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보문로29길 49(삼선동3가 43-1)에 위치한 공립 일반고등학교(남)이다. 경동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조선공립중학교관제에 의해 설립된 ‘욱구(旭九, 아사히오카)공립중학교’로 출발하였는데, 설립 당시에는 용산공립중학교의 학교 건물 일부를 빌려 한국인과 일본인 공학제(共學制)로 개교하였다. 1941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고, 1945년 해방과 함께 일본인 교사와 학생이 퇴교하며 일시 휴교하였다가 곧바로 경동공립중학교로 개칭하고 10월에 재개교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임시수업장을 열기도 하였다. 1951년 학제 개편으로 경동고등학교와 돈암중학교로 분리되었고, 돈암중학교는 1953년 경동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72년 폐교되었다. 2025년 기준 474명이 재학 중이다.
1) 京東高等學校
경동고등학교는 성북구 삼선동3가 5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공립 일반계 남자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40년 3월에 朝鮮公立中學校官制에 의해 설립된 旭九公立中學校로 출발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龍山公立中學校의 校舍일부를 빌려 한국인과 일본인 共學制로 개교하였다. 곧 이어 1941년 4월에는 교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45년 3월에 제1회 (5년제) 및 제2회 (4년제) 졸업식을 동시에 거행하여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일시 휴교하였다가, 1945년 9월에 校名을 京東公立中學校로 개칭하고 10월에 재개교하였다, 1951년 9월에 學制변경으로 경동공립중학교는 경동고등학교와 돈암중학교 (1953년에 경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가, 1972년 중학교 입시 개혁에 따라 폐교됨)로 분리·개편되어 오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74년 3월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부설하여 운영해오고 있으며, 1992년에 제48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2년 4월 현재 학급수 34학급, 학생수 1,774명이며, 교원 80명, 사무직원 8명이 재직중이다.
1) 京東高等學校
경동고등학교는 성북구 삼선동3가 5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공립 일반계 남자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40년 3월에 朝鮮公立中學校官制에 의해 설립된 旭九公立中學校로 출발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龍山公立中學校의 校舍일부를 빌려 한국인과 일본인 共學制로 개교하였다. 곧 이어 1941년 4월에는 교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45년 3월에 제1회 (5년제) 및 제2회 (4년제) 졸업식을 동시에 거행하여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일시 휴교하였다가, 1945년 9월에 校名을 京東公立中學校로 개칭하고 10월에 재개교하였다, 1951년 9월에 學制변경으로 경동공립중학교는 경동고등학교와 돈암중학교 (1953년에 경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가, 1972년 중학교 입시 개혁에 따라 폐교됨)로 분리·개편되어 오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74년 3월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부설하여 운영해오고 있으며, 1992년에 제48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2년 4월 현재 학급수 34학급, 학생수 1,774명이며, 교원 80명, 사무직원 8명이 재직중이다.
['경동고등학교' 이용준 선생님 인터뷰]
Q. 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저는 경동고등학교 지구과학 교사로 근무하는 이용준입니다.
1980년 3월 2일 경동고등학교 학생으로 입학했고, 83년 2월에 졸업 후 대학에 다니고 교직 생활을 하다가 2001년 3월에 경동고등학교로 부임했습니다.
교직원들과 다 함께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을 이곳에서 봤어요. 교장선생님에게 빨간 비더레즈(Be The Reds) 티 입히고 쇼를 했죠. 그때는 아이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보내고 응원한다고 했어요. 선생님들은 퇴근을 못 하니까 정보관에서 대형화면으로 보면서 같이 응원했죠.
2001년, 2002년 2년 간 이곳에서 근무하고 돌고 돌아 작년 2023년에 다시 오게 됐습니다. 이렇게 경동고등학교는 세 번째입니다.
저는 공립학교에 있으니까 5년마다 전보 이동을 하는데 여기 왔을 때 2년 만에 간 이유는 다른 학교에서 와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 당시에 교장 선생님이었고 24년 선배이자 15회 선배인데 그분이 너 여기 있는 것보다 그쪽 학교에 가는 것이 너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거다, 해서 당시에 또 다른 17년 선배님이 교장으로 계신 서울과학고등학교로 가서 근무하다가 돌고 돌아서 다시 여기로 왔죠. 내후년 2026년 8월이면 정년을 해야 합니다. 정년 마지막 학교에요.
그러니까 제가 학창 시절을 시작했고, 교직의 시작은 여기가 아니지만 어쨌든 교직의 마무리는 여기니까 저의 처음과 끝은 경동인 거죠.
Q. 경동고등학교에서의 학창시절은 어떠했나요?
A. 저희 때는 연합고사라는 인문계와 실업계를 가르는 시험만 있었는데 저의 한참 선배, 저희보다 10년 선배들은 원하는 고등학교로 가서 시험을 봤어야 해요. 그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유명했던 학교는 경기고등학교이고 여기는 후기라서 경기고등학교에서 떨어지면 이곳으로 왔었죠. 예전에 경동고등학교는 고등학교에서는 후기였어요.
그러다가 이창갑 교육감이 평준화를 만들면서 어느 순간에 그런 것이 없어졌죠. 지금 수능처럼 자격시험을 보고 그다음에 어느 정도 점수 이상이 되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 있고, 그보다 밑이면 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갔었죠.
그때는 고등학교 수가 적었어요. 인문계 고등학교 수는 적고 정해져 있으니까. 한 반에 중학교는 70명인데 고등학교는 60명이니까.
학교 수가 적으니까 일부는 인문계를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 되면 못 갔어요.
연합고사를 볼 때인데 제 위 선배까지는 서울 시내 안쪽에 경동을 포함해서 저 위에 서울고등학교, 서울이 어디 있었냐면 경희궁 자리에 있었고, 경기고등학교는 정독도서관 자리, 경복은 그대로 있고, 용산도 있고, 저희 위 선배들은 성적만 통과하면 그런 학교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갈 수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서울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어요. 서울고등학교에 제가 좋아하는 중학교 선배가 있었고, 거기가 좀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거기를 가려고 했는데 저희 때부터 그게 딱 폐지가 된 거예요. 그리고 속칭 완전히 뺑뺑이인데.
저는 집이 면목동이었어요. 면목동은 동대문구였죠 지금은 중랑구인데 여기는 전혀 다른 구이고 학군이 다른데.
동대문구는 2학군이라고 해서 거기에는 남자 중학교가 8개가 있는데 남자 고등학교가 4개 밖에 없어요. 그땐 남녀가 별개 학교였고, 남녀공학이 없었으니. 그 당시에 서울 시내 남녀공학은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세정고등학교하고 이대부고.
그러니까 남자, 여자 다 별개인데 중학교는 70명씩 8개 학교가 있고, 고등학교는 60명씩 4개 밖에 없으니까 절반 이상이 다른 동네로 빠져야 해요. 근데 제가 이쪽으로 빠져나온 거예요. 저희가 중학교가 1천 명 가까이 됐어요. 70명씩 15반이니까. 1천 명이 넘었는데 그중에 경동에 온 건 40여 명이죠. 성동도 가고 중동도 가고 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고, 저는 경동으로 오게 됐죠.
경동 첫인상은 옛날 건물을 보셔야 했는데 올라오다 보면 둥글해요, 그러니까 계단이 돌잖아요. 모퉁이를 원형으로 만들어놨어요. 거기에 유리창이 있으니까 뭐 같았냐면
“서대문 형무소가 어디로 이사 갔다는데 여길 버리고 이사 갔나?“
처음에는 형무소인 줄 알았어요. 언덕도 높고, 아주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죠.
학교에 들어왔는데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전교 900명에 같은 중학교 출신은 40명밖에 안 되니까 한 반에 한 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되게 어색했는데 친구들이 좋고 선생님들이 좋고 해서 열심히 했죠. 열심히 하다 보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하게 지냈던 애들하고 다 재미있게 지내고 3년을 잘 마쳤죠.
그 당시에 사립학교들은 서울대에 몇 명을 보냈느냐가 목적이었어요. 서울대 농대라도 좋다 서울대만 집어넣으면 돼요. 그럼 애들은 바로 다 빠져나와요. 안가죠, 거길 누가 가요. 그러니까 서울대 합격자 수는 늘려놨는데 실제로 진학은 안 하는 거예요. 지금처럼 여러 군데 붙는 게 아니라 전기, 후기 두 개 밖에 못 넣으니까 서울대는 전기고 후기는 다른 데고. 거기 떨어지면 그 다음에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근데 거기 합격해도 안 가면 당연히 재수가 되는 거예요.
경동 같은 경우는 대부분의 학교가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저희 학교에서는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네가 원하는 데를 가라.’에요.
“네가 뭘 원하느냐.”
“난 교사도 하고 싶고, 지질학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어디를 가고 싶냐?”
“서울대 지질학과는 안되니까 연대 지질학과를 가겠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두말없이 때리는 거예요. 당시에 연대 지질학과보다 더 높은 과에 가도 되는 성적인데 이건 아닌 거 같다며 집에 가서 생각해 보고 오라고 했죠.
그다음에 또 어딜 간다고 했냐면 교대를 가겠다고 했어요. 교사를 하려면 교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사범대가 아니라.
교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란 것도 몰랐어요. 그리고 예전에 교대는 2년제였어요. 전문대급이었어요. 그러니까 담임은 기가 막히죠. 미친놈이라고 막 패고 그랬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분인데. 그래서 하루 집에서 생각하고 어머니 모시고 오라고 해서 어머니 모시고 왔어요. 담임이 새로운 제안을 하는 거예요.
사범대학 지구학과를 가면 어떻겠느냐, 지구학이니까 지질학도 할 수 있고, 교사도 될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냥 거기 써주세요, 떨어지든 말든 얘 몫이니까. 그래서 요즘 말로 하면 문 닫고 들어갔죠. 끝에서 한두 번째로 문 닫고 들어갔지만 일단은 들어갔으면 된 거죠, 뭐.
Q. 경동고등학교로 부임했을 때는 어땠나요?
A. 2001년에 왔을 때는 제가 다니던 학교 건물은 그대로인데 아이들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좀 하는 아이들도 있고 안 하는 아이들도 있고 그래야 하는데 그동안 굉장히 많이 안 하는 편이었나 봐요. 근데 그 당시에 저를 모교로 오라고 했던 선배님이 부임하시고 나서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나 봐요. 그래서 애들이 성적이 조금씩 올라가고 규율도 잡혀갔는데 제가 온 2002년에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돈 거예요. ‘경동은 두발도 규제가 없고, 교복도 규제 없고’이런 식으로 소문이 난 거예요. 그러니까 온 동네에서 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다 몰려온 거예요. 이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2002년 한 학기 만에 50명을 내보냈어요.
우리 학교는 그런 학교가 아니다. 우린 규정을 지킨다. 그러니까 못 버티고 나간 애도 있고, 난 이런 학교 못 다닌다면서 전학 가거나 자퇴하거나 했죠. 그런 식으로 해서 학기 만에 50명이 나가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학교가 틀이 잡혀요.
그때는 1학년 한 반에 중학교 석차 백분이라고 하잖아요. 석차 백분이니까 100이면 꼴등이에요. 100분에 100이니까. 석차 백분으로 95 이상이 한 반에 열 몇 명씩 있었어요. 그러니까 수업이 되겠어요? 100명 중의 90등 이상이 한 반에 50명 중에 15명이 앉아 있는데 그게 어떻게 수업이 돼요. 선생님들도 미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애들이 알아서 차근차근 나가더라고요. 그러면서 좀 잡았다가 제가 2002년 마치고 2003년에 과학고갈 때 쯤 여기가 또 한 번 밑으로 가요. 그 당시에 교장선생님도 정년퇴임하시고 새로 온 교장선생님이 와서 아이들 인권을 신장해야 한다고 다 풀어줘 버린 거예요. 애들 풀어주면 걷잡을 수 없죠. 남자애들이니까. 그러면서 그다음부터 경동이 명문에서 멸문의 길로 가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듣고 왔어요.
그 전에 여기 있던 사람들이 계속 그 이야기를 하고, 공립이니까 선생님들이 교류되니까 ‘야. 너 모교 개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거예요. 너무너무 속이 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8월에 정년퇴임하신 교장선생님이 계속 오라고 2년 전부터 얘기가 됐는데 혜화여고 교장선생님이 안 놓아주셔서 있다가 왔죠.
오고 나니까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지금은 약간 얘네들이 갈렸어요. 하는 애들과 안 하는 애들로 갈려서 지금은 하는 애들이 꽤 많이 늘었고 열심히 하더라고요.
대학 진학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판가름하긴 그렇지만 대학 진학 성적도 좋은데 그거는 아이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대학을 골라요. 그러니까 내가 서울대, 연고대를 가겠다는 그 생각이 아니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죠.
간호학과 가고 싶어. 서울대 간호학과, 연대 간호학과가 아니어도 돼. 나 삼육대 간호학과래도 가고 싶다. 간호학과 가서 난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니까 꿈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니까 애들이 진학했을 때 탈락률이 적더라고요. 만족도가 높으니까.
명문대 나왔다고 다 잘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다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길이니까. 지금은 아이들이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죠.
3학년 교실 가다 보면 선생님들이 수시로 면접 준비를 시켜줘요. 선생님이 움직이는 건 관리자의 몫도 있긴 한데 경동고는 동창회에서 지원을 좀 많이 해요. 다른 구는 이게 구청별로 다른데 강북구청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를 구청 단위에서 지원해 줘요. 어떤 면에서는 강북구는 성북구보다 더 열악하잖아요. 그런데 강북구에서는 명문 고등학교를 만들기 위해서 난리를 쳐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는 면접 수당이란걸 애들한테 받을 수가 없거든요. 면접 진행하는 건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들이 봉사하는 거잖아요. 구청에서는 면접 보는데 선생님들에게 수당이라도 줘라 이런 식으로 지원해 주거든요. 그런데 성북구에서는 없어요. 그걸 누가 대신하느냐, 그걸 동창회에서 진행하는 거예요.
이번에도 선생님들이 각자 몇명씩 맡아요. 3학년 담임들은 기본이고, 그다음에 3학년 교과를 들어가는 선생님들까지.
이 면접을 진행하는데 선생님들에게 정말 ‘너 뼈 갈아서 준비해라’. 면접 준비하려면 애 생활기록부를 샅샅이 읽어보고 애한테 어떤 질문을 할 것인가 다 해봐야 하거든요. 애가 가고자 하는 대학에서 어떤 인재를 원하는가, 생활기록부를 보고 얘한테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그러려면 얘가 자기가 한 일을 정확히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 질문도 해주고.
인문계열은 주제 탐구라고 해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매칭돼서 준비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노령인구의 변화’ 이런 주제로 했다면 노령인구의 변화에 대해서 1년 동안 준비를 해요. 그래서 보고서를 만들고 발표를 하고, 과학 쪽은 어떤 주제를 잡으면 선생님들과 준비해요. 예를 들어서 제가 했던 것은 ‘서울 시내 풍향에 따른 미세먼지의 이동’으로 보면 나올 수 있거든요. 미세먼지 이동을 확인하려면 아이들이 매일 데이터를 봐야 하거든요. 데이터를 보고 조사를 하거나 결론을 내려야 해요. 또는 ‘대장균이 어떻게 검출되는가’ 그것도 실험하는 경우도 있고, 밑에 층에 가면 분광광도계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자기네들이 탄소 코팅도 해보고 새롭고 다양한 실험을 해요. 그걸 실험하려면 결국 선생님들이 일과 중에는 못하죠. 내 수업도 있고, 애들 수업도 있으니까. 이걸 하는 선생님들은 애들하고 약속해서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방과 후에 진행해야 해요. 그럼, 이거는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해요. 보상받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동창회에서 지원을 해주시기로 했었어요.
올해는 실험 지도에 대해서는 지원을 제가 안 받겠다고 했었어요. 학교 일인데 이걸 안 하는 건 너무 미안하다고 했는데 선생님들이 너무 힘든 거예요. 동창회에 다시 요구해서 안 되겠다 지원받아야겠다 그렇게 하려고요.
(생략)
지금 동창회에서도 아이들에게 지원 들어가는 게 많다 하는데, 재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아이들보다 선생님들에게 지원해야 해요. 선생님들이 신나야 학교가 잘돼요. 아이들 신나는 건 의미 없고 선생님들이 신나서 가르치고 열심히 하다 보면 애들이 따라오게 되어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선생님들에 대한 지원을 동창회 가서 수시로 선생님들이 힘이 나야지 된다고 말하죠.
(생략)
저 같은 경우는 여름방학 동안에 방과후 수업을 열어달라고 해서 전교에 방과후 수업이 세 개가 열렸었어요. 제가 하나 열고, 제 앞에 있던 여 선생님이 열고. 둘이 방학 동안 꼬박 2주를 매일 해야 하는데 한번 할 때마다 2시간이에요. 애들하고 약속하고 했는데 얘들이 시험을 보니까 너무 잘나온 거예요. 모의고사를 봐도 재미있고, 그걸 보고 또 다른 애들이 또 열 받는 거예요. 한 번 더 안 하냐 하니까 된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그냥 대충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열심히 해준다는 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교가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게 보이더라고요. 누구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내 학교의 일이니까요.
학부모들이 학교 교육에 개입하거나 찾아오시지 않는 것이 제일 좋죠. 예전에는 치맛자락을 휘두르고 왔는데 요즘은 그럴 분도 안 계시고, 학교에 맡겼으면 학교에서 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믿어주시는 것이 좋죠.
학교에서 요청이 갈 때가 있을 거예요. 자녀가 제대로 안 하나 봐주세요 이런 거. 학교에서 가끔 아이들을 야단칠 수도 있어요. 야단치면 우리 애를 누가 야단쳤냐가 아니라, 왜 얘가 야단맞았는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되는 데 일단 와서 화부터 내는 분들이 많잖아요. 특히 강남이 그래요.
근데 여기는 야단을 쳐도 조용해요. 저희 때도 그랬죠. 맞으면 ‘네가 잘못했으니까 맞았겠지, 선생님이 이유 없이 때렸겠니?‘ 그랬죠. 요즘 매도 안 때리니까 얘네는 정말 뭐랄까요. '매 아끼면 애를 망친다'는데 전 그게 아주 뼈저려요. 집에서도 야단 안 맞지, 학교와도 야단 안 맞지, 얘네 잘못된 것을 뭐로 가르칠 거예요.
지금 학교에도 지금 학생 중에 정말 입에서 저놈 나중에 뭐가 될지 걱정되는 애들이 있어요. 그럼 걔네들은 내 인생이에요 하고 가버려요. 그래 네 인생이야 네가 케어를 안 받겠다는데 내가 왜 케어를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죠. 얘들 담임들은 더 미치죠. 선생님들이 붙잡고 얘길 안 하겠어요. 몇 번이고 가는데 얘들은 거부해요. 그럼에도 담임은 그걸 끝까지 놓칠 못하죠. ‘에잇, 네 맘대로 해라’가 안 되니까 가슴이 아프죠.
아이들이 선생님 마음을 10분의 1 만큼이라도 알아줘도 아마 이렇게 안 할 거예요. 부모 마음 알아주는 거와 똑같죠. 그죠?
Q. 동창회 활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동창회에서는 다양하게 하는데 일단은 총동창회가 있고 그 안에 장학회가 있고, 야구후원회 등 다양하게 있어요. 그런데 야구후원회는 동창회에서 지원하는 게 아니라 야구후원회에서 지원해요. 그러니까 동창회 돈이 들어올 때 야구후원회기금이냐 동창회 장학기금이냐, 이거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학교에 신입생들이 들어올 때 중학교에 홍보를 나가는데 중학교 성적으로 얼마 이상이다 그러면 졸업할 때까지 매 학기 얼마씩 주겠다, 매년 얼마씩 주겠다 그걸 동창회에서 지원하는 거예요. 동창회에서 주는 장학금인데 처음에는 그게 없었어요. 한 25년 전에 용산에 갔을 때 용산에서 그걸 하고 있더라고요. 이게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지 궁금했어요.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봤더니 경기고등학교는 돈이 많은 사람이 내지만, 용산고등학교는 돈이 많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든 동문이 십시일반이에요. 한 달에 만원씩 그냥 자동으로 이체해 버리는 거예요. 1년에 12만 원씩 계속 내는 거죠. 그게 백명이면 1200만원이고 매년 1200만원씩의 수익이 들어오면 고정비가 생기니까.
예전에 동창회 잠깐 만났을 때 용산은 이렇게 합디다 그런 방식의 작업을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여기는 ‘커피 한잔 경동사랑’이라고 그래요.
한 구좌가 3천 원이에요. 커피 한 잔 값 3천원만 한 잔씩만. 커피 한 잔 덜 먹고 그걸 자동이체 해달라. 저는 이제 여섯 잔이에요. 만 8천원. 매달 여기서 자동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잊어버리면 돼요. 기억에서 자동이체를 잊어버려라. 그럼 계속해서 가는 거니까 1만 8천원 한 달에 얼마 안 되잖아요. 여기서는 그 1만 8천원 열 명이면 18만 원이고, 100명이면 180만 원이 가는 거니까 그렇게 해라 에요. 그런 식으로 기금들이 조금씩 마련되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또 뒤늦게 재력 있는 분들이 조금씩 찬조해 주시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갖고 운영하고 있죠.
경동이 살아야 함께 사는 거니까 경동이란 뿌리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그렇게 해서 많이 하려고 애써요. 그래서 동창회에서 지원하는 게 꽤 되죠.
Q.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한 마음이 굉장히 강한 거 같아요. 선생님도 동문이자 선배로써 후배들을 위해 학교로 돌아오신 것도 있으신 거죠?
A. 다른 곳에 가려다가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친구들도 ‘야 그냥 갈 거면 경동가라. 거기서 끝내라 그래도 동기니까. 우리 동기 중에서 경동에서 끝내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경동에서 교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아마 제가 마지막 대 일거 같아요.
당장 이번 토요일 제가 말씀드린 음악제 하는데 저희 기수가 주축이 되어 합창지위, 무대 총감독 등을 다 하게 되었어요. 제가 경동을 나와서 경동에서 받은 사랑도 있고 경동이란 카테고리가 생각보다 끈끈하더라고요.
남자들 세계는 그렇잖아요.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 부대 어디 나왔어, 대학은 그다음이고 일단 제일 먼저는 고등학교 어디 나왔냐 에요. 고향이 어디냐 하면 ‘서울입니다’하면 그다음이 고등학교 어디 나왔어! 이렇게 묻거든요. 경동이라고 그러면 경동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뻗어있더라고요.
제가 근무했을 때 제 선배님들로 교장선생님만 벌써 두 분을 모셨고, 우연히 과 선배까지 되어서 이중삼중으로 고통 아닌 고통을 당했는데(웃음). 어쨌든 경동이란 인연이 뭐 100년 된 학교, 사립학교와는 또 다르지만 공립에서는 그래도 끈끈하지 않은가.
Q. 교직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은?
A. 제가 2002년은 고3 담임할 때 그 학생이 부반장이었는데 가끔 학교를 못 와요. 얘 사정을 알아요. 전화하면 ‘선생님 제가 조금 있다가 전화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전화를 끊어요. 부모의 가정불화로 이혼 직전인데 자기가 가운데서 양쪽 팔을 잡고 있다는 거예요. 얘가 학교를 수시로 못 나오니 나중에 출석 일수가 모자라서 늦게라도 온 거로 해야 해요. 출석 일수가 모자란 것은 순수결석이거든요. 그러니까 늦게라도 내게 얼굴 보여라, 조회 시간 이전에 왔다 가라 그러면 출석이에요. 그렇게 해서 얘를 졸업시켰어요. 어떻게든 졸업을 시켰는데 졸업식 날 되면 얘가 잘했던 못하던 부모님들이 오시잖아요. 그런데 얘는 아무도 안 왔어요. 아무도 안 오는 데 혼자 와서 엉엉 울고 저를 보더니 바닥에 엎드려 큰절하는 거예요.
“졸업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선생님을 만나면 무조건 엎드려서 절하는 거예요. 그 2월 달에. 졸업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했던 아이가 제일 기억나요.
또 한 아이는 여기서 가르쳤던 애인데 2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인데 멀대같은 애인데 요즘도 가끔 봐요. 저기 고대 안암 사거리 있죠? 병원 밑에 사거리. 거기 가면 유명한 통닭집이 있는데 그 집 사장 아들이에요. 지금도 가면 있어요. 저번에 선생님들 모시고 가서 전화했죠.
“야 너 바쁘냐?”
“선생님 어디세요?”
“아니 바쁘냐고.”
했더니 안 바쁘다며 뒤에 와서는 선생님 오신 줄 몰랐잖아요 그러면서 제가 따로 조그만 거 하나 드릴게요 하더군요. 그렇게 다들 잘되고 잘 사는 거 보면 좋고.
또 한 학생은 집이 좀 어려웠어요. 그때 제가 학생부에 있을 때이니까. 옛날에 머리 긴 놈들 머리 자르라고 바리깡으로 민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미는데 이놈은 한 달에 한 번 저에게 와서 돈이 없으니까 삭발해달라고 해요. 이발소 갈 돈도 없고, 긴 거 싫으니 삭발해달라는 거에요. 얘가 머리를 다쳐서 뇌 수술 자국이 있었는데 그거 상관없고 삭발해 달래요. 그래서 걔는 일 년에 나한테 다섯 번을 왔나?
나중에 이 녀석과 뒤늦게 연락이 됐어요 우리 반도 아니야.
“근데 저 기억 나세요?”
“어 그럼 기억나지.”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을 먹고 싶습니다.”
그러는 거에요. 저에게 20년 후배에요. 십몇 년 전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는데, 애가 장애인택시 운전을 했었어요. 장애인택시는 얼마 동안 무사고이면 개인택시 면허를 줘요 그래서 얘가 의정부에서 개인택시를 시작했어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러면 기분 좋죠.
아주 부자가 된 애들이 아니라 열심히 사는 애들이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아까 졸업식 때 인사하고 절하고 갔던 애는 연락할 수가 없어요. 한번 찾아볼까 생각 중인데 이름도 특이해서. 한번 찾아봐야죠.
Q. 마지막으로 남겨주실 말씀은?
A. 여기 있는 학생들에게 말하자면 얘네들은 제 후배이자 제자잖아요. 이 관계는 생각보다 쉽진 않아요. 후배이자 제자니까 제자라는 입장도 있고, 후배라는 입장도 있고.
저는 얘네들이 뭘 하든지 열심히만 했으면 해요. 어제 책을 읽다 보니까 부와 명예를 탐하는 건 문제가 안 돼요. 그걸 가지려고 노력하는 건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거지. 근데 그게 정도를 벗어나서 난다면 그건 분명한 문제가 돼요.
내가 여기서 사는 동안에 어디 좋은 대학 가는 건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열심히 살면서 정상적으로 살면서 도리를 다하고 정도에 맞게끔 해서.
혼자만 가지려면 안 돼요. 우리 옛말에 ‘배워서 남 주냐’고 하는데 남 주지 않을 거 뭣 하러 배워요. 배워서 남 줘야지. 배워서 남을 주고 같이 사는 생활을 했으면 좋겠고.
성북구민들이 보신다면 성북구민들에게는 이 경동고등학교는 성북구에서 제일 오래된 전통 있는 학교에요. 이 학교가 나름대로 가진 입지가 있어요. 지금 여기 졸업생들이 대부분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성북구민 중에 경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래서 관심 좀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구에 정말 명문 고등학교, 명문이란 게 대학을 잘 보내는 게 명문이 아니라 여기 나온 사람들이 바르고 올바르게 자라면 그게 명문이죠. 그렇게 돼야 될 것 같아요.
저는 경남 거창에 거창고등학교 얘기를 가끔 얘기해주는데 거기는 돈 버는 직업, 명예를 갖는 직업에는 가지 말라고 해요.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라 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에요. 돈을 버는 건 좋아, 정상적으로. 내가 권력을 갖는 거 좋아, 정상적으로. 남을 밟고 남을 해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에게 눈물 나게 하면서 그렇게 성장한다면 절대 좋은 게 아니니까 베풀고 나누면서 같이 커가야죠. 그게 제일 중요할 거 같아요. 성북구도 그래야 좋은 동네 되는거 아니에요?
제일 좋은 동네가 뭐에요. 사람 살기 좋은 동네죠. 사람 살기 좋은 동네가 어디예요. 서로 이웃 안 헤치고 서로 도와주는 동네가 좋은 동네잖아요. 부자 동네는 그리 좋은 동네가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성북구가 전 좋아요. 제가 성북구 출신은 아니지만.
저는 학생으로서 선생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성북구에서 보내신 거 같아요.
내 인생을 세워나가는 시기, 인생을 중간쯤 점검했을 삼십 대 중후반, 오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로 넘어오면서.
교직으로는 마지막까지 여기서 할 수 있었다는 게 도움이죠. 그래서 이래저래 동문 행사나 무엇이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움이 되려고 해요. 이번 축제 때도 저를 갈구려고 작정했어요.
“축제 때 선생님 여기 출연 좀 해주세요.”
“노래 부르는 거만 아니면 돼“
“노래 부르는 거 안 시킬게요.”
“춤추는 거 아니지?“
“예! 그냥 토크쇼 하는 거예요.”
“오케오케.“
그랬는데 보니까 나락 퀴즈쇼요? 요즘 뜨는 거요.
지금 2학년 애들이 제가 작년에 담임했던 애들이거든요. 뭐 한번 망가져주면 되죠. 망가져주면 좋아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번 주가 제일 바쁜 주입니다. 금요일 학교 축제, 토요일 합창 음악제, 저는 양쪽을 다해야 하고. 아까 보셨잖아요? 악보 칠하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