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의 주민자치조직이다. 일제강점기에 성북정회, 성북구락부 등을 결성하여 지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했는데 이러한 전통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동회장 중에는 후일 국회의원이 된 이도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민조직 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었다.
1946년 왜색을 일소하는 움직임 하에 성북정은 곧 성북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북동에는 동회와 이를 이끈 동회장들이 있었다. 동회는 1933년 10월 3일에 설치되었던 정회가 그 기원이 된다. 1943년 구제가 실시된 이래 동대문구에 속했던 성북동은 그해 8월 1일에 성북 1, 2 정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 1일 정회는 동회로, 정회를 이끄는 정총대는 동회장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성북 제 1, 2정회 역시 제 1동회와 제 2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1955년 4월 18일 동제가 실시되어 성북 제 1동과 제 2동의 구역이 재정의되기 이 전까지 근 십년간 유지되었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원래 행정조직이 아닌 동회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폐지될 뻔했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 그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식 행정조직의 산하에 속하지 않고,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성북동에는 예로부터 마을 문화가 강했고, 해방 이후에도 동민들의 자치조직인 ‘자성회’가 조직되어 동민단합과 문화적 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3년, 그리고 주민동원이 일상회되어 있던 이승만 정권 하에선 이들 동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난무했다. 5.10선거를 수행하기 위한 향보단(후일의 민보단),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유숙계, 애국반(후일 국민반) 등이 그것 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동회는 일시적으로 이러한 단체들에 대 한 지원을 떠맡는 등 지역 활동에서 핵심을 담당했다.
성북동에도 동회 아래 제 1향보단 등 향보단이 결성되었고, 이른 바 해방 정국 우익 4대 청년단체 중 하나인 국청 성북동 제 1분회, 제 2 분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청년단의 활동은 특히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동회장 중에는 후일 국회의원이 된 이도 있었다. 1951년 당시 성북 제 1동의 동회장은 조태우趙泰友씨, 그리고 제 2동의 동회장은 김일金一씨였다. 이 중 제 2동의 동회장 김일은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 16인 중 1인으로 9,838표로 당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만주 봉천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 금릉대학을 중퇴한 이후 국민회의 선전부장, 자유당 성북구 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민조직 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었다.
1946년 왜색을 일소하는 움직임 하에 성북정은 곧 성북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북동에는 동회와 이를 이끈 동회장들이 있었다. 동회는 1933년 10월 3일에 설치되었던 정회가 그 기원이 된다. 1943년 구제가 실시된 이래 동대문구에 속했던 성북동은 그해 8월 1일에 성북 1, 2 정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 1일 정회는 동회로, 정회를 이끄는 정총대는 동회장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성북 제 1, 2정회 역시 제 1동회와 제 2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1955년 4월 18일 동제가 실시되어 성북 제 1동과 제 2동의 구역이 재정의되기 이 전까지 근 십년간 유지되었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원래 행정조직이 아닌 동회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폐지될 뻔했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 그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식 행정조직의 산하에 속하지 않고,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성북동에는 예로부터 마을 문화가 강했고, 해방 이후에도 동민들의 자치조직인 ‘자성회’가 조직되어 동민단합과 문화적 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3년, 그리고 주민동원이 일상회되어 있던 이승만 정권 하에선 이들 동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난무했다. 5.10선거를 수행하기 위한 향보단(후일의 민보단),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유숙계, 애국반(후일 국민반) 등이 그것 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동회는 일시적으로 이러한 단체들에 대 한 지원을 떠맡는 등 지역 활동에서 핵심을 담당했다.
성북동에도 동회 아래 제 1향보단 등 향보단이 결성되었고, 이른 바 해방 정국 우익 4대 청년단체 중 하나인 국청 성북동 제 1분회, 제 2 분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청년단의 활동은 특히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동회장 중에는 후일 국회의원이 된 이도 있었다. 1951년 당시 성북 제 1동의 동회장은 조태우趙泰友씨, 그리고 제 2동의 동회장은 김일金一씨였다. 이 중 제 2동의 동회장 김일은 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 16인 중 1인으로 9,838표로 당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만주 봉천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 금릉대학을 중퇴한 이후 국민회의 선전부장, 자유당 성북구 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래 주민조직 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었다.
성북동회, 동회를 이끈 인물들 (1955년까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마을이라고 부르는 최소단위가 바로 동네 혹은 ‘동(洞)’이다. 서울의 경우에 한정하더라도 이는 18세기 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해온 생활공간이었다. 일제시대 서울, 즉 경성부 역시 행정의 최소단위를 바로 이 동으로 삼았고, 당대에는 이를 ‘정(町)’이라고 불렀다. 1936년 4월 경성부로 편입된 ‘성북정’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 있다.
성북정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성북구락부라는 청년조직과 총대/정회라는 청년조직과 지역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
1946년 왜색을 일소하는 움직임 하에 성북정은 곧 성북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북동에는 동회와 이를 이끈 동회장들이 있었다. 동회는 1933년 10월 3일에 설치되었던 정회가 그 기원이 된다. 1943년 구제가 실시된 이래 동대문구에 속했던 성북동은 그해 8월 1일에 성북 1, 2 정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46년 10월 1일 정회는 동회로, 정회를 이끄는 정총대는 동회장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성북 제 1, 2 정회 역시 제 1동회와 제 2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1955년 4월 18일 동제가 실시되어 성북 제 1동과 제 2동의 구역이 재정의되기 이전까지 근 십년간 유지되었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원래 행정조직이 아닌 동회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페지될 뻔했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 그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식 행정조직의 산하에 속하지 않고,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3년, 그리고 주민동원이 일상화되어있던 이승만 정권 하에선 이들 동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난무했다. 5·10 선거를 수행하기 위한 향보단(후일의 민보단),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유숙계, 애국반(후일 국민반)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동회는 일시적으로 이러한 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떠맡는 등 지역 활동에서 핵심을 담당했다.
성북동에도 동회아래 제 1향보단 등 향보단이 결성되었고, 이른바 해방 정국 우익 4대 청년단체 중 하나인 국청 성북동 제 1분회, 제 2분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청년단의 활동은 특히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성북동회, 동회를 이끈 인물들 (1955년까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마을이라고 부르는 최소단위가 바로 동네 혹은 ‘동(洞)’이다. 서울의 경우에 한정하더라도 이는 18세기 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해온 생활공간이었다. 일제시대 서울, 즉 경성부 역시 행정의 최소단위를 바로 이 동으로 삼았고, 당대에는 이를 ‘정(町)’이라고 불렀다. 1936년 4월 경성부로 편입된 ‘성북정’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 있다.
성북정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성북구락부라는 청년조직과 총대/정회라는 청년조직과 지역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이익을 위한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
1946년 왜색을 일소하는 움직임 하에 성북정은 곧 성북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북동에는 동회와 이를 이끈 동회장들이 있었다. 동회는 1933년 10월 3일에 설치되었던 정회가 그 기원이 된다. 1943년 구제가 실시된 이래 동대문구에 속했던 성북동은 그해 8월 1일에 성북 1, 2 정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해방 이후인 46년 10월 1일 정회는 동회로, 정회를 이끄는 정총대는 동회장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성북 제 1, 2 정회 역시 제 1동회와 제 2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1955년 4월 18일 동제가 실시되어 성북 제 1동과 제 2동의 구역이 재정의되기 이전까지 근 십년간 유지되었다.
1955년 이전까지 행정의 최소단위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은 이들 동회, 그리고 동회장이었다. 원래 행정조직이 아닌 동회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페지될 뻔했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 그리고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정식 행정조직의 산하에 속하지 않고, 반관반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략)
그러나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3년, 그리고 주민동원이 일상화되어있던 이승만 정권 하에선 이들 동회를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난무했다. 5·10 선거를 수행하기 위한 향보단(후일의 민보단),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한 유숙계, 애국반(후일 국민반)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동회는 일시적으로 이러한 단체들에 대한 지원을 떠맡는 등 지역 활동에서 핵심을 담당했다.
성북동에도 동회아래 제 1향보단 등 향보단이 결성되었고, 이른바 해방 정국 우익 4대 청년단체 중 하나인 국청 성북동 제 1분회, 제 2분회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 청년단의 활동은 특히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조선 방문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2. 성북동회(城北洞會)와 동회를 이끈 인물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자치조직(성북정회, 성북구락부 등)의 전통을 해방 후에도 계승
- 1946년 성북동회 설치 및 동회장 임명
※ 1933년 설치된 성북정회가 그 기원으로 속하지 않은 채 반관반민적 성격 유지
- 1947년 동회 산하에 향보단 결성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국청) 성북동 제1분회, 제 2분회 활동 시작
→ 이들 우익 청년당의 활동은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방문을 계기로 격화
- 자성회 조직 → 동민단합과 문화적 계몽활동
- 김일(金一) : 1951년 당시 성북제2동 동회장
ㆍ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 16인 중 1인으로 9,838표로 당선되기도 했으며 만주 봉천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1955년까지 유지
한국전쟁 이후 동회는 행정조직 산하에 남경 금릉대학을 중퇴한 이후 국민회의 선전부장, 자유당 성북구 당위원장 등을 역임했었던 인물
ㆍ일제시대 이래 주민조직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 여전했음을 보여 주는 인물
2. 성북동회(城北洞會)와 동회를 이끈 인물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자치조직(성북정회, 성북구락부 등)의 전통을 해방 후에도 계승
- 1946년 성북동회 설치 및 동회장 임명
※ 1933년 설치된 성북정회가 그 기원으로 속하지 않은 채 반관반민적 성격 유지
- 1947년 동회 산하에 향보단 결성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국청) 성북동 제1분회, 제 2분회 활동 시작
→ 이들 우익 청년당의 활동은 1948년 1월 유엔조선임시위원단 방문을 계기로 격화
- 자성회 조직 → 동민단합과 문화적 계몽활동
- 김일(金一) : 1951년 당시 성북제2동 동회장
ㆍ1954년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 16인 중 1인으로 9,838표로 당선되기도 했으며 만주 봉천 삼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1955년까지 유지
한국전쟁 이후 동회는 행정조직 산하에 남경 금릉대학을 중퇴한 이후 국민회의 선전부장, 자유당 성북구 당위원장 등을 역임했었던 인물
ㆍ일제시대 이래 주민조직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 여전했음을 보여 주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