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가이다. 성북구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삼산학교(삼산의숙)의 운영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김동근과 함께 삼산학교의 운영을 주도하였으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삼산학교의 경영난이 심해지면서 학생들이 추위 속에 난로도 없이 고생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기사가 실렸던 시기인 1925년 이후에도 삼산학교의 운영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1927년 현재 삼산학교의 학생은 총 145명이었고 교장은 장인근張寅根이었다. 1928년 삼산학교의 어려운 상황이 신문에 다시 한 번 보도되었다. 20여 년간 수 백 명의 졸업생을 내면서 사회에 공헌한 삼산학교가 역경 속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당시 교육협성회의 윤갑병과 김동근의 주도로 운영되는 삼산학교는 위기를 맞이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두 사람이 사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가 실렸던 시기인 1925년 이후에도 삼산학교의 운영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1927년 현재 삼산학교의 학생은 총 145명이었고 교장은 장인근張寅根이었다. 1928년 삼산학교의 어려운 상황이 신문에 다시 한 번 보도되었다. 20여 년간 수 백 명의 졸업생을 내면서 사회에 공헌한 삼산학교가 역경 속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당시 교육협성회의 윤갑병과 김동근의 주도로 운영되는 삼산학교는 위기를 맞이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두 사람이 사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
경성 근방 삼각산을 배경삼고 경개절승한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옛날 융희2년 고 黃壽延씨의 설립으로 그간 이십년 동안에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어서 사회에 다대한 공헌이 많았는데 그간 춘풍추우 역경속에서 겨우 유지하다가 고 황수연씨 애손(愛孫) 김수영씨가 맡아 경영하던 중 6년전에는 교육협성회(敎育協成會)의 윤갑병(尹甲炳)씨와 김동근(金東瑾)씨가 많이 활동하다가 그들도 역시 감당키 어려워서 지난 오월 경에 사직하매 그 동리 유력 청년 수명이 침식을 잊어 가면서 눈물섞인 열성으로 유지하는 중이라는데 요사이 혹독한 추위에도 경비가 없어서 2백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현상이라 하며 성북동에는 시내 부호별장이 20여 곳이나 있으나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세상이 모두 냉정할 뿐이라 하여 그곳 주민들은 매우 근심중에 있다고 한다.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
경성 근방 삼각산을 배경삼고 경개절승한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옛날 융희2년 고 黃壽延씨의 설립으로 그간 이십년 동안에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어서 사회에 다대한 공헌이 많았는데 그간 춘풍추우 역경속에서 겨우 유지하다가 고 황수연씨 애손(愛孫) 김수영씨가 맡아 경영하던 중 6년전에는 교육협성회(敎育協成會)의 윤갑병(尹甲炳)씨와 김동근(金東瑾)씨가 많이 활동하다가 그들도 역시 감당키 어려워서 지난 오월 경에 사직하매 그 동리 유력 청년 수명이 침식을 잊어 가면서 눈물섞인 열성으로 유지하는 중이라는데 요사이 혹독한 추위에도 경비가 없어서 2백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현상이라 하며 성북동에는 시내 부호별장이 20여 곳이나 있으나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세상이 모두 냉정할 뿐이라 하여 그곳 주민들은 매우 근심중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