼자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공백기라고 하는 그 기간에 나는 눈을 버리며 잠자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워 학과를 전공하면서도 틈틈이 전부터 품고 있던 내 소설의 소재를 살려 장편으로 이룩하려는 큰 욕망에서 피땀을 흘리며 초고를 작성했다.
- 박화성, 「나의 교우록」-
글을 쓰는 한편 아이를 낳아 키우며 집을 가꾸고 가정을 이뤄나갔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 덕분에 꽃동산이라고 할 만큼 꽃과 나무가 많은 집에서 자라서인지 어려운 시절 작은 집을 옮겨 다니며 살 때도 자투리 공간에 늘 꽃을 가꿔 집 안 분위기를 돋우었다. 동네 사람들은 박화성의 집을 일컬어 ‘꽃재(꽃 화花, 성 성城이란 이름에서 따온 말)’라고 할 정도였다.
어머니이자 아내로 가정을 꾸리면서도 시간을 쪼개 글을 썼다. 수입이 변변치 않던 때에도 글 쓸 시간을 마련하려고 아이 둘을 유치원에 보내기도 했다. 박화성에게 글쓰기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횡포로 국어를 쓰지 못하게 되자 집필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해방 때까지 글을 쓰지 않았다.
1950년대에 들어 목포와 서울을 오갈 일이 많아졌고,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에도 집이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산 후암동에 살다가 종로로 이사하여 사간동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후 남편 사업이 기울며 팔판동, 가회동, 권농동, 인의동(원남동)으로 한 곳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전셋집을 전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원고료가 유일한 수입이었고, 「고개를 넘으면」, 「 사랑」,「 벼랑에 피는 꽃」까지 잇달아 신문소설을 연재하며 몸도 약해졌다. 서울에서 전셋집을 옮겨 다닌 4년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다행히 1958년 6월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한 「내일의 태양」이 60회를 넘겼을 때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영화사에 준 돈을 밑천으로 정릉동에 집을 샀다. 아들 셋의 학비를 부담하고, 병석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일군 집이었다.
아리랑고개와 미도극장 중간쯤에 있던 집(정릉동 130-1번지)은‘ㄷ’자로 된 스무 평 정도의 한옥이었다. 방 다섯 개는 박화성 부부와 아들 삼형제가 나누어 쓰고, 한 쪽 방은 박화성이 집필실 겸 서재로 썼다. 이곳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둘째 며느리를 맞았고, 셋째 아들까지 대학을 졸업했다.
구월 초순에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내일의 태양」을 육십 회가 자칫 넘어서 영화사에 넘겼더니 적으나마 한꺼번에 받을 수 있어서 정릉에 이십 평짜리 집을 샀는데, 대학생 셋의 학비를 부담하고 병자를 낀 살림을 하면서 그래도 삼십만 환 전셋집에서 이만큼 늘려 온 자신의 힘이 신통하게도 생각되었다.
- 박화성, 「눈보라는 개이려나」-
성실과 검소, 꼼꼼함은 박화성이 삶을 사는 태도였다.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성실한 자세로 살라고 가르쳤고, 광고지나 파지 뒷면을 모아 초고를 쓸 정도로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손님이 올 때면 하얀 장갑을 끼어 손을 보이지 않았고, 단정한 옷차림과 맵시에 신경을 썼다.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다시 시작한 향학열, 교사생활까지 한 교육열을 가졌던 박화성이 어머니여서일까, 세 아들 승준, 승세, 승걸 또한 글과 관련된 길을 걸었다. 서울과 목포를 오갈 때면 며칠 후에 만날 텐데도 기차 안에서 집에 있는 어린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쓰게 하였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효당曉堂, 송영松影, 세암歲巖처럼 각자 필명을 두세 개씩 만들어 글을 써서 엮고, 어머니에게도 글을 받아 열 쪽이 넘는 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책과 글이 익숙한 집안 분위기가 낳은 작품이었다.
목포 출신 문인들에게 박화성은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극작가 차범석 이나 평론가 최일수 같은 후배들이 서울에 오면 정릉 집으로 박화성을 찾았고, 박화성은 그들이 서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세 아들이 주축이 된 목포 출신 대학생들의 모임인‘유달문학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던 시인 김하림이나 김송희, 정규남, 둘째 아들 천승세의 친구인 유현종, 이근배, 이이화도 정릉 집에 자주 들리곤 했다. 집에서 30분쯤 거리에는 소설가 박경리의 집이 있어 박화성과 비슷한 연배인 박경리의 어머니와 방아잎이나 깻잎을 다듬어 나누기도 하는 등 서로 오가며 지냈다. 1963년 하월곡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5년 동안 지낸 정릉 집은 박화성과 가족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기억되는 집이었다.
박화성은 서울에 올라온 이후 문인들이 많이 모이던 갈채다방에서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과 안면을 익혔다. 한말숙이나 손소희도 이때 처음 만났고, 모윤숙은 이광수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같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친분을 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조각가라 할 수 있는 김정숙은 ‘평범해 보이는 외모 속에 깊은 내면을 감추고 계신 분’이라고 박화성을 기억하며 여러 가르침을 받은 어른이라고 회고하였다. 비슷한 시기 활발하게 활동한 최정희와는 『여류한국』(1965)을 함께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고, 집안 살림과 글쓰기를 병행하느라 사회활동을 할 시간도 없었다. 후에 자서전에서‘문단과 거리, 시골에 서한 문학수업, 문우들과 거리’를 문단생활에 지장을 준 요인으로 꼽 기도 했는데, 자식들이 모두 성장하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1960년대 들어서야 문학계의 원로로 여러 활동을 펼쳤다. 한국문인협회 창립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 등을 지냈고, 여러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격려하였다.
“여자란 아내라거나 어미라거나 그런 책임만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주제에 소설을 쓴다니 천만부당하지 않느냐?” 그러나 여성의 임무가 내 천직이라면 소설을 쓴다는 것, 즉 창작이란 ‘박화성’이라는 특정한 인간의 천직일 것이다. 다만 여자인 까닭에 피할 수 없는 천직이 두 개가 거듭 내 등에 지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 박화성, 『눈보라의 운하』-
여성 문인들의 활동을 돕는 원로작가로, 목포 출신 후배들의 스승 같은 선배로 활동하는 한편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한 해에 한 두 작품씩 지면에 발표하고, 글을 모아 책을 엮어냈다. 여든 다섯 살, 생을 마치는 그 해까지 문학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박화성. 100편이 넘는 작품은 2004년 전20권인 『박화성문학전집』으로 세상에 다시 소개되었다.
박화성이 문단에 나와 활동할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적고, 여성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작가라는 말 앞에 늘 ‘여류’라는 수식이 따랐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글을 써서 주목을 받은 것이 아닌, ‘박화성’이라는 작가로 우리 문단에 이름을 남겼 다. 1992년 목포에서는 ‘소영 박화성 문학기념관’을 세워 박화성을 기념하였다. 친필 원고와 작품, 집필실을 재현한 공간이 2007년 목포문학관으로 옮겨졌고, 박화성의 이름을 건 전국백일장, 문학페스티발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박화성
1903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21년 전라남도 영광중학교 교사
1925년 《조선문단》에 이광수의 추천으로「추석전야」발표
1930년 일본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32년 동아일보에「백화」연재 시작
1946년 대동아전쟁 이후 멈춘 집필활동을《예술문화》에 수필「시풍 형께」를 발표하며 재개
1961년 한국문인협회 창립이사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회장
1966년 예술원 회원
1988년 작고
대표작품
『백화』, 『고향 없는 사람들』, 『홍수전후』, 『고개를 넘으면』, 『사랑』, 『태양은 날로 새롭다』, 『순간과 영원 사이』, 『벼랑에 피는 꽃』, 『눈보라의 운하』 등
상훈
한국문학상 수상(1966), 대한민국예술원상(1970), 3.1문화상(1984)
박화성
1903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1921년 전라남도 영광중학교 교사
1925년 《조선문단》에 이광수의 추천으로「추석전야」발표
1930년 일본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32년 동아일보에「백화」연재 시작
1946년 대동아전쟁 이후 멈춘 집필활동을《예술문화》에 수필「시풍 형께」를 발표하며 재개
1961년 한국문인협회 창립이사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회장
1966년 예술원 회원
1988년 작고
대표작품
『백화』, 『고향 없는 사람들』, 『홍수전후』, 『고개를 넘으면』, 『사랑』, 『태양은 날로 새롭다』, 『순간과 영원 사이』, 『벼랑에 피는 꽃』, 『눈보라의 운하』 등
상훈
한국문학상 수상(1966), 대한민국예술원상(1970), 3.1문화상(1984)
소설가이다. 1925년 춘원 이광수가 추천한 「추석전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하였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백화」는 여류 문인이 쓴 첫 장편연재소설로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상을 작품 속에 그려냈다. 동화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희곡이나 수필, 자전 소설 등 다방면의 글을 썼다. 한국여류문학인회와 국제펜클럽에 참여하며 같은 시기 활동한 최정희, 한말숙, 모윤숙 등과 교유하였다. 1958년 정릉동 130-1번지에 ㄷ자 구조인 스무 평 남짓 되는 한옥을 마련하였다. 1963년 하월곡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정릉집은 고향 목포 출신 예술인들과 문단 후배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친구 동생인 극작가 차범석이 서울에 왔을 때 친누나처럼 직장을 알아봐주고, 서울 정착을 도왔다. 큰 아들은 문학평론가, 둘째는 소설가, 셋째는 영문학자로 모두 어머니를 이어 문단에 몸담고 있다.
소설가이다. 1925년 춘원 이광수가 추천한 「추석전야」로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하였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백화」는 여류 문인이 쓴 첫 장편연재소설로 동아일보에 6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상을 작품 속에 그려냈다. 동화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하고, 희곡이나 수필, 자전 소설 등 다방면의 글을 썼다. 한국여류문학인회와 국제펜클럽에 참여하며 같은 시기 활동한 최정희, 한말숙, 모윤숙 등과 교유하였다. 1958년 정릉동 130-1번지에 ㄷ자 구조인 스무 평 남짓 되는 한옥을 마련하였다. 1963년 하월곡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정릉집은 고향 목포 출신 예술인들과 문단 후배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친구 동생인 극작가 차범석이 서울에 왔을 때 친누나처럼 직장을 알아봐주고, 서울 정착을 도왔다. 큰 아들은 문학평론가, 둘째는 소설가, 셋째는 영문학자로 모두 어머니를 이어 문단에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