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성북로14길 35-2(성북동 145-52)의 염상섭이 살았던 장소이다. 염상섭이 죽은 후 3년 만에 개축하였고 주인도 몇 차례 바뀌었기 때문에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염상섭(1897-1963)은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의 청개구리”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고, 『만세전』, 『삼대』, 『이심』 등의 소설을 통해 일제 식민지하의 우리나라 상황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했다. 염상섭은 민족의 수난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했으며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리얼리즘에 착안함으로써 한국소설의 한 장을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유학하였고, 만주로 떠났다가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와서 상도동, 삼양동을 거치다 직장암으로 세상을 뜨기 전 2년을 살았던 곳이 바로 성북동이었다.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 (16) 횡보 염상섭 말년 보낸 성북동 자택
작고 3년 뒤 개축…자취 찾을 길 없어
문학사 중요한 위치 불구 기념비조차 안세워
올 탄생 100년 …생애·작품세계 재조명 시급
올해는 우리문단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橫步(횡보) 廉想涉(염상섭)(1897-1963·본명 尙燮(상섭))이 태어난지 꼭 100년 되는 해. 횡보는 채만식과 더불어 리얼리즘 문학의 양대 봉우리로 평가받고 있다.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그는 「만세전」 「삼대」 「이심」 등의 소설을 통해 일제 식민지하의 우리나라 상황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했다. 횡보는 민족의 수난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했으며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리얼리즘에 착안함으로써 한국소설의 한 장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술과 글만을 벗하고 살았던 쓸쓸한 것이었다. 횡보가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그 흔한 기념비나 동상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도 안타까운 감을 더해준다.
횡보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구한말 「띳굴」이라 불렸던 서울의 중심지역. 「띳굴」의 현재 지명을 두고 연구서마다 필운동이니 수송동이니 해석이 달랐으나 서울시청에 확인한 결과 종로구 적선동인 것으로 드러났다.
생가의 정확한 주소는 유족조차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횡보의 생애를 연구한 서울대 金允植(김윤식)교수는 족보까지 뒤져봤으나 주소가 지재돼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방에 비해 모습이 급격하게 변한 서울에서 100년 전의 자취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함께 횡보가 유난히 거주지를 자주 옮겼던 것도 유품이나 유물이 전무한 이유 중 하나다. 젊은 시절 일본을 자주 오가며 외국문물을 익힌 횡보는 마흔살 되던 해 가독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10년간 타지생활을 했다.
해방을 맞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그에게는 말 그대로 딸린 입과 부엌살림도구밖에 없었다.
둘째딸 喜英(희영)씨(58)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횡보가 귀국 후 곧바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창산선물이었는지 연말이라 그랬는지 하여간 신문사에서 고구마 한 궤짝을 보내왔습니다. 고구마를 아껴 먹고 난 뒤 궤짝을 밥상으로, 책상으로 요긴하게 썼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선집 출판을 위해 애쓰기는 커녕 원고조차 정리해두지 않았을 만큼 세상일에 초연했던 횡보. 서울로 돌아온 뒤 틈틈이 쓴 글조차 6.25전쟁통에 상당부분 유실됐고 상도동에서 삼양동으로, 삼양동에서 성북동으로 이어졌던 이삿짐 행렬 속에서 나머지 원고마저 사라졌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성북구 성북동 145-52. 직장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2년 여간 살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3통 3반이라는 꼬리표만 붙어있을 뿐 옛날 주소 그대로 쓰이고 있다. 스카이웨이를 뒤로한 성북동 골짜기의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홍익대부속중 정문에서 5분 거리에 횡보가 임종한 집이 나타난다.
84평 대지에 조경이 잘 된 2층 양옥집.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具京會(구경회)씨(60)는 11년 전 이 집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당시 전주인은 지은 지 20년 된 집이라 했다는 것. 그렇다면 횡보가 사망한 해로부터 3년 뒤 개축한 집이라는 얘기다. 몇 해 전 출판사인가 방송사에서 찾아와 이 집에 염상섭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뿐 이사올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이집 안주인의 말이다. 횡보는 150여 편의 소설과 100여 편의 평론, 수필 50여 편 등 500여 편의 글을 남겼다. 분실된 원고가 그토록 많다고 하니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학세계를 짐작케 한다. 원고를 쓸 기력이 없었던 노년에도 횡보는 딸이나 아들에게 구술해 대필하도록 했을 정도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이웃 동네의 문패를 일일이 살피며 항렬까지 신경쓸 만큼 세심한 작가였다.
金(김)교수는 풍부한 어휘와 꼼꼼한 기술, 객관적인 시각에 있어 그를 따를 만한 작가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서울 토박이 언어로 30년대 중산층 생활을 그린 「삼대」는 어떤 역사서나 논문보다도 가치있는 기록이라는 설명이다.
「횡보」라는 호가 말해주듯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던 문인, 임종직전 정종 세 숟가락을 마신 후에야 편안히 눈을 감았던 酒仙(주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촌지에 지나칠 정도로 결벽했던 신문기자. 30, 40년대 문학유산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한편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많은 독자에게 알린다는 의미에서라도 문학상 제정이나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한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이 시급한 실정이다.
<박신연 기자>
『경향신문』 1996. 7. 28.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 (16) 횡보 염상섭 말년 보낸 성북동 자택
작고 3년 뒤 개축…자취 찾을 길 없어
문학사 중요한 위치 불구 기념비조차 안세워
올 탄생 100년 …생애·작품세계 재조명 시급
올해는 우리문단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橫步(횡보) 廉想涉(염상섭)(1897-1963·본명 尙燮(상섭))이 태어난지 꼭 100년 되는 해. 횡보는 채만식과 더불어 리얼리즘 문학의 양대 봉우리로 평가받고 있다.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그는 「만세전」 「삼대」 「이심」 등의 소설을 통해 일제 식민지하의 우리나라 상황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했다. 횡보는 민족의 수난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했으며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리얼리즘에 착안함으로써 한국소설의 한 장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술과 글만을 벗하고 살았던 쓸쓸한 것이었다. 횡보가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그 흔한 기념비나 동상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도 안타까운 감을 더해준다.
횡보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구한말 「띳굴」이라 불렸던 서울의 중심지역. 「띳굴」의 현재 지명을 두고 연구서마다 필운동이니 수송동이니 해석이 달랐으나 서울시청에 확인한 결과 종로구 적선동인 것으로 드러났다.
생가의 정확한 주소는 유족조차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횡보의 생애를 연구한 서울대 金允植(김윤식)교수는 족보까지 뒤져봤으나 주소가 지재돼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방에 비해 모습이 급격하게 변한 서울에서 100년 전의 자취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함께 횡보가 유난히 거주지를 자주 옮겼던 것도 유품이나 유물이 전무한 이유 중 하나다. 젊은 시절 일본을 자주 오가며 외국문물을 익힌 횡보는 마흔살 되던 해 가독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10년간 타지생활을 했다.
해방을 맞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그에게는 말 그대로 딸린 입과 부엌살림도구밖에 없었다.
둘째딸 喜英(희영)씨(58)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횡보가 귀국 후 곧바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창산선물이었는지 연말이라 그랬는지 하여간 신문사에서 고구마 한 궤짝을 보내왔습니다. 고구마를 아껴 먹고 난 뒤 궤짝을 밥상으로, 책상으로 요긴하게 썼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선집 출판을 위해 애쓰기는 커녕 원고조차 정리해두지 않았을 만큼 세상일에 초연했던 횡보. 서울로 돌아온 뒤 틈틈이 쓴 글조차 6.25전쟁통에 상당부분 유실됐고 상도동에서 삼양동으로, 삼양동에서 성북동으로 이어졌던 이삿짐 행렬 속에서 나머지 원고마저 사라졌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성북구 성북동 145-52. 직장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2년 여간 살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3통 3반이라는 꼬리표만 붙어있을 뿐 옛날 주소 그대로 쓰이고 있다. 스카이웨이를 뒤로한 성북동 골짜기의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홍익대부속중 정문에서 5분 거리에 횡보가 임종한 집이 나타난다.
84평 대지에 조경이 잘 된 2층 양옥집.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具京會(구경회)씨(60)는 11년 전 이 집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당시 전주인은 지은 지 20년 된 집이라 했다는 것. 그렇다면 횡보가 사망한 해로부터 3년 뒤 개축한 집이라는 얘기다. 몇 해 전 출판사인가 방송사에서 찾아와 이 집에 염상섭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뿐 이사올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이집 안주인의 말이다. 횡보는 150여 편의 소설과 100여 편의 평론, 수필 50여 편 등 500여 편의 글을 남겼다. 분실된 원고가 그토록 많다고 하니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학세계를 짐작케 한다. 원고를 쓸 기력이 없었던 노년에도 횡보는 딸이나 아들에게 구술해 대필하도록 했을 정도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이웃 동네의 문패를 일일이 살피며 항렬까지 신경쓸 만큼 세심한 작가였다.
金(김)교수는 풍부한 어휘와 꼼꼼한 기술, 객관적인 시각에 있어 그를 따를 만한 작가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서울 토박이 언어로 30년대 중산층 생활을 그린 「삼대」는 어떤 역사서나 논문보다도 가치있는 기록이라는 설명이다.
「횡보」라는 호가 말해주듯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던 문인, 임종직전 정종 세 숟가락을 마신 후에야 편안히 눈을 감았던 酒仙(주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촌지에 지나칠 정도로 결벽했던 신문기자. 30, 40년대 문학유산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한편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많은 독자에게 알린다는 의미에서라도 문학상 제정이나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한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이 시급한 실정이다.
<박신연 기자>
『경향신문』 1996.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