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돈암동의 주거변화에 관련된 내용이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로 인구가 몰려들어 형성된 영세도시민의 움막 등 토막촌을 일제는 교외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곳이 성북의 토막민 수용지로서 돈암동 지역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돈암지구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토막민들은 다시 쫓겨나고 개발된 주택지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해방 이후 성북구에서도 일찍부터 인구가 늘어나고 번화한 지역으로 성장했고, 돈암동으로부터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이 분리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아파트 중심의 주거환경으로 변모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또 다른 현실은 많은 영세 도시민(都市民)이 살고있던 토막촌에서도 찾을 수 있다. 토막촌은 각종 재난으로 가진 것을 잃은 사람들이 시내와 교외 근방의 제방, 강바닥, 다리 밑에 초라한 움막을 지어놓고 모여 살던 부락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일제는 교외지역이던 성북에 토막민 수용지(收用地)를 설정하여 토막민들을 이곳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1942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태평양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일제가 토막민들을 북해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또 다른 현실은 많은 영세 도시민(都市民)이 살고있던 토막촌에서도 찾을 수 있다. 토막촌은 각종 재난으로 가진 것을 잃은 사람들이 시내와 교외 근방의 제방, 강바닥, 다리 밑에 초라한 움막을 지어놓고 모여 살던 부락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일제는 교외지역이던 성북에 토막민 수용지(收用地)를 설정하여 토막민들을 이곳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은 1942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태평양전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일제가 토막민들을 북해도 등지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4년 전 부역확장이 된 이후 인구가 급작이 늘게 되어 주택난은 더한층 심각하게 되었는데 방금 토지구획정리를 하고 있는 돈암정 안암정 신설정 등지에 있는 지주들이 주택지분양조합을 조직한 후 일반부민에게 주택지를 헐값으로 나누어 주기로 되었는데 10일부터 그 사무를 개시하였다. 당분간은 시가보다 2할 5부나 싼값으로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획정리구의 토지를 비싼 값으로 매매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는 온당치 못한 거간들을 막기 위하여 토지 상담소를 두고 주택지 매매에 알선을 하기로 되었는데 이번 전기 세 정의 주택지도 거간을 사이에 두지 말고 직접 경성부청이나 조합사무소로 문의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돈암.안암.신설 3정町, 주택지분양개시, 부청이나 주택조합에서 간선>
매일신보. 1939.04.11
4년 전 부역확장이 된 이후 인구가 급작이 늘게 되어 주택난은 더한층 심각하게 되었는데 방금 토지구획정리를 하고 있는 돈암정 안암정 신설정 등지에 있는 지주들이 주택지분양조합을 조직한 후 일반부민에게 주택지를 헐값으로 나누어 주기로 되었는데 10일부터 그 사무를 개시하였다. 당분간은 시가보다 2할 5부나 싼값으로 제공하기로 되었는데 경성부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획정리구의 토지를 비싼 값으로 매매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는 온당치 못한 거간들을 막기 위하여 토지 상담소를 두고 주택지 매매에 알선을 하기로 되었는데 이번 전기 세 정의 주택지도 거간을 사이에 두지 말고 직접 경성부청이나 조합사무소로 문의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돈암.안암.신설 3정町, 주택지분양개시, 부청이나 주택조합에서 간선>
매일신보. 1939.04.11
도시빈민층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자 1930년대 경성부는 궁여지책으로 도시외곽 지역에 토막민을 집단 수용하였는데, 돈암동에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등짐이나 품팔이로 하루벌이조차 힘들었던 사람들은 개천이나 다리, 성벽 밑, 묘지와 화장장 등 가리지 않고 집을 지었다. 논이 있던 창동 일대에서 볏짚묶음을 구해 지은 맞배지붕의 토막집은 겨우 바람만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집이었다.
도시빈민층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자 1930년대 경성부는 궁여지책으로 도시외곽 지역에 토막민을 집단 수용하였는데, 돈암동에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등짐이나 품팔이로 하루벌이조차 힘들었던 사람들은 개천이나 다리, 성벽 밑, 묘지와 화장장 등 가리지 않고 집을 지었다. 논이 있던 창동 일대에서 볏짚묶음을 구해 지은 맞배지붕의 토막집은 겨우 바람만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집이었다.
지붕을 이으려고 이엉이라는 볏짚묶음을 미아리 고개에서 굴려서 내려왔거든. 그러니까 농사를 짓는 창동 일대에서 볏짚이 나온 것을. 다른 데는 소달구지로 되는데 고개는 안 되니까 고개까지 지고 와서 굴려가지고 내려갔다고. 지금 우촌초등학교 그 기슭에 더구나 동북쪽이기 때문에 더 열악하다고. 지금 우리 앉아 있는 여기도(미아리고개) 해당지역이고. 태극당 뒷골목, 돈암초등학교 빼고는 나머지 전부 다 라고 봐야해.
-주민 인터뷰-
지붕을 이으려고 이엉이라는 볏짚묶음을 미아리 고개에서 굴려서 내려왔거든. 그러니까 농사를 짓는 창동 일대에서 볏짚이 나온 것을. 다른 데는 소달구지로 되는데 고개는 안 되니까 고개까지 지고 와서 굴려가지고 내려갔다고. 지금 우촌초등학교 그 기슭에 더구나 동북쪽이기 때문에 더 열악하다고. 지금 우리 앉아 있는 여기도(미아리고개) 해당지역이고. 태극당 뒷골목, 돈암초등학교 빼고는 나머지 전부 다 라고 봐야해.
-주민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