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주민들의 생업과 삶에 대한 설명이다. 원래 성북동 골짜기는 워낙 산속이어서 농토가 적고 인가가 거의 없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하였다. 1765년(영조 41)에 성북동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한 생업이 없어 어려움을 겪자 나라에서 직물을 삶거나 빨아서 볕에 바래게 하는 마전의 권리를 줬다. 1768년(영조 44)에는 이와 더불어 궁중 수요의 메주 공급권 일부를 이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성북동 사람들은 광목을 마전하거나 메주를 만드는 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67년 삼선교-성북경찰서 구간의 복개 작업이 시작되며 현대식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섰고, 삼선교 상가가 건립되면서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에 버금갈 정도의 상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 대저택이 모여 부촌이 형성되고, 큰 규모의 요릿집이 생겨나며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상점들도 호황을 이루었다. 현재는 역사문화, 성북천 복원·정비를 통해 주변 상가들이 주목받으면서 젊은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성북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제조업은 포목의 漂白과 메주 쑤는 일, 채석과 그 가공 등이었다. 포목의 표백과 메주 쑤는 일은 성북동 골짜기에서 이루어졌다. 城北洞은 그 위치가 서울의 북동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북서쪽, 창의문 밖 탕춘대와 함께 북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 중에서도 길목이었다. 특히 이곳은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외적의 침입을 몇 차례 겸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이곳에 어영청 군대의 일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이곳에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외곽경비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북동 골짜기는 워낙 산속이어서 농토가 적고 인가가 거의 없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하였고, 그리하여 속속 떠나갔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들을 안주시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조 41년(1765) 영의정 洪鳳漢은 왕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표백,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는 부근의 냇가를 속칭 마전터라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울에서 소비되는 대다수의 포목을 이곳에서 마전하였다면 그 작업량은 적지않은 것이었고, 따라서 그 잇권도 적지않은 것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마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영조 44년(1768) 에는 이와 더불어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 수요의 메주 공급권을 그 일부를 나누어 이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이 역시 성북동 주민의 안주를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도 간장, 된장, 고추장은 모두 제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그 밖의 식료품들도 가공품을 사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간장, 된장, 고추장의 원료인 메주는 만드는 과정에서 절차가 복잡하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조선후기 이래로는 점차 판매를 위해 제조되기도 하였다. 도성 주변에 옛이름으로 남아있는 무쇠막이란 곳은 대개가 무쇠솥을 걸고 전문적으로 메주를 쑤어 이를 판매하던 곳이다. 더구나 궁중에서 소용되던 모든 물품은 백성들이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이 이른바 공납제였다. 이곳에서 제조되는 메주는 궁중에서 소용되었기 때문에 잘 만들어야 했다.
성북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제조업은 포목의 漂白과 메주 쑤는 일, 채석과 그 가공 등이었다. 포목의 표백과 메주 쑤는 일은 성북동 골짜기에서 이루어졌다. 城北洞은 그 위치가 서울의 북동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북서쪽, 창의문 밖 탕춘대와 함께 북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 중에서도 길목이었다. 특히 이곳은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하여 도둑이 은거하기가 용이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외적의 침입을 몇 차례 겸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이곳에 어영청 군대의 일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이곳에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외곽경비선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성북동 골짜기는 워낙 산속이어서 농토가 적고 인가가 거의 없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불편하였고, 그리하여 속속 떠나갔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들을 안주시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조 41년(1765) 영의정 洪鳳漢은 왕에게 건의하여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표백, 즉 마전하는 권리를 이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성북동 양쪽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는 부근의 냇가를 속칭 마전터라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울에서 소비되는 대다수의 포목을 이곳에서 마전하였다면 그 작업량은 적지않은 것이었고, 따라서 그 잇권도 적지않은 것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마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영조 44년(1768) 에는 이와 더불어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궁중 수요의 메주 공급권을 그 일부를 나누어 이곳 주민들에게 주었다. 이 역시 성북동 주민의 안주를 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도 간장, 된장, 고추장은 모두 제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그 밖의 식료품들도 가공품을 사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간장, 된장, 고추장의 원료인 메주는 만드는 과정에서 절차가 복잡하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조선후기 이래로는 점차 판매를 위해 제조되기도 하였다. 도성 주변에 옛이름으로 남아있는 무쇠막이란 곳은 대개가 무쇠솥을 걸고 전문적으로 메주를 쑤어 이를 판매하던 곳이다. 더구나 궁중에서 소용되던 모든 물품은 백성들이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이 이른바 공납제였다. 이곳에서 제조되는 메주는 궁중에서 소용되었기 때문에 잘 만들어야 했다.
경성동명점고(京城洞名點考)(3)
성북동이 이번에 새로 서울이 되어 성북정으로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은 기실 옛날에는 여기도 서울 장안이었다. 그때는 북저굴(북저동(北楮洞)이라고 하였고, 또는 성북둔(城北屯)이라고 하였는데 여기는 진장담는 “절메주”를 만들어 팔기로 유명하던 곳이다. 이것이 요새 말로는 전매사업이라고 할까. 독점사업이라 할까. 어쨌든 이 성북사람만이 하던 일이었는데 영조 때 창의문 밖 사람들이 이 일을 침범해서 싸움이 크게 벌어지며 영종께서 타첩을 시켜 두 곳에서 다 이 일을 갖도록 하시었다.
지금도 여기 사람들의 주요한 업이 되어 있는 세탁업은 그 때부터 유명하던 것이오. 더구나 여기는 복숭아꽃이 유명하야 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북둔도화천하홍(北屯桃花天下紅)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부종도화이위치(不種桃花以爲恥)라는 시구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이래서 여기는 예부터 재상가의 별장이 많더니 최근 민충정공(閔忠正公)의 별장 음벽정(飮碧亭)이 유명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1936.03.21.
경성동명점고(京城洞名點考)(3)
성북동이 이번에 새로 서울이 되어 성북정으로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은 기실 옛날에는 여기도 서울 장안이었다. 그때는 북저굴(북저동(北楮洞)이라고 하였고, 또는 성북둔(城北屯)이라고 하였는데 여기는 진장담는 “절메주”를 만들어 팔기로 유명하던 곳이다. 이것이 요새 말로는 전매사업이라고 할까. 독점사업이라 할까. 어쨌든 이 성북사람만이 하던 일이었는데 영조 때 창의문 밖 사람들이 이 일을 침범해서 싸움이 크게 벌어지며 영종께서 타첩을 시켜 두 곳에서 다 이 일을 갖도록 하시었다.
지금도 여기 사람들의 주요한 업이 되어 있는 세탁업은 그 때부터 유명하던 것이오. 더구나 여기는 복숭아꽃이 유명하야 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북둔도화천하홍(北屯桃花天下紅)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부종도화이위치(不種桃花以爲恥)라는 시구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이래서 여기는 예부터 재상가의 별장이 많더니 최근 민충정공(閔忠正公)의 별장 음벽정(飮碧亭)이 유명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1936.03.21.
지리적으로 서울 중심부와 가깝지만, 서쪽으로 서울성곽, 북쪽으로 북한산이 맞닿아 있어 한적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지금은 큰 길이 나 있지만 삼, 사십년 전만 해도 그 자리에 물이 흐르고, 양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큰 바위가 어우러진 마을이었다. 성북동을 감싸고 있는 산은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에 가려 옛 모습을 잃었다. 그러나 능선을 따라 생긴 골목길은 산길을 올라가는 듯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물이 풍부한 마을이었다. 현재 길상사에서 성북초등학교 뒤쪽으로 흐르던 개천은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길어다 마셨다. 삼청각 위쪽 개천은 물이 맑아 가재를 잡으러 가기도 하였다. 영조 41년(1765)에 성북동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한 생업이 없어 어려움을 겪자 나라에서 마전을 하는 권리를 줬다. 마전은 직물을 삶거나 빨아서 볕에서 바래는 것을 말한다. 물이 많고 넓은 돌이 있던 성북동은 마전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성북동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시장에서 거둔 광목을 마전하는 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현재 성북초등학교 맞은 편 금녕약국이 있는 아래쪽이 마전터인데, 빨래를 한 모시와 광목 따위를 간송미술관이 있는 자리 뒤쪽 풀밭에 널어 말렸다. 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나무와 돌이 많아 자연환경은 좋았지만 교통은 불편하였다. 사람이 다닐 정도밖에 되지 않는 폭이 좁은 길 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집에 들어가려면 흐르는 개천 위에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야 했다. 성북동은 1941년부터 자연공원보전을 위한 풍치지구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개발에서 보호되었으나, 도로를 만들거나 건물을 지을 때 제약을 받아 마을사람들이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지리적으로 서울 중심부와 가깝지만, 서쪽으로 서울성곽, 북쪽으로 북한산이 맞닿아 있어 한적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지금은 큰 길이 나 있지만 삼, 사십년 전만 해도 그 자리에 물이 흐르고, 양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큰 바위가 어우러진 마을이었다. 성북동을 감싸고 있는 산은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에 가려 옛 모습을 잃었다. 그러나 능선을 따라 생긴 골목길은 산길을 올라가는 듯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물이 풍부한 마을이었다. 현재 길상사에서 성북초등학교 뒤쪽으로 흐르던 개천은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길어다 마셨다. 삼청각 위쪽 개천은 물이 맑아 가재를 잡으러 가기도 하였다. 영조 41년(1765)에 성북동에 사는 사람들이 마땅한 생업이 없어 어려움을 겪자 나라에서 마전을 하는 권리를 줬다. 마전은 직물을 삶거나 빨아서 볕에서 바래는 것을 말한다. 물이 많고 넓은 돌이 있던 성북동은 마전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성북동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시장에서 거둔 광목을 마전하는 일로 생활을 꾸려나갔다. 현재 성북초등학교 맞은 편 금녕약국이 있는 아래쪽이 마전터인데, 빨래를 한 모시와 광목 따위를 간송미술관이 있는 자리 뒤쪽 풀밭에 널어 말렸다. 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나무와 돌이 많아 자연환경은 좋았지만 교통은 불편하였다. 사람이 다닐 정도밖에 되지 않는 폭이 좁은 길 옆으로 집들이 있었고, 집에 들어가려면 흐르는 개천 위에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야 했다. 성북동은 1941년부터 자연공원보전을 위한 풍치지구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 중 10%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이 개발에서 보호되었으나, 도로를 만들거나 건물을 지을 때 제약을 받아 마을사람들이 불편을 겪기도 하였다.
마전과 훈조막 일로 생업을 삼았던 사람들의 삶도 점차 변화해 갔다. 집 근처에 평평한 땅을 골라 호박, 옥수수, 감자 따위를 심어 좌판에 내다팔던 것에서 상점과 시장이 서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약국·목욕탕·안경원·음식점 등이 문을 열었다. 1967년 삼선교-성북경찰서 구간의 복개 작업이 시작되며 현대식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다음해 현대식 시장인 청계천 세운상가와 성북동 삼선교상가가 건립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삼선교에는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에 버금갈 정도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1970~80년대 대저택이 모여 부촌이 형성되고, 큰 규모의 요릿집이 생겨나며 일자리가 늘어났다. 대원각과 삼청각에는 백여 명이나 되는 직
원들이 근무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의상실이나 미용실 같은 가게들이 생겨났다.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상점들도 호황을 이루었다.
“1976년에는 삼선교에서 여기(홍익중고등학교 앞)까지 오면서 의상실이 한 4개인가 있더라고. 그러더니 나중에는 뭐라 그럴까 7~8년 그 정도 될 때는 한 열 몇 개가 생겼어요. 성북동이 아마 부촌이라고 해서 많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전에는 지금도 그렇겠지만 성북동 하면 부촌이라고 하잖아요. 그때는 대원각이랑 삼청각 거기 아가씨들이 많았어요. 그때가 제일 장사가 잘 됐지.”(김남숙 인터뷰)
상점들은 성북천의 복개와 도로 확장에 따라 자리를 이동하거나 사라졌다. 1977년부터는 성북천 상류지역(운수교부터 쌍다리 방향)이 복개되었고, 1990년대까지 나머지 구간이 차츰 복개 되며 하천은 모두 도로로 바뀌었다. 넓어진 길 양쪽에는 상가건물이 세워졌다.
마전과 훈조막 일로 생업을 삼았던 사람들의 삶도 점차 변화해 갔다. 집 근처에 평평한 땅을 골라 호박, 옥수수, 감자 따위를 심어 좌판에 내다팔던 것에서 상점과 시장이 서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약국·목욕탕·안경원·음식점 등이 문을 열었다. 1967년 삼선교-성북경찰서 구간의 복개 작업이 시작되며 현대식 상가와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다음해 현대식 시장인 청계천 세운상가와 성북동 삼선교상가가 건립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삼선교에는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에 버금갈 정도의 상권이 형성되었다.
1970~80년대 대저택이 모여 부촌이 형성되고, 큰 규모의 요릿집이 생겨나며 일자리가 늘어났다. 대원각과 삼청각에는 백여 명이나 되는 직
원들이 근무하였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의상실이나 미용실 같은 가게들이 생겨났다.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상점들도 호황을 이루었다.
“1976년에는 삼선교에서 여기(홍익중고등학교 앞)까지 오면서 의상실이 한 4개인가 있더라고. 그러더니 나중에는 뭐라 그럴까 7~8년 그 정도 될 때는 한 열 몇 개가 생겼어요. 성북동이 아마 부촌이라고 해서 많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전에는 지금도 그렇겠지만 성북동 하면 부촌이라고 하잖아요. 그때는 대원각이랑 삼청각 거기 아가씨들이 많았어요. 그때가 제일 장사가 잘 됐지.”(김남숙 인터뷰)
상점들은 성북천의 복개와 도로 확장에 따라 자리를 이동하거나 사라졌다. 1977년부터는 성북천 상류지역(운수교부터 쌍다리 방향)이 복개되었고, 1990년대까지 나머지 구간이 차츰 복개 되며 하천은 모두 도로로 바뀌었다. 넓어진 길 양쪽에는 상가건물이 세워졌다.
그때 그 시절-성북동의 상점
선잠단과 운수교 주변으로 오래된 상점들이 몇 십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성암탕’은 성북동의 대중목욕탕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곳이다. 성암탕 보다 먼저 이북에서 온 부부가 운영하던 ‘삼보탕’(현재 우편취급소 근처)이 있었으나 1980년대에 없어졌다. 맞은편에는 1967년에 생긴 ‘경일안경원’이 있다. 1960년대 초 돈암동 로터리에 있던 ‘돈암안경원’에 이어 성북구에서 두 번째로 생긴 안경점이다. 최순우 옛집 골목 어귀(현재 원희패션)에는 중국인이 직접 경영하는 중국집 ‘실낙원’이 있었다. 1980년대 새로 지어진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기며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하였으나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가면서 문을 닫았다. ‘옛날중국집’은 성북치안센터 맞은편 골목에 있는 음식점으로 35년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순우 옛집 골목은 ‘두부골목’으로 불렸다. 노부부가 하는 두부가게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처음에는 돈암동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떼어다 팔다가 나중에는 이곳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고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배달하였다. 성곽 앞 공터(현 성북동 쉼터)에는 혜성병원이, 성북초등학교 앞에는 금녕약국이 있었다. 혜성병원은 1980년대 도로정비와 함께 사라졌고, 금녕약국은 1989년 현재 위치(66-5번지)로 이전하였다.
“두부 공장하던 영감도 내가 잘 알지. 여기서 오래 장사를 했거든. 오래했지 그 사람이 머리가 그렇게 좋았어. 우리 집도 옛날에 여기가 가게 터
였었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대문간을 헐어서 가게 터를 만든 거야. 그때 그 할아버지가 두부를 가게에 놔 주는 거야. 근데 그 할아버지가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치부책에다가 적어 가지를 않고. 두부공장에서는 새벽에 오니까 여기다 이렇게 놓고 가잖아. 그럼 오후에 돈 받으러 오는데 어느 집에 놓았는지 일일이 알아야 하잖아. 글을 몰라. 그래서 전부 암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아들들이 공부를 그렇게 잘해가지고 의사도 되고 딸은 약사 되고. 두부 장사를 해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시켰어.”(김배영 인터뷰)
그때 그 시절-성북동의 상점
선잠단과 운수교 주변으로 오래된 상점들이 몇 십 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성암탕’은 성북동의 대중목욕탕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곳이다. 성암탕 보다 먼저 이북에서 온 부부가 운영하던 ‘삼보탕’(현재 우편취급소 근처)이 있었으나 1980년대에 없어졌다. 맞은편에는 1967년에 생긴 ‘경일안경원’이 있다. 1960년대 초 돈암동 로터리에 있던 ‘돈암안경원’에 이어 성북구에서 두 번째로 생긴 안경점이다. 최순우 옛집 골목 어귀(현재 원희패션)에는 중국인이 직접 경영하는 중국집 ‘실낙원’이 있었다. 1980년대 새로 지어진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기며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하였으나 고향인 대만으로 돌아가면서 문을 닫았다. ‘옛날중국집’은 성북치안센터 맞은편 골목에 있는 음식점으로 35년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최순우 옛집 골목은 ‘두부골목’으로 불렸다. 노부부가 하는 두부가게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처음에는 돈암동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떼어다 팔다가 나중에는 이곳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고 리어카에 싣고 다니며 배달하였다. 성곽 앞 공터(현 성북동 쉼터)에는 혜성병원이, 성북초등학교 앞에는 금녕약국이 있었다. 혜성병원은 1980년대 도로정비와 함께 사라졌고, 금녕약국은 1989년 현재 위치(66-5번지)로 이전하였다.
“두부 공장하던 영감도 내가 잘 알지. 여기서 오래 장사를 했거든. 오래했지 그 사람이 머리가 그렇게 좋았어. 우리 집도 옛날에 여기가 가게 터
였었어.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대문간을 헐어서 가게 터를 만든 거야. 그때 그 할아버지가 두부를 가게에 놔 주는 거야. 근데 그 할아버지가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치부책에다가 적어 가지를 않고. 두부공장에서는 새벽에 오니까 여기다 이렇게 놓고 가잖아. 그럼 오후에 돈 받으러 오는데 어느 집에 놓았는지 일일이 알아야 하잖아. 글을 몰라. 그래서 전부 암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아들들이 공부를 그렇게 잘해가지고 의사도 되고 딸은 약사 되고. 두부 장사를 해가지고 그렇게 공부를 시켰어.”(김배영 인터뷰)
큰길로 나왔다. 버스와 합승이 지나가고 지저분한 가게가 늘어선 큰길. 잡화상 다음에 식료품점이 있고, 그 옆에는 이발소.양장점.미용원.약방.중국요릿집 그리고 또 식료품점이 무질서하게 늘어섰다. 헌 가구가 두어개 놓인 목공소, 견본으로 단 한 개의 쉐타가 걸려있는 편물점도 있다.
김태길, 「구름낀 하오」, 1963
큰길로 나왔다. 버스와 합승이 지나가고 지저분한 가게가 늘어선 큰길. 잡화상 다음에 식료품점이 있고, 그 옆에는 이발소.양장점.미용원.약방.중국요릿집 그리고 또 식료품점이 무질서하게 늘어섰다. 헌 가구가 두어개 놓인 목공소, 견본으로 단 한 개의 쉐타가 걸려있는 편물점도 있다.
김태길, 「구름낀 하오」, 1963
영조 43년(1767) 가을,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직물을 빨거나 삶아서 볕에서 바래는 마전 기술을 익히게 하고, 도성의 면木, 베布, 모시苧를 포백曝白하는 일감을 받도록 했다. 또, 메주를 쑤는 훈조막燻造幕을 두어 마전일을 하기 어려운 겨울에도 백성들이 살 궁리를 하게 하였다. 가마솥을 걸고 콩을 삶아 메주를 쑤던 곳은 ‘북적 북적’ 메주 쑤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여 북적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조 43년(1767) 가을,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직물을 빨거나 삶아서 볕에서 바래는 마전 기술을 익히게 하고, 도성의 면木, 베布, 모시苧를 포백曝白하는 일감을 받도록 했다. 또, 메주를 쑤는 훈조막燻造幕을 두어 마전일을 하기 어려운 겨울에도 백성들이 살 궁리를 하게 하였다. 가마솥을 걸고 콩을 삶아 메주를 쑤던 곳은 ‘북적 북적’ 메주 쑤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여 북적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수립까지 백년 남짓한 세월동안 세상은 바뀌었지만 성북동의 자연과 그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이웃 동네에서는 성북동을 ‘마전으로 먹고 사는 동리’라고 불렀다. 혜화동, 명륜동, 옆 마을 사람도 머리에 한가득 빨래를 이고 성북동으로 넘어왔다. 하얀 광목이 흐르는 물을 따라 넘실대고, 풀밭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펄럭였다. 성북동은 온통 하얗고 파랗고 푸르렀다.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수립까지 백년 남짓한 세월동안 세상은 바뀌었지만 성북동의 자연과 그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였다. 이웃 동네에서는 성북동을 ‘마전으로 먹고 사는 동리’라고 불렀다. 혜화동, 명륜동, 옆 마을 사람도 머리에 한가득 빨래를 이고 성북동으로 넘어왔다. 하얀 광목이 흐르는 물을 따라 넘실대고, 풀밭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펄럭였다. 성북동은 온통 하얗고 파랗고 푸르렀다.
그리고 수천 호에서 퍼다 쓰느라고 우물물들은 거의 밑바닥이 드러나서 겨울뿐 아니라 봄까지 물소동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난 겨울부터 꽁꽁 얼은 땅덩이를 파헤치면서 수도가 성북동 꼭대기까지 뚫고 올라온 것이다.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고 좋아들 하였으나 한 보름 지나니까나 고동만 틀면 펑펑 쏟아지던 물줄기가 자라 오줌이 되었고 며칠이 지나서는 물방울 하나 안떨어지는 병신이 되었다. 이러기를 한 달이 지나도 물은 안 나오고 수도전은 말뚝마냥 멀끔이 서 있기만 해서 그림속의 떡이 되고 말았다.
김기창, 「수도와 전화와 하이힐」, 1957.
그리고 수천 호에서 퍼다 쓰느라고 우물물들은 거의 밑바닥이 드러나서 겨울뿐 아니라 봄까지 물소동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난 겨울부터 꽁꽁 얼은 땅덩이를 파헤치면서 수도가 성북동 꼭대기까지 뚫고 올라온 것이다.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고 좋아들 하였으나 한 보름 지나니까나 고동만 틀면 펑펑 쏟아지던 물줄기가 자라 오줌이 되었고 며칠이 지나서는 물방울 하나 안떨어지는 병신이 되었다. 이러기를 한 달이 지나도 물은 안 나오고 수도전은 말뚝마냥 멀끔이 서 있기만 해서 그림속의 떡이 되고 말았다.
김기창, 「수도와 전화와 하이힐」,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