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성북구 보문동 지역에 있던 교육시설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교육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던 1920년대, 이준열과 최의창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구상하다 당시 『조선일보』사장이었던 남궁억을 만나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고학당 설립계획을 세웠다. 종로경찰서의 방해로 설립 자금을 빼앗기며 고초를 겪었으나 이준열이 자신의 가옥을 처분해 한일은행 건물을 임대하여 1923년 5월 개교하였다. 하지만 한일은행이 건물을 매각하였고, 10월에 신설리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실을 빌려 이전하였다. 1924년에는 학교 근처에 고무공장을 유치하여 학생들이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고학당의 자치활동이 일제의 표적이 되어 1931년 강제 해산되었다.
무산자 교육기관 고학당苦學堂
일제강점기 신설리에서 일어난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923년 10월부터 1926년 초까지 있었던 고학당苦學堂의 설립이다. 고학당은 1923년 이준열李駿烈의 계획에서 시작했다. 이준열은 1889년 충남 아산군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1911년 상경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닐 무렵인 1919년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인물이었다.
3 · 1운동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 동창생인 최의창崔毅昌과 함께 대중 교육사업을 구상하던 이준열은 대구에서 대한광복회 회장이었던 박상진의 아들인 박응수로부터 사업자금을 얻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돈을 얻게 된 이준열은 곧바로 상경하여 『조선일보』 사장인 남궁억을 만났다. 남궁억과 논의한 끝에 이준열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고학당 설립 계획을 세웠다. 이준열은 고학당 설립 취지에 대해 “학생이 공부하기 힘든 때이니, 전부 경비로 삼아 학교를 설립하고, 고학생을 수학하고 생활하게 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고학당의 개교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종로경찰서는 고학당 설립 자금의 일부가 대한광복회 회장 박상진의 운동자금이었다는 것을 포착하고 이것을 문제 삼았다. 곧바로 고학당 설립 자금 일체를 압수하고 설립 계획을 세웠던 이준열을 조사했다. 설립 자금 일체를 빼앗긴 이준열은 자신의 가옥을 처분해 학교 설립 경비를 마련했고 한일은행 소유의 건물을 임대해 교사로 삼았다. 이준열의 희생으로 간신히 고학당은 1923년 5월 2일 개교할 수 있었다.
입학금과 월사금의 부담없이 무상제로 운영되는 ‘무산자 중등학교’라는 전례없는 학교였던 고학당은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왔다. 1923년 제1회 모집 당시 입학정원에 5배가 넘는 500명의 사람들이 지원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고학당에 지원했다. 그만큼 당시 민중들은 교육에 목말라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상당한 비용이 들었던 교육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대다수 민중들에게 사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적인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교육에 대한 욕구는 억누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학생苦學生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대 대부분의 고학생들은 우유 배달업소, 신문 배달업소, 여관, 이발소에서 노동을 하며 취업과 숙박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공부를 위해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일을 해도 상당한 비용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고학생들은 도시 하층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사설기관이나 강습소 같은 ‘주변부’ 교육시설에 취학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입학금과 월사금이 면제되는 고학당에 고학생을 비롯한 많은 민중들이 호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23년 5월 개교 직후 고학당은 우선 학생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학교 운영비를 조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고학당은 외부로부터 재정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재정 조달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고학당에서는 집단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학교재정을 전담할 기구로 ‘고학당협회苦學堂協會를 발족했다. 협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교사들이었으며 학생들 역시 학우회를 매개로 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학당협회는 안정적인 학교재정 조달을 위해 빵공장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학당의 재정난은 여전했다. 고학당은 없어질 때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설립인가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고학당협회를 통해 빵공장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재정난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학당 측은 재정난 타개를 위해 1923년 6월 18일부터 공평동 야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야시장 사업은 부족한 경험과 미숙한 회계처리, 잦은 도난사고 등을 겪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야시장에서의 실패는 고스란히 고학당의 재정난으로 돌아왔다. 설강가상으로 훈정동에 마련한 교사가 강제철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건물주였던 한일은행이 사전통보 없이 일본인에게 건물을 매각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수업 도중에 철거 용역이 들이닥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고학당은 새로운 곳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학당은 잠시 가회동 천도 교당에 임시 교실을 마련했다가 10월 무렵 동대문 밖 신설리로 이동했다.
고학당이 정착한 곳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실이었던 곳으로 과거 도축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신설리에 정착한 고학당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실 건물을 개조해 교실로 사용했다. 교실에는 바닥에 긴 나무 걸상을 놓고 수업을 진행했는데, 밤이 되면 교실은 학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가 됐다. 그러나 공간 부족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은 다른 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학생 가운데 남성들은 효자동 갈돕회 기숙사에서, 여성들은 안국동 상조회 기숙사에서 머무르며 통학했다.
한편 교사에 머무르던 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고투를 벌여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추위였다. 쫓겨나듯 옮긴 처지에 변변한 방한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멘트 바닥에 볏집을 올려두었지만 냉기와 습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날이 추워지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결국 학생들은 월동준비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학교 뒤편에 움막집을 지어서 숙식을 해결했다.34 움집은 간신히 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었지만 공간이 협소하여 생활하기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고학당은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고학당 구성원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들은 학생들의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만두 장사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여가시간을 이용해 부근의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학당 구성원들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무산자 교육기관 고학당苦學堂
일제강점기 신설리에서 일어난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923년 10월부터 1926년 초까지 있었던 고학당苦學堂의 설립이다. 고학당은 1923년 이준열李駿烈의 계획에서 시작했다. 이준열은 1889년 충남 아산군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1911년 상경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닐 무렵인 1919년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인물이었다.
3 · 1운동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 동창생인 최의창崔毅昌과 함께 대중 교육사업을 구상하던 이준열은 대구에서 대한광복회 회장이었던 박상진의 아들인 박응수로부터 사업자금을 얻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돈을 얻게 된 이준열은 곧바로 상경하여 『조선일보』 사장인 남궁억을 만났다. 남궁억과 논의한 끝에 이준열은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고학당 설립 계획을 세웠다. 이준열은 고학당 설립 취지에 대해 “학생이 공부하기 힘든 때이니, 전부 경비로 삼아 학교를 설립하고, 고학생을 수학하고 생활하게 하는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고학당의 개교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종로경찰서는 고학당 설립 자금의 일부가 대한광복회 회장 박상진의 운동자금이었다는 것을 포착하고 이것을 문제 삼았다. 곧바로 고학당 설립 자금 일체를 압수하고 설립 계획을 세웠던 이준열을 조사했다. 설립 자금 일체를 빼앗긴 이준열은 자신의 가옥을 처분해 학교 설립 경비를 마련했고 한일은행 소유의 건물을 임대해 교사로 삼았다. 이준열의 희생으로 간신히 고학당은 1923년 5월 2일 개교할 수 있었다.
입학금과 월사금의 부담없이 무상제로 운영되는 ‘무산자 중등학교’라는 전례없는 학교였던 고학당은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왔다. 1923년 제1회 모집 당시 입학정원에 5배가 넘는 500명의 사람들이 지원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고학당에 지원했다. 그만큼 당시 민중들은 교육에 목말라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들은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상당한 비용이 들었던 교육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대다수 민중들에게 사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적인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교육에 대한 욕구는 억누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학생苦學生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대 대부분의 고학생들은 우유 배달업소, 신문 배달업소, 여관, 이발소에서 노동을 하며 취업과 숙박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공부를 위해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일을 해도 상당한 비용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고학생들은 도시 하층민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사설기관이나 강습소 같은 ‘주변부’ 교육시설에 취학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입학금과 월사금이 면제되는 고학당에 고학생을 비롯한 많은 민중들이 호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23년 5월 개교 직후 고학당은 우선 학생들의 숙식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학교 운영비를 조달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고학당은 외부로부터 재정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재정 조달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고학당에서는 집단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학교재정을 전담할 기구로 ‘고학당협회苦學堂協會를 발족했다. 협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교사들이었으며 학생들 역시 학우회를 매개로 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학당협회는 안정적인 학교재정 조달을 위해 빵공장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학당의 재정난은 여전했다. 고학당은 없어질 때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설립인가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고학당협회를 통해 빵공장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재정난을 타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학당 측은 재정난 타개를 위해 1923년 6월 18일부터 공평동 야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야시장 사업은 부족한 경험과 미숙한 회계처리, 잦은 도난사고 등을 겪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야시장에서의 실패는 고스란히 고학당의 재정난으로 돌아왔다. 설강가상으로 훈정동에 마련한 교사가 강제철거되는 일이 발생했다. 건물주였던 한일은행이 사전통보 없이 일본인에게 건물을 매각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수업 도중에 철거 용역이 들이닥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고학당은 새로운 곳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학당은 잠시 가회동 천도 교당에 임시 교실을 마련했다가 10월 무렵 동대문 밖 신설리로 이동했다.
고학당이 정착한 곳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실이었던 곳으로 과거 도축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신설리에 정착한 고학당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실 건물을 개조해 교실로 사용했다. 교실에는 바닥에 긴 나무 걸상을 놓고 수업을 진행했는데, 밤이 되면 교실은 학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가 됐다. 그러나 공간 부족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은 다른 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학생 가운데 남성들은 효자동 갈돕회 기숙사에서, 여성들은 안국동 상조회 기숙사에서 머무르며 통학했다.
한편 교사에 머무르던 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고투를 벌여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추위였다. 쫓겨나듯 옮긴 처지에 변변한 방한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멘트 바닥에 볏집을 올려두었지만 냉기와 습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날이 추워지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결국 학생들은 월동준비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학교 뒤편에 움막집을 지어서 숙식을 해결했다.34 움집은 간신히 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었지만 공간이 협소하여 생활하기 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고학당은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고학당 구성원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들은 학생들의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만두 장사를 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여가시간을 이용해 부근의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학당 구성원들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한편 고학당협회를 중심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전개됐다. 노력은 곧 결실을 맺었다. 1924년 봄 조선인 자본가 백인기 씨와 계약을 체결하여 학교 근처에 서울고무공장을 유치한 것이다. 이를 통해 100명의 학생들이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한 학생들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오후에는 학습을 병행했다. 학생들의 한 달 임금은 30원 수준으로 1920년대 조선인 성인노동자들의 평균임금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고학당 학생들의 고용문제와 함께 학교의 재정문제 역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재정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자 고학당은 각종 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고학당학우회 주최로 지방순회연극회를 개최했고, 1924년 8월에는 고학당의 교지인 『고학苦聲』을 창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노동야학기관인 광성학원光星學院을 부설하면서 동대문 일대의 빈민 계층을 상대로 무상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고학당 구성원들의 노력에 인근 동리 사람들도 고학당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고학당의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설리 시절을 거치며 고학당은 명실상부한 무산자 교육기관이자 중등학교로서 입지를 다졌다. 1925년 제3기 입학생을 모집할 당시 고학당의 학생수는 200~300명에 달했다. 이처럼 고학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고학당만의 독특한 학교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학당은 학생이 단순하게 수업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참여를 보장했다. 개교 당시부터 학생들이 고학당협의회에 참여하며 학교 운영에 관계했을 뿐만 아니라 1928년부터는 전면적으로 학생자치제가 실시되어 교양과 운동, 서무, 재부의 각 부서 등이 학생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모든 구성원이 학교운영과 재정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고학당의 민주적인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학교 운영과 사업에 참여하는 분위기는 고학당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노동과 학습의 병행’도 고학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많은 교육기관들이 만들어졌지만 학교 차원에서 ‘노동과 학습의 병행’을 강조했던 것은 고학당이 유일했다. 이런 고학당의 분위기는 고학당 학우회의 깃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학당 학우회는 펜촉과 도끼가 X자 형태로 교차하는 문양을 깃발에 사용했다. 이것은 노동을 상징하는 도끼와 지식을 상징하는 펜촉을 겹쳐 놓은 것으로 고학당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과 교육의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노동자들도 언제든지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고학당 학생들 역시 일반 노동자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 것이다. 높게만 보였던 교육의 담벼락을 낮춤으로써 다수의 민중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 이것이 고학당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학교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더 이상 신설리에 마련한 움집교실은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고학당은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925년 4월 고학당협회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신교사 설립 사업을 추진했다. 먼저 충북 지역의 유지로부터 자산을 기부받아 숭인동에 새로운 교사 부지를 마련했다. 학생들은 하기 방학을 맞아 전국 순회강연회를 개최하면서 교사 공사비를 모았다. 물론 시공비가 부족해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새롭게 마련한 교사는 200명의 학생을 수용할 만한 방 12칸과 80평의 기숙사와 6개의 교실, 사무실, 부속실, 화장실, 이발소, 취사장, 인쇄소등이 갖춰진 곳이었다.43 어엿한 학교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고학당을 후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유지 15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고학당유지회가 만들어졌다. 대내외적으로 고학당의 위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교사를 이전한 후 고학당은 무산자 교육기관으로서 더 계급적인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학당의 구성원들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서울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고학당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던 이준열이 ‘서울파’에 가담했고,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도 다수도 ‘서울파’ 세력에 가담했다. 1927년 2월 교장의 집에서 조선학생혁명당이 결성됐고 이 조직은 1929년 3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편됐다. 고학당 구성원들이 중심이 됐던 조선학생전위동맹은 1929년 9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서울지역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주도세력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학생비밀결사 운동에서 고학당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학당의 이런 활동은 일제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일제는 1929년 서울지역 학생시위를 계기로 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결합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특히 무산자 교육기관으로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주의 학생비밀결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고학당은 일제의 목표가 되기 충분했다. 일제는 고학당을 ‘극좌파 학생들의 아지트’라 파악하고 고학당을 폐쇄시켰다. 교사와 학생들은 다시 학교 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31년 7월 8일 “무산학생 교양소로서 존재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교사와 학생들의 울분과 비분강개 속에 고학당은 강제 해산되었다.
한편 고학당협회를 중심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전개됐다. 노력은 곧 결실을 맺었다. 1924년 봄 조선인 자본가 백인기 씨와 계약을 체결하여 학교 근처에 서울고무공장을 유치한 것이다. 이를 통해 100명의 학생들이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한 학생들은 낮에는 노동을 하고 오후에는 학습을 병행했다. 학생들의 한 달 임금은 30원 수준으로 1920년대 조선인 성인노동자들의 평균임금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고학당 학생들의 고용문제와 함께 학교의 재정문제 역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재정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자 고학당은 각종 사업들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고학당학우회 주최로 지방순회연극회를 개최했고, 1924년 8월에는 고학당의 교지인 『고학苦聲』을 창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노동야학기관인 광성학원光星學院을 부설하면서 동대문 일대의 빈민 계층을 상대로 무상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고학당 구성원들의 노력에 인근 동리 사람들도 고학당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고학당의 노력과 헌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설리 시절을 거치며 고학당은 명실상부한 무산자 교육기관이자 중등학교로서 입지를 다졌다. 1925년 제3기 입학생을 모집할 당시 고학당의 학생수는 200~300명에 달했다. 이처럼 고학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고학당만의 독특한 학교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학당은 학생이 단순하게 수업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참여를 보장했다. 개교 당시부터 학생들이 고학당협의회에 참여하며 학교 운영에 관계했을 뿐만 아니라 1928년부터는 전면적으로 학생자치제가 실시되어 교양과 운동, 서무, 재부의 각 부서 등이 학생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모든 구성원이 학교운영과 재정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고학당의 민주적인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학교 운영과 사업에 참여하는 분위기는 고학당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노동과 학습의 병행’도 고학당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많은 교육기관들이 만들어졌지만 학교 차원에서 ‘노동과 학습의 병행’을 강조했던 것은 고학당이 유일했다. 이런 고학당의 분위기는 고학당 학우회의 깃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학당 학우회는 펜촉과 도끼가 X자 형태로 교차하는 문양을 깃발에 사용했다. 이것은 노동을 상징하는 도끼와 지식을 상징하는 펜촉을 겹쳐 놓은 것으로 고학당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과 교육의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노동자들도 언제든지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고학당 학생들 역시 일반 노동자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 것이다. 높게만 보였던 교육의 담벼락을 낮춤으로써 다수의 민중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열어주었던 것, 이것이 고학당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학교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더 이상 신설리에 마련한 움집교실은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고학당은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925년 4월 고학당협회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신교사 설립 사업을 추진했다. 먼저 충북 지역의 유지로부터 자산을 기부받아 숭인동에 새로운 교사 부지를 마련했다. 학생들은 하기 방학을 맞아 전국 순회강연회를 개최하면서 교사 공사비를 모았다. 물론 시공비가 부족해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새롭게 마련한 교사는 200명의 학생을 수용할 만한 방 12칸과 80평의 기숙사와 6개의 교실, 사무실, 부속실, 화장실, 이발소, 취사장, 인쇄소등이 갖춰진 곳이었다.43 어엿한 학교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고학당을 후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유지 15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고학당유지회가 만들어졌다. 대내외적으로 고학당의 위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교사를 이전한 후 고학당은 무산자 교육기관으로서 더 계급적인 색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학당의 구성원들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서울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고학당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던 이준열이 ‘서울파’에 가담했고,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도 다수도 ‘서울파’ 세력에 가담했다. 1927년 2월 교장의 집에서 조선학생혁명당이 결성됐고 이 조직은 1929년 3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편됐다. 고학당 구성원들이 중심이 됐던 조선학생전위동맹은 1929년 9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서울지역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주도세력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학생비밀결사 운동에서 고학당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학당의 이런 활동은 일제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일제는 1929년 서울지역 학생시위를 계기로 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결합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특히 무산자 교육기관으로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주의 학생비밀결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고학당은 일제의 목표가 되기 충분했다. 일제는 고학당을 ‘극좌파 학생들의 아지트’라 파악하고 고학당을 폐쇄시켰다. 교사와 학생들은 다시 학교 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1931년 7월 8일 “무산학생 교양소로서 존재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교사와 학생들의 울분과 비분강개 속에 고학당은 강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