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다. 광복 후 교직생활을 하다가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이후 고무신으로 개재(改題))를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新天地)』에 발표하고, 이듬해 「머루」가 『서울신문』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1954년 조연현 등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의 창간에 간여하여 초대 편집장을 맡았다. 1957년 성북구 돈암동 250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단편소설 「여우」, 「명암」 등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이후 1963년에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현대문학』을 퇴사하고 이듬해 위궤양 수술을 받았다. 쇠약해진 건강에도 1978년 제7창작집 『잃어버린 도원』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다음해 간암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두 노인」과 「갯마을」등이 있다.
소설가이다. 1949년 「남이와 엿장수」(후에 「고무신」으로 개작)를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싣고, 이듬해 「머루」가 《서울신문》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해방 이후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53년 《문예》에 발표한 「두 노인」, 「갯마을」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문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1954년 《현대문학》에서 초대 편집장을 맡아 10여 년 동안 문학잡지 발간을 하였다. 이때 서울로 올라오면서 돈암동 250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단편소설 「여우」, 「명암」 등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건강이 나빠지며 1963년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였다가 1977년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소설가이다. 1949년 「남이와 엿장수」(후에 「고무신」으로 개작)를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싣고, 이듬해 「머루」가 《서울신문》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았던 그는 해방 이후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53년 《문예》에 발표한 「두 노인」, 「갯마을」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문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1954년 《현대문학》에서 초대 편집장을 맡아 10여 년 동안 문학잡지 발간을 하였다. 이때 서울로 올라오면서 돈암동 250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단편소설 「여우」, 「명암」 등 여러 편을 발표하였다. 건강이 나빠지며 1963년 도봉구 우이동으로 이사하였다가 1977년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소설가 오영수는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인물들의 때 묻지 않은 삶을 통해 향토적인 서정을 그린 작가이다. 1909년 경상남도 울산군의 작은 농촌마을인 언양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영수는 어린 시절 그림도 잘 그렸고 음악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화쟁이가 되려면 부자의 의를 끊겠다!”고 하여 소질을 살리지 못했고, “풍각쟁이가 되려거든 오늘부터 이 집을 나가라!”고 하여 음악도 배울 수 없었다. 가난함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 속에서 오직 독서만이 젊은 낭만을 달래 주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은 시를 쓰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을 오가며 공부를 한 오영수는 귀국 후 1943년 부산 동래 기장의 한 어촌 마을 면사무소에서 임시서기로 일하였다.
술자신 우라버지 술자신 우라버지
거짓말쟁이 심술쟁이지
장가시면 딱총하나 왼집안 사람에게
사준다더니 지분을 떨고
나무판돈 가지고 대업시 어머니만
술만자시지 복가대지오
오영수, <술 자신 우리 아버지>조선일보, 1929.11.10
이때 기장에서 요양 중이던 소설가 김동리의 형 한학자 범부 김정설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형을 만나기 위해 온 김동리와 알게 되며 그의 추천으로 1949년 단편소설「남이와 엿장수」(후에 「고무신」으로 개작)를 《신천지》에 발표하였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머루」로 정식 등단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아 일본 유학시절에도 실내장식사 견습생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오영수는 해방 이후 부산의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게 된다. 1946년에는 장남 오윤이 태어났는데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후에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판화가가 되었다. 부산에서 지내며 한국전쟁 때 피난을 온 문인들이 잘 곳이 없어 고생할 때 모른 척 하지 않고 잘 곳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1954년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의 사장인 고향선배 김기오가 《현대문학》을 창간하여 오영수를 초대편집장으로 초빙하였다.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단의 분위기를 익히던 때라 편집장 제의에 응하고 부산 생활을 정리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250번지, 신흥사 입구에 있는 집을 얻었다. 멀지 않은 곳에 배밭이 있어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돈암동에 정착한 뒤 스스로 평소와 달리 많은 글을 썼다고 회고할 만큼 「여우」, 「후조候鳥」, 「명암」등 단편소설 여러 편을 발표하였고, 1957년에는 부산 기장에서 보낸 시기의 삶을 바탕으로 대표작 「갯마을」을 썼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갯마을」에서 해순의 삶과 애환을 통해 생명의 순환과 회귀라는 자연의 순리를 담고자 하였다.
오영수의 단편소설 「갯마을」은 1953년 『문예』 제19호에 발표되었고, 이후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단편집 『갯마을』에 수록되었다.
소설가 오영수는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인물들의 때 묻지 않은 삶을 통해 향토적인 서정을 그린 작가이다. 1909년 경상남도 울산군의 작은 농촌마을인 언양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영수는 어린 시절 그림도 잘 그렸고 음악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화쟁이가 되려면 부자의 의를 끊겠다!”고 하여 소질을 살리지 못했고, “풍각쟁이가 되려거든 오늘부터 이 집을 나가라!”고 하여 음악도 배울 수 없었다. 가난함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 속에서 오직 독서만이 젊은 낭만을 달래 주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은 시를 쓰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을 오가며 공부를 한 오영수는 귀국 후 1943년 부산 동래 기장의 한 어촌 마을 면사무소에서 임시서기로 일하였다.
술자신 우라버지 술자신 우라버지
거짓말쟁이 심술쟁이지
장가시면 딱총하나 왼집안 사람에게
사준다더니 지분을 떨고
나무판돈 가지고 대업시 어머니만
술만자시지 복가대지오
오영수, <술 자신 우리 아버지>조선일보, 1929.11.10
이때 기장에서 요양 중이던 소설가 김동리의 형 한학자 범부 김정설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형을 만나기 위해 온 김동리와 알게 되며 그의 추천으로 1949년 단편소설「남이와 엿장수」(후에 「고무신」으로 개작)를 《신천지》에 발표하였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머루」로 정식 등단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주가 많아 일본 유학시절에도 실내장식사 견습생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오영수는 해방 이후 부산의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게 된다. 1946년에는 장남 오윤이 태어났는데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후에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판화가가 되었다. 부산에서 지내며 한국전쟁 때 피난을 온 문인들이 잘 곳이 없어 고생할 때 모른 척 하지 않고 잘 곳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1954년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의 사장인 고향선배 김기오가 《현대문학》을 창간하여 오영수를 초대편집장으로 초빙하였다.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단의 분위기를 익히던 때라 편집장 제의에 응하고 부산 생활을 정리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250번지, 신흥사 입구에 있는 집을 얻었다. 멀지 않은 곳에 배밭이 있어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돈암동에 정착한 뒤 스스로 평소와 달리 많은 글을 썼다고 회고할 만큼 「여우」, 「후조候鳥」, 「명암」등 단편소설 여러 편을 발표하였고, 1957년에는 부산 기장에서 보낸 시기의 삶을 바탕으로 대표작 「갯마을」을 썼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갯마을」에서 해순의 삶과 애환을 통해 생명의 순환과 회귀라는 자연의 순리를 담고자 하였다.
오영수의 단편소설 「갯마을」은 1953년 『문예』 제19호에 발표되었고, 이후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단편집 『갯마을』에 수록되었다.
도시생활에 탈이 났던 것일까. 오영수는 이 무렵부터 신경성 위궤양을 앓는 등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많은 연재 제의가 들어왔지만 자신의 역량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장편소설 의뢰를 거절하고 단편을 고집하였다. “본의 아닌 오해나 욕이나 고독도 나에 대한 내 자신의 불성실보다는 견딜 수 있다”라는 창작관을 가지고 자신의 문체를 지킨 것이다.
1963년에 도봉구 우이동 골짜기로 이사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13년 동안 애정을 쏟았던 《현대문학》을 퇴사하고 이듬해 위궤양 수술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서울 생활은 낭만적이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삭막하고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서울서 삼십년, 옆눈 한번 팔지 못하였다. 자신을 위해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양담배 한 갑 산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점심 한 끼를 떳떳이 사보지 못하였다. 주간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딴 직장으로 가버리면 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실례지만 문단 거지들과 지방 문인들의 시중까지 그 알량한 월급으로 감당을 못해 원고료를 쬐끔 협잡을 해서 문인 거지들과 지방문인들의 찻값에 보태기 위해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두고, 반품을 표지만 뜯어버리고 휴지로 팔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오영수, 「속, 낙향산고」
도시문명의 폐해로 인간의 삶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작가의 체험과 깨달음, 자연과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글에 반영되었다. 자연 속에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단편소설 「메아리」(1959)의 한 부분처럼 자연은 오영수에게 고향같은 곳이었다.
동욱은 산이 좋았다.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은 깊을수록 좋고, 나무가 많을수록 좋다. 소나무보다는 잡목이 많을수록 더 좋다.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다. 가을이 더 좋고 겨울도 싫지 않다. 이렇게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든든하고 미덥다. 산골에 돌아온 것이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흐뭇하고 너그럽다.
오영수, 『메아리』
1972년 12월 두 번째 수술을 받으며 쓴 「입원기」에는“1972년으로 해서 내 생명은 일단 끝나버리고 딴 피의 작용으로 살아 있는 만큼 덤으로 얻은 목숨, 즉, 여백의 생명”이라고 심정을 고백하였다. 이후 영수永壽를 영수映受로, 호를 월주月洲에서 난계蘭溪로 고쳤다. 1977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한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집을 하나 구해서 구들을 고치고 대를 쪼개어 사립문을 달았다. 그리고 그 집을 침죽제枕竹齊이라 하였다. 쇠약해진 건강에도 1978년 제7창작집 『잃어버린 도원』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다음해 간암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도시의 혼탁한 세태를 깨끗하게 할 수 길은 오로지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이라고 한 오영수. 자연과 인간, 소박함을 아낀 마음은 그가 남긴 단편소설 150여 편으로 남아있다.
도시생활에 탈이 났던 것일까. 오영수는 이 무렵부터 신경성 위궤양을 앓는 등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많은 연재 제의가 들어왔지만 자신의 역량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장편소설 의뢰를 거절하고 단편을 고집하였다. “본의 아닌 오해나 욕이나 고독도 나에 대한 내 자신의 불성실보다는 견딜 수 있다”라는 창작관을 가지고 자신의 문체를 지킨 것이다.
1963년에 도봉구 우이동 골짜기로 이사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13년 동안 애정을 쏟았던 《현대문학》을 퇴사하고 이듬해 위궤양 수술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서울 생활은 낭만적이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삭막하고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서울서 삼십년, 옆눈 한번 팔지 못하였다. 자신을 위해 택시를 타지 않았고, 양담배 한 갑 산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점심 한 끼를 떳떳이 사보지 못하였다. 주간은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딴 직장으로 가버리면 종일 사무실을 지켜야 했다. 실례지만 문단 거지들과 지방 문인들의 시중까지 그 알량한 월급으로 감당을 못해 원고료를 쬐끔 협잡을 해서 문인 거지들과 지방문인들의 찻값에 보태기 위해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두고, 반품을 표지만 뜯어버리고 휴지로 팔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오영수, 「속, 낙향산고」
도시문명의 폐해로 인간의 삶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작가의 체험과 깨달음, 자연과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글에 반영되었다. 자연 속에서 전쟁의 아픔을 치유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단편소설 「메아리」(1959)의 한 부분처럼 자연은 오영수에게 고향같은 곳이었다.
동욱은 산이 좋았다.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은 깊을수록 좋고, 나무가 많을수록 좋다. 소나무보다는 잡목이 많을수록 더 좋다.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다. 가을이 더 좋고 겨울도 싫지 않다. 이렇게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든든하고 미덥다. 산골에 돌아온 것이 마치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마음이 흐뭇하고 너그럽다.
오영수, 『메아리』
1972년 12월 두 번째 수술을 받으며 쓴 「입원기」에는“1972년으로 해서 내 생명은 일단 끝나버리고 딴 피의 작용으로 살아 있는 만큼 덤으로 얻은 목숨, 즉, 여백의 생명”이라고 심정을 고백하였다. 이후 영수永壽를 영수映受로, 호를 월주月洲에서 난계蘭溪로 고쳤다. 1977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울주군 웅촌면 곡천리로 낙향한다. 대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시골집을 하나 구해서 구들을 고치고 대를 쪼개어 사립문을 달았다. 그리고 그 집을 침죽제枕竹齊이라 하였다. 쇠약해진 건강에도 1978년 제7창작집 『잃어버린 도원』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다음해 간암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도시의 혼탁한 세태를 깨끗하게 할 수 길은 오로지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이라고 한 오영수. 자연과 인간, 소박함을 아낀 마음은 그가 남긴 단편소설 150여 편으로 남아있다.
오영수(吳永壽) 1909-1979 월주(月洲) 난계(蘭溪)
소설가. 경남 울주 출생.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가 《서울신문》에 입선, 이듬해 단편 「머루」가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부산중학교에 전임하였다가 1955년 《현대문학》의 창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갯마을」(1953), 「명암」(1958), 「메아리」(1959) 등이 있다.
오영수의 단편소설 「갯마을」은 1953년 『문예』 제19호에 발표되었고, 이후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단편집 『갯마을』에 수록되었다.
오영수(吳永壽) 1909-1979 월주(月洲) 난계(蘭溪)
소설가. 경남 울주 출생.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가 《서울신문》에 입선, 이듬해 단편 「머루」가 당선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부산중학교에 전임하였다가 1955년 《현대문학》의 창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갯마을」(1953), 「명암」(1958), 「메아리」(1959) 등이 있다.
오영수의 단편소설 「갯마을」은 1953년 『문예』 제19호에 발표되었고, 이후 1956년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단편집 『갯마을』에 수록되었다.
정의
해방 이후 「갯마을」, 「남이와 엿장수」, 「명암」 등을 저술한 작가. 소설가.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월주(月洲)·난계(蘭溪).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면(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32년 일본 오사카[大阪] 나니와중학[浪速中學]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에 동시(童詩)를 발표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도쿄 국민예술원(國民藝術院)을 졸업하였다.
광복 후 경남여자고등학교(慶南女子高等學校)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49년 단편소설 「남이와 엿장수」(고무신으로 改題)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 이 작품을 『신천지(新天地)』에 발표하고, 이듬해 단편 「머루」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부산중학교에 전임하였다가 1955년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문예지 『현대문학』의 창간에 간여하였다.
같은 해에 제1회 한국문학가협회상을, 1960년에는 아세아자유문학상을, 1977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화산댁이」(1952)·「윤이와 소」(1952)·「코스모스와 소년」(1953)·「갯마을」(1953)·「박학도(朴學道)」(1955)·「여우」(1957)·「후조(候鳥)」(1958)·「명암(明暗)」(1958)·「메아리」(1959)·「개개비」(1959) 등이 있다.
또한 「은냇골 이야기」(1961)·「수련(睡蓮)」(1961)·「섬에서 온 식모(食母)」(1965)·「실걸이꽃」(1968)·「어린 상록수」(1975) 등이 있다.
이동안 『머루』(1954)·『갯마을』(1956)·『명암』(1958)·『메아리』(1960)·『수련(睡蓮)』(1965)·『황혼』(1976)·『잃어버린 도원(桃園)』(1978) 등의 창작집과 『오영수전집』(1968)·『오영수대표작선집』(1974) 등의 전집·선집을 냈다.
총 150여 편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가 단편소설이라는 데서 그의 문학적 성격의 일단을 보여준다. 전형적 단편작가로서 작풍(作風)은 주로 한국적인 소박한 인정이나 서정의 세계에 기조를 두었다.
작중 인물들은 온정과 선의의 인간들이며, 도시보다는 향촌을, 기계문명보다는 자연을, 현대적 세련미보다는 고유한 소박성을 각각 그리워하며 예찬하는 경향을 보였다.
「머루」·「남이와 엿장수」에 보인 소박한 인정적 서정 세계가 「박학도」·「종차(終車)」(1956) 등에 와서는 유형적 인간의 추구와 성격 창조까지 심화되었다.
「후조」나 「명암」 등에 이르러서는 그 속에 부여된 의미를 제시하거나 주장하였다. 이러한 전개는 다시 「내일의 삽화(揷話)」(1958)에 오면서 담담한 인간 긍정의 사상이 인간 옹호의 사상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휴머니즘이나 전통 옹호의 특성 때문에 역사나 사회에 대한 작가적 책무의 문제가 취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성에 대한 긍정, 향토성의 옹호, 반문명적·반도시적 성격은 1950년대 이후 급격히 성행한 외래 문화 수용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