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일대를 일컫던 명칭들에 곤해 설명한 내용이다. 한양도성의 숙정문과 동소문을 연결하는 북쪽 성곽 바깥 지역을 자연스럽게 ‘성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조선 중엽에는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 즉 성북둔이 설치되면서 동명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도성 사람들이 복숭아꽃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을 찾으면서 ‘복사동’, ‘도화동(桃花洞)’, ‘북저동(北渚洞)’ 등으로 불렸다. 빨래골, 북적골, 논골, 도둑골, 노구멧굴 등으로 성북동 일대를 일컫는 다양한 명칭이 전해져 내려온다.
도성의 동쪽으로 나가 북쪽으로 3, 4리를 가면 북적동(北笛洞)이 있다. 북적동은 도성에 가까우면서 명승지로 소문난 곳이다. 봄이 저물 무렵이면 하루라도 거리에 사람이 없는 때가 없다. (중략) 북적동 입구에는 드러누운 너럭바위 위로 물이 질펀하게 흐르는데, 물가를 따라 계속 이어져 있어 이곳저곳 골라 밟기도 하고 풀쩍 뛰어넘기도 하였다. 북적동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하던 바위가 길쭉하게 이어지고 질펀하게 흐르던 물은 한 곳으로 모여 골짜기 가운데에서 개울을 이루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높이 솟아 산을 이루는데 둘레가 거의 몇 리나 되었다. 사이사이에 촌락이 별처럼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촌락 너머로 언덕에서 산에 이르기까지 복사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흰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으며, 짙붉은 것도 연붉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꼿꼿한 소나무와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일산이나 병풍 같은 모습이 희뿌연 비와 희미한 안개 사이로 어리비쳤다. 왕왕 꽃잎이 개울로 떨어지면 개울물이 온통 꽃잎과 같은 색으로 변하는 듯하였다. (중략)“어르신이 이곳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을 거쳐 늙어서까지 하루라도 오늘처럼 골짜기가 요란하지 않았던 날이 없지요?” 그러자 주인이 말하였다.
“사방의 교외에 명승지로 알려진 곳은 동쪽 교외가 최고인데 동쪽 교외에서도 북적동이 더욱 유명하지요. 아리따운 꽃이 향기를 뿜고 아름다운 경치가 자태를 뽐낼 때면 도성의 남녀들이 미어지지 않는 날이 없지요. 그러다 꽃이 지고 물이 줄면 산은 텅 비어 버립니다. 때때로 오가는 이들이라고는 푸닥거리를 하는 노인이나 빨래하는 아낙네뿐이요, 봇물이 빠진 듯 썰렁하지 않은 적이 없지요.” <명고전집> 중에서, 서형수 저, 이종묵 역.
도성의 동쪽으로 나가 북쪽으로 3, 4리를 가면 북적동(北笛洞)이 있다. 북적동은 도성에 가까우면서 명승지로 소문난 곳이다. 봄이 저물 무렵이면 하루라도 거리에 사람이 없는 때가 없다. (중략) 북적동 입구에는 드러누운 너럭바위 위로 물이 질펀하게 흐르는데, 물가를 따라 계속 이어져 있어 이곳저곳 골라 밟기도 하고 풀쩍 뛰어넘기도 하였다. 북적동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하던 바위가 길쭉하게 이어지고 질펀하게 흐르던 물은 한 곳으로 모여 골짜기 가운데에서 개울을 이루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높이 솟아 산을 이루는데 둘레가 거의 몇 리나 되었다. 사이사이에 촌락이 별처럼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촌락 너머로 언덕에서 산에 이르기까지 복사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흰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으며, 짙붉은 것도 연붉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꼿꼿한 소나무와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일산이나 병풍 같은 모습이 희뿌연 비와 희미한 안개 사이로 어리비쳤다. 왕왕 꽃잎이 개울로 떨어지면 개울물이 온통 꽃잎과 같은 색으로 변하는 듯하였다. (중략)“어르신이 이곳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을 거쳐 늙어서까지 하루라도 오늘처럼 골짜기가 요란하지 않았던 날이 없지요?” 그러자 주인이 말하였다.
“사방의 교외에 명승지로 알려진 곳은 동쪽 교외가 최고인데 동쪽 교외에서도 북적동이 더욱 유명하지요. 아리따운 꽃이 향기를 뿜고 아름다운 경치가 자태를 뽐낼 때면 도성의 남녀들이 미어지지 않는 날이 없지요. 그러다 꽃이 지고 물이 줄면 산은 텅 비어 버립니다. 때때로 오가는 이들이라고는 푸닥거리를 하는 노인이나 빨래하는 아낙네뿐이요, 봇물이 빠진 듯 썰렁하지 않은 적이 없지요.” <명고전집> 중에서, 서형수 저, 이종묵 역.
《漢京識略》에 의하면, 성북동 일대에는 맑은 계곡과 얕은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매년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계곡 사이를 메워 복숭아꽃을 즐기고, 또 여름이면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고 하였다.《東國與地備考》에 의하면,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桃花洞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도화동·紅挑洞·복사동이란 자연부락의 이름이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朴齊家도 이곳의 복숭아나무를 주제로 시를 읊었는데, 그는 그 재배를 실학적 관점에서 권장하였다.
《漢京識略》에 의하면, 성북동 일대에는 맑은 계곡과 얕은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매년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이 계곡 사이를 메워 복숭아꽃을 즐기고, 또 여름이면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고 하였다.《東國與地備考》에 의하면,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桃花洞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도화동·紅挑洞·복사동이란 자연부락의 이름이 남아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朴齊家도 이곳의 복숭아나무를 주제로 시를 읊었는데, 그는 그 재배를 실학적 관점에서 권장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서울을 도성으로 정한 후, 도성의 성곽 중 숙정문과 동소문을 연결하는 북쪽 성곽 바깥 지역을 자연스럽게 ‘성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북동은 남편이 집을 나가자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차려 매일 기도를 했더니 남편이 돌아왔다는 전설에 따라 ‘노구멧골’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산세가 험준하여 도둑들이 출몰했다고 해서 ‘도둑골’로도 불렸다. 조선 중엽에 이곳에 어영청의 북둔을 설치하면서 첫 주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주 시키고 밭을 일구게 하였다. 그러나 성북의 땅은 척박하고 험한 산지여서 경작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성북을 하나 둘 떠나자 결국 영조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었다. 성북동 골짜기의 성북천 언저리에서 도성과 궁궐의 마전(생포목을 잿물에 삶아 빨아서 하얗게 표백시키는 것)을 도맡아서 할 수 있는 권리를 이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못해 사람이 모이지 않자, 종로구 세검정동 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에게만 주었던 메주 쑤는 권리도 갈라 주었다. 지금도 성북동 언저리에는 마전과 메주 쑤는 일과 관련된 지명들이 전해져 오는데 생포목을 빨래했다고 해서 빨래골, 메주를 보글보글 끓인다 해서 북적골이 생겼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이 살기에는 버거운, 돌 많고 험한 산골이었지만, 일을 안 해도 되는 양반들에게 이 지역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세가 좋고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최고의 별장지였다. 안동 김씨, 청송 심씨, 여흥 민씨 등 조선 후기 최고 권세가들의 별장이 바로 이곳 성북동에 위치했다. 성 밖 10리의 지역이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경성부 행정 구역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시골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북동이 급격히 시골의 모습을 잃은 것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부터이다. 함경도 함청 사람들이 피난 와서 이 골짜기를 판자집으로 메우며 일명 하꼬방(판자집)촌을 이루었고, 서울로 올라오는 많은 사람들이 집 값이 싼 이곳에 자리 잡으며 성북동에서 복숭아밭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점점 사라지게 된다.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던 1960년대에는 산골들을 하나 둘 깨부수어 주거지역을 새로이 확대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성북동이 도심에서 가깝고 전망과 환경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특히 외교가에 주로 퍼졌는지 대사관저가 서서히 들어섰고 지금은 30개국의 관저가 세워져 있다. 2015년 현재, 전통과 낭만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인사동과 삼청동, 효자동을 지나 성북동까지 미치고 있다. 수연산방과 길상사, 삼청각은 이곳의 대표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사람이 살기에는 힘들었지만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양반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성북동은 이제 가난한 피난민들의 흔적과 부호들의 저택들이 공존하는 특이한 동네가 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서울을 도성으로 정한 후, 도성의 성곽 중 숙정문과 동소문을 연결하는 북쪽 성곽 바깥 지역을 자연스럽게 ‘성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북동은 남편이 집을 나가자 노구메(산천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솥에 지은 메밥)를 차려 매일 기도를 했더니 남편이 돌아왔다는 전설에 따라 ‘노구멧골’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산세가 험준하여 도둑들이 출몰했다고 해서 ‘도둑골’로도 불렸다. 조선 중엽에 이곳에 어영청의 북둔을 설치하면서 첫 주민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주 시키고 밭을 일구게 하였다. 그러나 성북의 땅은 척박하고 험한 산지여서 경작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성북을 하나 둘 떠나자 결국 영조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었다. 성북동 골짜기의 성북천 언저리에서 도성과 궁궐의 마전(생포목을 잿물에 삶아 빨아서 하얗게 표백시키는 것)을 도맡아서 할 수 있는 권리를 이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못해 사람이 모이지 않자, 종로구 세검정동 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에게만 주었던 메주 쑤는 권리도 갈라 주었다. 지금도 성북동 언저리에는 마전과 메주 쑤는 일과 관련된 지명들이 전해져 오는데 생포목을 빨래했다고 해서 빨래골, 메주를 보글보글 끓인다 해서 북적골이 생겼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이 살기에는 버거운, 돌 많고 험한 산골이었지만, 일을 안 해도 되는 양반들에게 이 지역은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세가 좋고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최고의 별장지였다. 안동 김씨, 청송 심씨, 여흥 민씨 등 조선 후기 최고 권세가들의 별장이 바로 이곳 성북동에 위치했다. 성 밖 10리의 지역이었던 성북동은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경성부 행정 구역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시골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성북동이 급격히 시골의 모습을 잃은 것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부터이다. 함경도 함청 사람들이 피난 와서 이 골짜기를 판자집으로 메우며 일명 하꼬방(판자집)촌을 이루었고, 서울로 올라오는 많은 사람들이 집 값이 싼 이곳에 자리 잡으며 성북동에서 복숭아밭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점점 사라지게 된다.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던 1960년대에는 산골들을 하나 둘 깨부수어 주거지역을 새로이 확대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성북동이 도심에서 가깝고 전망과 환경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소문이 특히 외교가에 주로 퍼졌는지 대사관저가 서서히 들어섰고 지금은 30개국의 관저가 세워져 있다. 2015년 현재, 전통과 낭만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인사동과 삼청동, 효자동을 지나 성북동까지 미치고 있다. 수연산방과 길상사, 삼청각은 이곳의 대표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사람이 살기에는 힘들었지만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양반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성북동은 이제 가난한 피난민들의 흔적과 부호들의 저택들이 공존하는 특이한 동네가 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年來(연래),住民(주민)의宿望(숙망)이던 城北町河川改修(성북정하천개수)
華麗(화려)한祝祭(축제)…繁榮(번영)을謳歌(구가)
지난 4월 근교 76개 동리가 경성부로 편입된 이래 신편입구역의 주민들은 경성부 구역확장으로 인하여 받은 혜택이란 허울 좋은 “경성부민”이라는 이름 외에 하등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하여 부 당국에 대한 불평의 소리는 점점 높아갔었다. 부 당국은 경기도와 협력하여 신편입구역에 대한 첫 사업으로 토목공사를 착수하기로 되었다한다. 그것은 현 경성부에서 이상적 주택지로 자타가 공인하는 성북정에서 동소문 밖으로 흐르는 개천을 근본적으로 개수한다는 것인데 그 개수공사는 금년 안으로 착수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 개수공사의 범위가 어느 정도에 이를 것이며 또 그 공사비가 얼마나 걸릴는지는 설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데 그 공사는 개천가를 전부 돌로써 축대를 싸서 흐르는 물을 깨끗이 하는 동시에 도로 폭을 넓히고 또 여러 곳에 다리를 놓아서 교통상 편리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 공사비는 도지방비에서 지출하기로 되었다는데 이 개수공사가 완성되면 성북정주민은 많은 편리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6.05.24.
年來(연래),住民(주민)의宿望(숙망)이던 城北町河川改修(성북정하천개수)
華麗(화려)한祝祭(축제)…繁榮(번영)을謳歌(구가)
지난 4월 근교 76개 동리가 경성부로 편입된 이래 신편입구역의 주민들은 경성부 구역확장으로 인하여 받은 혜택이란 허울 좋은 “경성부민”이라는 이름 외에 하등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하여 부 당국에 대한 불평의 소리는 점점 높아갔었다. 부 당국은 경기도와 협력하여 신편입구역에 대한 첫 사업으로 토목공사를 착수하기로 되었다한다. 그것은 현 경성부에서 이상적 주택지로 자타가 공인하는 성북정에서 동소문 밖으로 흐르는 개천을 근본적으로 개수한다는 것인데 그 개수공사는 금년 안으로 착수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 개수공사의 범위가 어느 정도에 이를 것이며 또 그 공사비가 얼마나 걸릴는지는 설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데 그 공사는 개천가를 전부 돌로써 축대를 싸서 흐르는 물을 깨끗이 하는 동시에 도로 폭을 넓히고 또 여러 곳에 다리를 놓아서 교통상 편리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 공사비는 도지방비에서 지출하기로 되었다는데 이 개수공사가 완성되면 성북정주민은 많은 편리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6.05.24.
예전에는 성북동이 ‘빨랫골’이라고 불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편이 성북동에서 태어나 65년간 거주해온 성북동 토박이인데, 저도 결혼하면서 성북동에 살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성곽 옆길(85번 종점)을 빨랫골이라고 불렀습니다. 12년 전까지는 성북동에 성북천이 흘렀는데, 그 때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어요. 지금도 차량통행이 많지 않은데, 굳이 복개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예전에는 성북동이 ‘빨랫골’이라고 불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남편이 성북동에서 태어나 65년간 거주해온 성북동 토박이인데, 저도 결혼하면서 성북동에 살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성곽 옆길(85번 종점)을 빨랫골이라고 불렀습니다. 12년 전까지는 성북동에 성북천이 흘렀는데, 그 때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어요. 지금도 차량통행이 많지 않은데, 굳이 복개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 ‘북(北)’자로 시작하는 이름
- 북사동(北寺洞) : 조선 영조 연간보다 앞선 시대에 이 지역에 묵사(墨寺)라는 절(암자)이 있어 묵사동(墨寺洞)·북절골·북사동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
- 북적동(北積洞) :『일성록』정조 15년 기사와 일부 문집에 등장하며 ‘북적동(北笛洞)’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음
- 북창동(北倉洞) : 성북동 260번지 일대에 도성을 지키는 군인들이 먹을 곡식 보관을 위해 설치 관리했던 창고인 북창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
- 북둔(北屯) : 어영청 성북둔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 18세기말부터 ‘북둔도화’라는 조어가 유행함
- 북저동(北渚洞) : ‘북쪽 물가’라는 뜻으로 봄철 복사꽃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지은 한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을 이름. 고종 연간에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성부 ‘명승’조에 이 지명으로 소개
○ ‘북(北)’자로 시작하는 이름
- 북사동(北寺洞) : 조선 영조 연간보다 앞선 시대에 이 지역에 묵사(墨寺)라는 절(암자)이 있어 묵사동(墨寺洞)·북절골·북사동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 이름
- 북적동(北積洞) :『일성록』정조 15년 기사와 일부 문집에 등장하며 ‘북적동(北笛洞)’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음
- 북창동(北倉洞) : 성북동 260번지 일대에 도성을 지키는 군인들이 먹을 곡식 보관을 위해 설치 관리했던 창고인 북창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
- 북둔(北屯) : 어영청 성북둔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 18세기말부터 ‘북둔도화’라는 조어가 유행함
- 북저동(北渚洞) : ‘북쪽 물가’라는 뜻으로 봄철 복사꽃 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지은 한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을 이름. 고종 연간에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한성부 ‘명승’조에 이 지명으로 소개
○ 구전되는 이름
- 운수동(雲水洞) : 성북동 60번지에 있던 마을로, 이곳 바위에 ‘雲水洞’이라 새겨져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논골·논굴)
- 논골 : 성북동 60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서, 성북동이 원래 산골짜기이므로 논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서 습한 땅에 논다랑이를 조금 이루고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논굴)
- 도둑골 : 성북동에 있던 마을로,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하여 도둑이 숨어 살기 쉬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도덕굴)
- 노구멧골 : 성북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구메(메밥)를 지어 놓고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에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다고 전해지는 데서 유래된 이름(노구멧굴)
- 북정마을 : 심우장 뒤편 한양도성 성곽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포백훈조계’가 있어서 당시 메주 쑤는 소리가 ‘북적북적’하고 났다고 하여 ‘북적’이 ‘북정’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함
○ 구전되는 이름
- 운수동(雲水洞) : 성북동 60번지에 있던 마을로, 이곳 바위에 ‘雲水洞’이라 새겨져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논골·논굴)
- 논골 : 성북동 60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서, 성북동이 원래 산골짜기이므로 논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서 습한 땅에 논다랑이를 조금 이루고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논굴)
- 도둑골 : 성북동에 있던 마을로,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하여 도둑이 숨어 살기 쉬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도덕굴)
- 노구멧골 : 성북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구메(메밥)를 지어 놓고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그 정성에 남편이 돌아와서 잘 살았다고 전해지는 데서 유래된 이름(노구멧굴)
- 북정마을 : 심우장 뒤편 한양도성 성곽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포백훈조계’가 있어서 당시 메주 쑤는 소리가 ‘북적북적’하고 났다고 하여 ‘북적’이 ‘북정’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함
○ 북저동_신증동국여지승람
북저동(北渚洞) :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북저동_신증동국여지승람
북저동(北渚洞) :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북사동_한경지략
북사동은 혜화문 밖에 있으며 옛날 묵사(墨寺)가 있었으므로 ‘묵사동’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어영청의 북창이 여기에 있어서 ‘북둔’이라고도 한다. 맑은 계곡물이 방죽을 끼고 흐르는 곳에 거민들은 복숭아를 심어 기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니 늦은 봄마다 놀러온 사람들, 수레와 말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가득 차서 움직인다. 또한 맑고 깨끗한 초가들이 많은데 정유 박제가의 「성시전도시」에 “가장 불쌍하기는 성북둔 주변의 풍속이라. 복숭아를 심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긴다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北寺洞 在惠化門外 古有墨寺 故亦稱墨寺洞 又御營廳之北倉 在此 亦稱北屯 淸溪挾岸 居人 種桃爲業 每於晩春 遊人車馬 騈闐山谷間 亦多精灑之茅屋 朴貞㽔齊家城市全圖詩 最憐城北屯邊俗 不種桃花以爲恥者 是也
- 유본예, 『한경지략』 <명승>
○ 북사동_한경지략
북사동은 혜화문 밖에 있으며 옛날 묵사(墨寺)가 있었으므로 ‘묵사동’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어영청의 북창이 여기에 있어서 ‘북둔’이라고도 한다. 맑은 계곡물이 방죽을 끼고 흐르는 곳에 거민들은 복숭아를 심어 기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니 늦은 봄마다 놀러온 사람들, 수레와 말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가득 차서 움직인다. 또한 맑고 깨끗한 초가들이 많은데 정유 박제가의 「성시전도시」에 “가장 불쌍하기는 성북둔 주변의 풍속이라. 복숭아를 심지 않은 것을 수치로 여긴다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北寺洞 在惠化門外 古有墨寺 故亦稱墨寺洞 又御營廳之北倉 在此 亦稱北屯 淸溪挾岸 居人 種桃爲業 每於晩春 遊人車馬 騈闐山谷間 亦多精灑之茅屋 朴貞㽔齊家城市全圖詩 最憐城北屯邊俗 不種桃花以爲恥者 是也
- 유본예, 『한경지략』 <명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