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삼선교로4나길 19(삼선동 1가 산1-13)에 위치한 조선말 삼군부의 청사 건물이다. 삼군부는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설치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부기구이다. 총무당은 삼군부의 중심건물인데, 1868년 처음 건축되었을 때의 위치는 현재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193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은 당시 무신이자 외교가였던 신헌(申櫶)의 글씨이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의 중심 건물이다. 본래 정부종합청사 자리(세종로 50번지)에 위치했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 직업 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간, 측면 4간으로 중앙 정면 3간, 측면 2간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원문에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라고 되었있으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가 1978년 이므로, 선후 관계에 대한 서술이 잘못된 것으로 파악된다.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의 중심 건물이다. 본래 정부종합청사 자리(세종로 50번지)에 위치했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 직업 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간, 측면 4간으로 중앙 정면 3간, 측면 2간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원문에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복원공사에 착수하여 이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라고 되었있으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때가 1978년 이므로, 선후 관계에 대한 서술이 잘못된 것으로 파악된다.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7 호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시대 : 조선후기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삼선공원 /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512-160
지정연월일 : 1978. 12. 18.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 중 중심 건물이다.
현재 정부종합청사 건물(세종로 50번지)에 위치하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은 거의 훼손되어 사라지고 이 건물 외에 육군사관학교 내의 삼군부 청헌당과 우정총국, 정독도서관으로 이전된 종친부 건물 정도만 남아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종 2년(1865)에 310년 동안 군국사무를 담당하던 국가의 최고기관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했다. 그리고 정치는 의정부에서 맡도록 하는 한편 삼군부를 설치하여 치안과 국방관계를 담당하게 했다.
삼군부는 조선초의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계승한 것으로 훈련도감의 신영(新營)・남영(南營)・마병소(馬兵所)로서, 국가의 중추적인 관아로 삼았다. 그리하여 청사 자리를 광화문 앞의 예조(禮曹: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가 위치한 곳으로 정한 뒤 고종 5년(1868)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 때 총무당을 정당(正堂), 즉 중심 건물로 삼고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덕의당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및 보존되고 있다.
그 후 삼군부는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용호영 등 5개 군문(軍門)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에 위세를 떨쳤다가 개항 이후인 고종 17년(1880)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 때 이곳으로 이전한 후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하다가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에 복원공사를 착수하여 이 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총무당은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7 호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
시대 : 조선후기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삼선공원 /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512-160
지정연월일 : 1978. 12. 18.
총무당은 조선말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1품 아문인 삼군부(三軍府) 청사 중 중심 건물이다.
현재 정부종합청사 건물(세종로 50번지)에 위치하던 이 관아 건물은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은 거의 훼손되어 사라지고 이 건물 외에 육군사관학교 내의 삼군부 청헌당과 우정총국, 정독도서관으로 이전된 종친부 건물 정도만 남아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집권하자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고종 2년(1865)에 310년 동안 군국사무를 담당하던 국가의 최고기관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했다. 그리고 정치는 의정부에서 맡도록 하는 한편 삼군부를 설치하여 치안과 국방관계를 담당하게 했다.
삼군부는 조선초의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계승한 것으로 훈련도감의 신영(新營)・남영(南營)・마병소(馬兵所)로서, 국가의 중추적인 관아로 삼았다. 그리하여 청사 자리를 광화문 앞의 예조(禮曹: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가 위치한 곳으로 정한 뒤 고종 5년(1868)에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 때 총무당을 정당(正堂), 즉 중심 건물로 삼고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덕의당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및 보존되고 있다.
그 후 삼군부는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용호영 등 5개 군문(軍門)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에 위세를 떨쳤다가 개항 이후인 고종 17년(1880)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이 건물은 일제 때 이곳으로 이전한 후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하다가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낡고 퇴락하였으므로 서울시에서 1979년 8월에 복원공사를 착수하여 이 해 12월 20일에 완공한 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총무당은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을 돌렸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의 여덟 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⑤ 三軍府 總武堂(삼군부 총무당)
성북구 돈암동 삼성공원 안에 있는 건평 72.1평(坪), 지적(地籍) 2,609평, 정면 7간(間), 측면 4간(間)짜리 한말 삼군부(三軍府)의 청사건물이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868년(고종 5년) 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무략(武略)을 총찰하는 주당(主堂)이었던 총무당(總武堂)으로서 당초 광화문(光化門) 앞 서쪽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1930년에 현재자리로 이축(移築)된 것이다.
건축양식은 조선조(朝鮮朝)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基壇)을 돌렸는데 건물은 동쪽에서 보면 5벌대 높은 기단 위에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이고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었으며 막새기와를 썼고 용마루 끝과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龍頭)를 얹었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행포는 이익공(二翼工)으로 모두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 여덟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총무당(總武堂)은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주당(主堂)으로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있었는데 덕의당(德義堂)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淸憲堂)은 원위치에 남아 있다가 1967년 도봉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道峰區 孔陵洞 陸軍士官學校)내로 이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6호「삼군부청헌당(三軍府淸憲堂)」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어쨌든 이 건물 중앙에 걸려있는 ‘총무당(總武堂)’이란 현액(縣額)에는 조선조(朝鮮朝) 말기의 정치가인 신헌(申櫶)(구명:관호 舊名:觀浩)의 글씨로 ‘상장지인(上將之印)’, ‘신관호인(申觀浩印)’이라 각인한 낙관이 선명하다. 낙관에 보이는 신관호는 뒷날 신헌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금당초고(琴堂初藁)」에 그가 지은 〈삼군부총무당상량문(三軍府總武堂上樑文)〉이 실려 있어 고종(高宗) 5년(1868)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으로 이건(移建)된 총무당(總武堂)은 1942년 경기도 공무원 연성장(京畿道 公務員 練成場)으로 사용되다가 서울 시(市) 직업훈련원(職業訓練院) 사무실로도 사용되어 오던 중 건물이 낡고 퇴락되어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17일 복수복원공사(補修復元工事)에 착수하여 동년 12월 20일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정면의 8개 기둥에 붙어 있는 목판의 주련(柱聯)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종신이목명방삼아(從新耳目名倣三衙)
이목 또한 새롭구나 그 이름 삼아(三衙)와 나란히
○ 수도구팔화분회래(遂道九八化賁懷來)
구이팔만(九夷八蠻)외교 갖고 덕화로 승복시키니
○ 儀同相府東西向廳
규모는 상부(議政府) 같아 동서로 청이 마주 향했고
○ 상취천단좌우집법(象取天垣左右執法)
모양은 천원(吏曹) 본 받아 좌우로 법을 지켰네
○ 근련군사임천하중(菫勵群士任天下重)
뭇 옥관 독려하에 천하의 무거운 책임 맡았고
○ 제단서무작시중의(諸斷庶務酌時中宜)
온갖 사무 결단해라 시중의 적절함 헤아려
○ 문무길보위헌만방(文武吉甫爲憲萬邦)
문무 대신 만국에 모범될지라
○ 협공화충득여공리(協恭和衷得與共理)
화합과 충성으로 이 나라 함께 다스리세
⑤ 三軍府 總武堂(삼군부 총무당)
성북구 돈암동 삼성공원 안에 있는 건평 72.1평(坪), 지적(地籍) 2,609평, 정면 7간(間), 측면 4간(間)짜리 한말 삼군부(三軍府)의 청사건물이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868년(고종 5년) 에 건립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무략(武略)을 총찰하는 주당(主堂)이었던 총무당(總武堂)으로서 당초 광화문(光化門) 앞 서쪽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1930년에 현재자리로 이축(移築)된 것이다.
건축양식은 조선조(朝鮮朝) 말기의 전형적인 관아건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기단(基壇)을 돌렸는데 건물은 동쪽에서 보면 5벌대 높은 기단 위에 이고주칠량(二高柱七樑)이고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었으며 막새기와를 썼고 용마루 끝과 내림마루 끝에는 용두(龍頭)를 얹었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중앙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을 두었다. 행포는 이익공(二翼工)으로 모두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중앙 어간(御間) 창방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앞면 여덟개 기둥에도 각각 주련(柱聯)이 붙어 있다.
총무당(總武堂)은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주당(主堂)으로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이 있었는데 덕의당(德義堂)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고 청헌당(淸憲堂)은 원위치에 남아 있다가 1967년 도봉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道峰區 孔陵洞 陸軍士官學校)내로 이축,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6호「삼군부청헌당(三軍府淸憲堂)」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어쨌든 이 건물 중앙에 걸려있는 ‘총무당(總武堂)’이란 현액(縣額)에는 조선조(朝鮮朝) 말기의 정치가인 신헌(申櫶)(구명:관호 舊名:觀浩)의 글씨로 ‘상장지인(上將之印)’, ‘신관호인(申觀浩印)’이라 각인한 낙관이 선명하다. 낙관에 보이는 신관호는 뒷날 신헌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금당초고(琴堂初藁)」에 그가 지은 〈삼군부총무당상량문(三軍府總武堂上樑文)〉이 실려 있어 고종(高宗) 5년(1868)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으로 이건(移建)된 총무당(總武堂)은 1942년 경기도 공무원 연성장(京畿道 公務員 練成場)으로 사용되다가 서울 시(市) 직업훈련원(職業訓練院) 사무실로도 사용되어 오던 중 건물이 낡고 퇴락되어 서울시에서 1979년 8월 17일 복수복원공사(補修復元工事)에 착수하여 동년 12월 20일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정면의 8개 기둥에 붙어 있는 목판의 주련(柱聯)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종신이목명방삼아(從新耳目名倣三衙)
이목 또한 새롭구나 그 이름 삼아(三衙)와 나란히
○ 수도구팔화분회래(遂道九八化賁懷來)
구이팔만(九夷八蠻)외교 갖고 덕화로 승복시키니
○ 儀同相府東西向廳
규모는 상부(議政府) 같아 동서로 청이 마주 향했고
○ 상취천단좌우집법(象取天垣左右執法)
모양은 천원(吏曹) 본 받아 좌우로 법을 지켰네
○ 근련군사임천하중(菫勵群士任天下重)
뭇 옥관 독려하에 천하의 무거운 책임 맡았고
○ 제단서무작시중의(諸斷庶務酌時中宜)
온갖 사무 결단해라 시중의 적절함 헤아려
○ 문무길보위헌만방(文武吉甫爲憲萬邦)
문무 대신 만국에 모범될지라
○ 협공화충득여공리(協恭和衷得與共理)
화합과 충성으로 이 나라 함께 다스리세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務堂)
조선시대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삼군부는 태조가 군사권의 통제를 위해 고려 말의 군사체계를 정비하여 만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줄임말이다. 조선 초기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마주보는 광화문 앞 서쪽(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위치하였다. 행정·군사제도가 바뀌며 명칭과 규모의 변화를 겪었다. 흥선대원군 때 최고의 군사기관이었으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 기능이 축소되고, 19세기 말 적극적인 근대문물 수용정책이 추진되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설치와 함께 폐지되었다.
삼군부 청사는 정당(正堂)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을 두었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였다. 1931년 조선보병대 해산 이후 삼군부 청사는 조선총독부의 체신국의 보험관리국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덕의당은 없어지고, 총무당은 돈암동(512-160)으로 옮겨졌다.
총무당 건물은 삼군부의 군사지략을 의논했던 주당(主堂)으로 조선 후기 관아건물 양식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각 각의 온돌방 옆에는 광이 이어져 있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 이후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쓰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1978년)되었고, 이듬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務堂)
조선시대 군사업무를 담당하던 삼군부는 태조가 군사권의 통제를 위해 고려 말의 군사체계를 정비하여 만든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줄임말이다. 조선 초기 최고행정기관인 의정부와 마주보는 광화문 앞 서쪽(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위치하였다. 행정·군사제도가 바뀌며 명칭과 규모의 변화를 겪었다. 흥선대원군 때 최고의 군사기관이었으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 기능이 축소되고, 19세기 말 적극적인 근대문물 수용정책이 추진되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설치와 함께 폐지되었다.
삼군부 청사는 정당(正堂)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을 두었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였다. 1931년 조선보병대 해산 이후 삼군부 청사는 조선총독부의 체신국의 보험관리국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덕의당은 없어지고, 총무당은 돈암동(512-160)으로 옮겨졌다.
총무당 건물은 삼군부의 군사지략을 의논했던 주당(主堂)으로 조선 후기 관아건물 양식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각 각의 온돌방 옆에는 광이 이어져 있다. 1942년부터 경기도 공무원 연수장으로 사용되다 이후 서울시 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쓰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1978년)되었고, 이듬해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7 삼군부 총무당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귀중한 자료
- 삼군부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었다. 구한말 지금의 위치로 옮긴 후 1942년부터 경기도공무원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건물이 퇴락하여 1979년 크게 보수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지었다. 정면 중앙 3칸, 측면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이 있다. 세 칸 대청 전면은 사분합문을 달고, 상부에 교창을 설치하였다. 총무당은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 중 하나다.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7 삼군부 총무당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귀중한 자료
- 삼군부 총무당은 조선 말기의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었다. 구한말 지금의 위치로 옮긴 후 1942년부터 경기도공무원연수장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시직업훈련원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건물이 퇴락하여 1979년 크게 보수하고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지었다. 정면 중앙 3칸, 측면 2칸은 대청이고, 좌우에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 있고, 그 옆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광이 있다. 세 칸 대청 전면은 사분합문을 달고, 상부에 교창을 설치하였다. 총무당은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 중 하나다.
현재 삼선동 한성대학교 옆 삼선공원 안에는 조선시대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던 삼군부의 청사건물로, 1868년(고종5)에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지어졌다. 원래 광화문 남쪽 현재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청사의 중심이 되는 총무당만을 193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최근 서울의 궁궐 수문장 교대식과 경기도의 남한산성 및 화성행궁에서 펼쳐지는 조선무예 시연이 관광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양도성을 수비했던 북둔과 군사연무장이 있었던 성북동과 삼선동 일대에서는 아무런 상설행사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더군다나 삼군부총무당이라는 진귀한 국방 문화재를 바로 곁에 두고도 말이다.
현재 삼선동 한성대학교 옆 삼선공원 안에는 조선시대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의 군사업무를 관장하던 삼군부의 청사건물로, 1868년(고종5)에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지어졌다. 원래 광화문 남쪽 현재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는데, 청사의 중심이 되는 총무당만을 193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최근 서울의 궁궐 수문장 교대식과 경기도의 남한산성 및 화성행궁에서 펼쳐지는 조선무예 시연이 관광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양도성을 수비했던 북둔과 군사연무장이 있었던 성북동과 삼선동 일대에서는 아무런 상설행사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더군다나 삼군부총무당이라는 진귀한 국방 문화재를 바로 곁에 두고도 말이다.
삼선동(三仙洞) 1가(街)의 사적(史蹟)으로는 한성여고(漢城女高) 옆의 삼선공원(三仙公園)(512-160)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 고종(高宗) 3년 대원군이 군무(軍務)를 통할하는 관아로서 비변사 대신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를 설치하여 삼군부라 했다. 이 건물은 2년 뒤인 고종(高宗) 5년(1868)부터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삼군부(三軍府)가 사용하던 것을 高宗 19년(1882) 에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총리군국무아문(統理軍國事務衛門)의 청사로 쓰이다가 갑오개혁 후 시위대(待衛隊)청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조선보병사령부(朝鮮步兵司令部)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에 3개 건물 중 총무당(統武堂)만을 이곳으로 옮기고 경기도 공무원연성장(公務員練成場)으로 사용했다. 6·25동란 후에는 고아원과 서울시 직업훈련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청헌당(淸憲堂)건물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했다.
삼선동(三仙洞) 1가(街)의 사적(史蹟)으로는 한성여고(漢城女高) 옆의 삼선공원(三仙公園)(512-160)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조선말 고종(高宗) 3년 대원군이 군무(軍務)를 통할하는 관아로서 비변사 대신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를 설치하여 삼군부라 했다. 이 건물은 2년 뒤인 고종(高宗) 5년(1868)부터 현재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삼군부(三軍府)가 사용하던 것을 高宗 19년(1882) 에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과 총리군국무아문(統理軍國事務衛門)의 청사로 쓰이다가 갑오개혁 후 시위대(待衛隊)청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조선보병사령부(朝鮮步兵司令部)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에 3개 건물 중 총무당(統武堂)만을 이곳으로 옮기고 경기도 공무원연성장(公務員練成場)으로 사용했다. 6·25동란 후에는 고아원과 서울시 직업훈련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청헌당(淸憲堂)건물은 1967년에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전했다.
5) 한성부치안(漢城府治安)과 포도청(捕盜廳)
성북구(城北區) 돈암동 512번지 160호에 구포도청사(舊捕盜廳舍)가 위치하여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이 건물은 원래 한성부 서부 서린방 혜정교(漢城府 西部 瑞麟坊 惠政橋) 남쪽(종로1가 89번지 동아일보사 일대)에 있는 우포청(右捕廳) 건물이지만 일제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성북구(城北區)와 관련되어 조선시대의 치안관계를 살펴본다.
포도청(捕盜廳)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죄인의 신문이나 포도·순라(捕盜·巡羅) 등의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일명 포청(補廳)이라고도 한다. 앞서 언급한 우포청(右捕廳)과 한성부 중부 정선방 파자교(漢城府 中部 貞善坊 把子橋) 동북쪽(종로구 수은동 56번지 단성사(團成社)일대)에 위치한 우포청(左捕廳)이 있었다. 포도청의 설치시기는 속대전(續大典)에 보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성종(成宗)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문종(文宗)때 이미 포도전담관(捕盜專擔官)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성종(成宗) 초에는 포도주장·포도장(捕盜主將·捕盜將)의 임용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상설직(常設職)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81년 3월에는 포도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하여 한성(漢城)과 경기(京畿)를 좌우(左右)로 나누고 2인의 포도장(捕盜將)이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한성오부(漢城五部)에 1인씩의 포도장을 두기로 하였지만 대체로 2인의 포도장제(捕盜將制)는 계속되었다.
포도청(捕盜廳)의 조직과 기능을 보면 속대전(續大典)에는 좌·우포청에 각각 종2품의 대장(大將)과 종무관·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서원(從事官·部長·無料部長·架設部將·書員)이 두어졌으며 시대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포도대장은 포도청을 지휘감독하는 책임자로 다른 군사지휘관을 겸할 수 없으며 왕의 행차 때 수행하였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보면 좌·우윤(左·右尹)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종무관(從事官)은 문무당하관(文武堂下官 - 종6품)으로 임명하여 포도대장을 보좌하고 죄인의 신문을 주관하는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은 군사를 지휘하여 포도(捕盜)나 순라(巡邏)에 임하였고, 서원(書員)은 중인분신(中人身分)으로 사무기록을 담당하였다.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개혁 때 좌·우포청을 폐합하여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하고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소속시켰으며, 그 책임자인 경무사(警務使)는 왕과 직결되어 있어 독립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5) 한성부치안(漢城府治安)과 포도청(捕盜廳)
성북구(城北區) 돈암동 512번지 160호에 구포도청사(舊捕盜廳舍)가 위치하여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이 건물은 원래 한성부 서부 서린방 혜정교(漢城府 西部 瑞麟坊 惠政橋) 남쪽(종로1가 89번지 동아일보사 일대)에 있는 우포청(右捕廳) 건물이지만 일제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성북구(城北區)와 관련되어 조선시대의 치안관계를 살펴본다.
포도청(捕盜廳)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죄인의 신문이나 포도·순라(捕盜·巡羅) 등의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일명 포청(補廳)이라고도 한다. 앞서 언급한 우포청(右捕廳)과 한성부 중부 정선방 파자교(漢城府 中部 貞善坊 把子橋) 동북쪽(종로구 수은동 56번지 단성사(團成社)일대)에 위치한 우포청(左捕廳)이 있었다. 포도청의 설치시기는 속대전(續大典)에 보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이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성종(成宗)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문종(文宗)때 이미 포도전담관(捕盜專擔官)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성종(成宗) 초에는 포도주장·포도장(捕盜主將·捕盜將)의 임용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상설직(常設職)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81년 3월에는 포도사목(捕盜事目)을 제정하여 한성(漢城)과 경기(京畿)를 좌우(左右)로 나누고 2인의 포도장(捕盜將)이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일시적으로 한성오부(漢城五部)에 1인씩의 포도장을 두기로 하였지만 대체로 2인의 포도장제(捕盜將制)는 계속되었다.
포도청(捕盜廳)의 조직과 기능을 보면 속대전(續大典)에는 좌·우포청에 각각 종2품의 대장(大將)과 종무관·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서원(從事官·部長·無料部長·架設部將·書員)이 두어졌으며 시대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포도대장은 포도청을 지휘감독하는 책임자로 다른 군사지휘관을 겸할 수 없으며 왕의 행차 때 수행하였고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보면 좌·우윤(左·右尹)을 지낸 사람으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종무관(從事官)은 문무당하관(文武堂下官 - 종6품)으로 임명하여 포도대장을 보좌하고 죄인의 신문을 주관하는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부장·무료부장·가설부장은 군사를 지휘하여 포도(捕盜)나 순라(巡邏)에 임하였고, 서원(書員)은 중인분신(中人身分)으로 사무기록을 담당하였다.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개혁 때 좌·우포청을 폐합하여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하고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소속시켰으며, 그 책임자인 경무사(警務使)는 왕과 직결되어 있어 독립된 업무를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