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 「그네, 「구름」, 「파랑새」, 「완화삼」, 「고향산천」, 「안골포」, 오페라 「장보고」의 작곡가이다.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부산에서 윤이상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벌었으며, 1970년 잡지 『월간 음악』을 만들어 음악에 대한 정보와 음악계 소식을 알렸다. 한글 교육에도 뜻을 두어 자신의 姓을 ‘김’에서 ‘금’으로 고쳐 읽고, 자녀의 이름을 한글로 지었다. 1960년대 정릉동에 땅을 마련하여 정릉천의 물과 모래로 벽돌을 만들고 직접 설계하여 집을 지었다. 둘째 아들인 지휘자 금난새는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곡 「그네」의 작곡가 금수현은 경상남도 김해 대저면에서 태어났다. 고향마을은 낙동강 강물에 쓸려온 모래와 흙이 삼각주를 이루어 평야가 만들어진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물과 흙이 만든 땅에 기대어 살았고, 아이들은 강변 갈대밭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커갔다. 금수현은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의 땅콩 밭이 있는 강변 모래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강바람과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어떤 연주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음악가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은 대저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학예회 이중창 무대에 설 가수로 금수현이 뽑혔고, 방과 후에 담임선생님 지도로 연습한 노래를 학예회에 선보였다. 무대에 서서 받은 큰 박수와 칭찬은 가슴 벅찬 경험을 안겨 주어,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그 해 낙동강이 범람하여 땅콩농사가 큰 피해를 입고, 보리밥조차 빚을 내어 먹어야 할 만큼 어려운 생활에 처하였다.
가족들은 부산 제2상업학교에 다니던 금수현이 은행에 취직해서 생계에 도움을 주길 바랐다. 이 무렵 몇 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숙부를 환영하기 위한 마을잔치가 열렸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숙부는 서투른 바이올린 솜씨로 일본민요 한 곡과 아리랑을 연주한 후, 축음기를 틀었다. 그동안 눈으로만 보았던 악보 속의 음률을 생생한 연주로 들은 첫경험이었다. 한참동안 음악에 빠져있던 금수현은 음악학교에 진학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등 이탈리아 민요 레코드와 악보를 구해 공부를 하고,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피아노가 있는 학교 친구 집에서 독학으로 연주 연습을 하였다.
일본으로 간 금수현은 신문배달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며 자신의 힘으로 동경 동양음악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 다양한 과목을 통해 음악이‘추상적인 예술이 아니라 과학적인 학문’임을 깨달았을 때,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졌던 음악이 학문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곡과가 따로 없어 성악과에 들어갔지만, 작곡 수업을 들으며 아리아 <심봉사의 탄식>을 졸업 작품으로 발표하였다. 이 곡으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혼란에 휩싸인 일본을 떠나 1941년, 4년간의 동경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마산·통영에서 공연을 한다. 이듬해에는 부산 동래고등여학교의 음악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여가 내외를 하던 당시에는 미혼 남자를 여학교 교사로 채용하기를 꺼려해, 6개월 안에 결혼하기를 바랐다. 음악가를 배우자로 삼고 싶어 했던 금수현은 동료 선생의 친구가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도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관심을 갖게 된 금수현은 학적부에서 소개 받은 전혜금의 사진을 찾아보고 연락이 닿길 기다렸다.
그러던 중 친구를 따라 소설가 김말봉의 집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다. 인연이었는지 김말봉이 인천에 교사로 있는 딸이라며 보여준 사진 속 여성이 바로 전혜금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말봉의 소개로 두 사람은 1943년 가을 부산에서 혼례를 올렸다.
지인의 별장 한 채를 빌려 신혼살림을 꾸리고 첫 아들을 낳지만 폐렴으로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아이와 백일 간의 짧은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 금수현은「1백 5일의 인생」이란 시를 지었고, 부부는 음악을 통해서 당시의 아픔을 이겨냈다. 해방을 얼마 앞두고 동래에 있는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해방이 되었는데도 부를 수 있는 우리의 노래가 없었다. 금수현은 <8월 15일>, <새노래>를 작곡하여 알렸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하는 행진곡 <8월 15일>을 불렀다. 또, 윤이상, 김호민 등 음악교사 서른 명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부산 미국 공보원과 문화원 등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해방 전 서울로 올라가 몇 년 간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장모 김말봉이 하루는 부산으로 딸을 보러 왔다. 사위가 작곡한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대견했던 김말봉은 같은 예술가로서 함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금수현은 흔쾌히 장모가 불러주는 시조에 맞춰 즉석에서 작곡을 했다. 이렇게 완성된 곡이 그네 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듯한 노랫말과 민요풍 가락으로 지금까지 애창가곡으로 불리는 <그네>(1946)이다.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부산항 공립고등여학교(지금의 경남여고) 교감을 맡은 금수현은 한글교육에 뜻을 두고 자신의 성을 ‘김金’에서 ‘금’으로 고쳐 읽었다. 일제강점기에 핍박받은 우리말을 올바로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해방 후 태어난 아들 이름도 ‘뿌리’라고 지었지만 한글 이름을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관례에 막히고 만다. 어쩔 수 없이 한글 이름이지만 한자가 있는 ‘나라’로 이름을 고쳤다. 한국사람이 우리말인 한글이름을 쓸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며 언론에 호소하고 정책을 바꾸려는 목소리를 높였다. 금수현의 주장이 공감을 얻어 둘째 아들 난새부터 누리, 내리, 노상까지 4남매는 한글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하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근심을 바람이 실어가네
김말봉 시, 금수현 곡 「그네」 1946
또한, 음악교과서 『음악글』을 순우리말로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 전에는 제대로 된 음악교과서가 없었고, 음악용어는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 다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음악용어 제정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오선’은 ‘다섯줄’,‘ 소절’은 ‘마디’, ‘음부기호’는 ‘음자리표’ 등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노력으로 교과목 중에 음악용어가 가장 먼저 한글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역 음악인들과 ‘경남음악협회’를 만들어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음악콩쿨을 열고, 《음악주보》(1946)를 만들었다.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있을 때는 매월 ‘희망음악회’를 열었는데, 관객들이 원하는 신청곡을 음악가들이 연주했고, 원하는 사람은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일반인들이 조금 더 음악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극장을 개방하고 유명한 연주자를 초대해 수준 높은 음악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극장의 인기가 높아지며 정기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위한 극장 소속의 음악극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을 모아 ‘새들예술원’을 만들고, 악보 보는 방법과 발성법 등 기초부터 가르쳐 공연을 올렸다.
교육자로서 학교 교육 전반에 관심을 가졌던 금수현은 교과서 개정, 수업 방식 개선 등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금수현이 고안한 ‘이동식학습안’은 각 과목마다 특성화된 교실로 이동해 수업을 받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1953년 교장으로 부임한 경남여중에서 시범 운영되었다. 1957년에는 우리말을 보급하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편수관으로 서울에 올라온다. 정부가 주장한‘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적는 한글간소화’에 반대서명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시골로 발령을 받은 지 1년만의 일이었다. 편수관으로 국정교과서 편찬, 외래어 간판 한글화 등 올바른 우리말을 알리려는 활동을 계속하며, 음악용어사전과 인명사전 출판에도 참여한다.
1966년에는 ‘영필하모니관현악단’을 창설한다. 잠시 정치계에 몸담으며 국회의원에 출마까지 했지만 실패하면서 몇 달 동안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던 중이었다. 이웃에 이사 온 작곡가 정윤주는 금수현을 찾아와 관현악단 창설을 제안하였다. 당시에는 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뿐이어서 음악을 전공한 젊은 연주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적고, 한국 작곡가의 곡이 공연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금수현은 우리나라 음악계를 활성화시키자는 결심을 하고 관현악단의 이사장을 맡는다. 음악교육을 바로잡으려 음악 교육과정에 국악을 넣고, 일반 대중이 건전한 음악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운동도 펼쳤다.
이즈음 부산 집에 세를 들어 살던 사람의 제안으로 정릉동 논 300평과 부산 집을 바꾸었다. 살고 있던 용두동보다 교통이 불편하긴 했지만 5남매가 자라면서 넓은 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사를 결심하였다. 건축비가 없어 고민하던 금수현은 혼자 건축 책을 보며 설계 도면을 그리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방한과 방온, 방습, 방음을 위해 이중벽을 고안하여, 시멘트 벽돌을 쌓은 바깥으로 공간을 두고 빨간색 벽돌로 벽을 한 번 더 쌓았다. 아이들도 힘을 합쳐 집 앞의 개천에서 모래를 퍼다 나르고 단단한 벽돌을 만들었다. 이때는 정릉천의 물과 모래를 이용해 벽돌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벽돌을 사거나 직접 만들어 썼다.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방 4개를 두고, 거실과 각 방들 사이에는 공기구멍을 만들어 바람이 통하게 했다.
우리는 용두동 집을 팔기로 하고 정릉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 땅 옆에 2미터정도의 개천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일종의 기적이 일어난다. 약간의 폭우가 쏟아지고 나면 개천위에 왕모래가 두자쯤 쌓인다. 시멘트벽돌을 찍기에 안성맞춤이란다. … 나로서는 처음 짓는 집이라 연구를 안 할 수 없다.
- 금수현, 「왕모래집」
집이 완공되고 정릉 생활을 하며 가까운 곳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공시설이 없는 것을 알고, 남은 땅에 유치원을 짓기로 하였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유치원 건물을 지었고, 1968년 결혼 25주년 기념에 맞춰 완성된 ‘금잔디유치원’에서 부부는 은혼식을 올렸다. 시조 작가 이은상 선생이 주례를 맡고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이 축사를, 테너 박인수가 금수현이 작곡한 <구름>을 불러주었다. 5남매는 부모님의 은혼식을 축하하는 무언극無言劇을 공연했다.
음악가가 만든 유치원답게 금수현이 원가園歌를 짓고,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도 만들어 함께 불렀다. 결혼으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아내는 유치원 일에 의욕을 보여,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부부동반 모임까지 열어 이웃과 화합하고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유치원이 지금 45회 졸업생이 나갔으니까 거의 50년이야. … 오페레타를 지어서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거야. 피터팬같이. 하도 이뻐서 KBS에 교섭을 해서 어린이 시간에 우리 유치원이 전부 가서 오페레타도 하고. 정릉 지역은 애정을 가지고 계몽을 한 곳이에요. 금수현이 즉석에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적어가며 유치원을 얼마나 도왔다고. 지역사회. 어머니 모임 뿐 아니라 아버지 모임도 하고, 또 연말에는 가족모임. 부부모임 등.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 아내 전혜금의 말
금수현은 음악을 널리 전하려는 뜻을 세우고, 전문 음악잡지가 거의 없던 시절 《월간 음악》을 만들었다. 친구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아두고 시작한 일이었다. ‘음악교실’, ‘상식 음악 강좌’등을 실은 창간호가 1970년 7월에 발간되었다. 금수현은 창간사에서 ‘이 땅의 음악지의 역사가 항시 불행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땅에 풍성한 생활과 아름다운 음악이 가득 차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잡지 발행에 힘을 쓰는 한편 몇 몇 지인들과 힘을 모아 음악가들의 창조 공간이자 음악제를 열 수 있는 ‘안골음악촌’을 진해 바닷가 언덕에 열었다. 음악촌에는 여름이면 음악가들이 찾아와 작곡과 연주 연습을 하였고, 금수현도 이곳에 머물며 후배 음악인들과 교류하며 곡을 썼다. 《월간 음악》 발행비를 조달하느라 힘들게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교인 대저초등학교의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피아노를 기증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망설임 없이 졸업 동문을 대표하여 선뜻 나섰다. 연습할 피아노가 없어 고생했던 자신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월간 음악》의 원고와 외부청탁 수필, 음악인 인명록 발간을 위해 한 달에 3백장이 넘는 원고를 작성하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건강이 나빠질수록 ‘작곡가로서 오페라 한 곡을 남기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다. 오페라 주제는 신라의 해상무역왕 ‘장보고’였다. 장보고의 활동무대를 수 십 차례 답사하고 극중 이름 하나까지 정확하게 고증하려 자료를 거듭해서 검토했다. 대본을 쓰고, 해마다 1막씩 만들어 7년만인 1991년 연주시간 2시간 10분, 총 3막으로 구성된 561쪽의 악보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장보고>가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2년 건강 악화로 생을 마감한다. 그해, 고향의 강변 제방에는 아들 누리가 조각한 <그네> 노래비가 세워졌고, 2013년에는 부산에서 살던 집 뒤에 ‘금수현음악살롱’이 세워졌다. 금수현이 손수 짓고 작품 활동을 한 정릉집과 금잔디유치원은 45년 전 모습 그대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 작은 음악의 전당으로 남아있다.
가곡 「그네」의 작곡가 금수현은 경상남도 김해 대저면에서 태어났다. 고향마을은 낙동강 강물에 쓸려온 모래와 흙이 삼각주를 이루어 평야가 만들어진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물과 흙이 만든 땅에 기대어 살았고, 아이들은 강변 갈대밭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커갔다. 금수현은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의 땅콩 밭이 있는 강변 모래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강바람과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어떤 연주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음악가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은 대저국민학교 3학년 때였다. 학예회 이중창 무대에 설 가수로 금수현이 뽑혔고, 방과 후에 담임선생님 지도로 연습한 노래를 학예회에 선보였다. 무대에 서서 받은 큰 박수와 칭찬은 가슴 벅찬 경험을 안겨 주어,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그 해 낙동강이 범람하여 땅콩농사가 큰 피해를 입고, 보리밥조차 빚을 내어 먹어야 할 만큼 어려운 생활에 처하였다.
가족들은 부산 제2상업학교에 다니던 금수현이 은행에 취직해서 생계에 도움을 주길 바랐다. 이 무렵 몇 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숙부를 환영하기 위한 마을잔치가 열렸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숙부는 서투른 바이올린 솜씨로 일본민요 한 곡과 아리랑을 연주한 후, 축음기를 틀었다. 그동안 눈으로만 보았던 악보 속의 음률을 생생한 연주로 들은 첫경험이었다. 한참동안 음악에 빠져있던 금수현은 음악학교에 진학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등 이탈리아 민요 레코드와 악보를 구해 공부를 하고,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피아노가 있는 학교 친구 집에서 독학으로 연주 연습을 하였다.
일본으로 간 금수현은 신문배달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며 자신의 힘으로 동경 동양음악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 다양한 과목을 통해 음악이‘추상적인 예술이 아니라 과학적인 학문’임을 깨달았을 때, 그동안 막연하게 느껴졌던 음악이 학문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곡과가 따로 없어 성악과에 들어갔지만, 작곡 수업을 들으며 아리아 <심봉사의 탄식>을 졸업 작품으로 발표하였다. 이 곡으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혼란에 휩싸인 일본을 떠나 1941년, 4년간의 동경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마산·통영에서 공연을 한다. 이듬해에는 부산 동래고등여학교의 음악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여가 내외를 하던 당시에는 미혼 남자를 여학교 교사로 채용하기를 꺼려해, 6개월 안에 결혼하기를 바랐다. 음악가를 배우자로 삼고 싶어 했던 금수현은 동료 선생의 친구가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도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관심을 갖게 된 금수현은 학적부에서 소개 받은 전혜금의 사진을 찾아보고 연락이 닿길 기다렸다.
그러던 중 친구를 따라 소설가 김말봉의 집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다. 인연이었는지 김말봉이 인천에 교사로 있는 딸이라며 보여준 사진 속 여성이 바로 전혜금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말봉의 소개로 두 사람은 1943년 가을 부산에서 혼례를 올렸다.
지인의 별장 한 채를 빌려 신혼살림을 꾸리고 첫 아들을 낳지만 폐렴으로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아이와 백일 간의 짧은 인연을 기억하기 위해 금수현은「1백 5일의 인생」이란 시를 지었고, 부부는 음악을 통해서 당시의 아픔을 이겨냈다. 해방을 얼마 앞두고 동래에 있는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고 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해방이 되었는데도 부를 수 있는 우리의 노래가 없었다. 금수현은 <8월 15일>, <새노래>를 작곡하여 알렸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하는 행진곡 <8월 15일>을 불렀다. 또, 윤이상, 김호민 등 음악교사 서른 명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부산 미국 공보원과 문화원 등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해방 전 서울로 올라가 몇 년 간 중단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장모 김말봉이 하루는 부산으로 딸을 보러 왔다. 사위가 작곡한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대견했던 김말봉은 같은 예술가로서 함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금수현은 흔쾌히 장모가 불러주는 시조에 맞춰 즉석에서 작곡을 했다. 이렇게 완성된 곡이 그네 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듯한 노랫말과 민요풍 가락으로 지금까지 애창가곡으로 불리는 <그네>(1946)이다.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부산항 공립고등여학교(지금의 경남여고) 교감을 맡은 금수현은 한글교육에 뜻을 두고 자신의 성을 ‘김金’에서 ‘금’으로 고쳐 읽었다. 일제강점기에 핍박받은 우리말을 올바로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해방 후 태어난 아들 이름도 ‘뿌리’라고 지었지만 한글 이름을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관례에 막히고 만다. 어쩔 수 없이 한글 이름이지만 한자가 있는 ‘나라’로 이름을 고쳤다. 한국사람이 우리말인 한글이름을 쓸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며 언론에 호소하고 정책을 바꾸려는 목소리를 높였다. 금수현의 주장이 공감을 얻어 둘째 아들 난새부터 누리, 내리, 노상까지 4남매는 한글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하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근심을 바람이 실어가네
김말봉 시, 금수현 곡 「그네」 1946
또한, 음악교과서 『음악글』을 순우리말로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 전에는 제대로 된 음악교과서가 없었고, 음악용어는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 다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음악용어 제정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오선’은 ‘다섯줄’,‘ 소절’은 ‘마디’, ‘음부기호’는 ‘음자리표’ 등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노력으로 교과목 중에 음악용어가 가장 먼저 한글화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역 음악인들과 ‘경남음악협회’를 만들어 해방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음악콩쿨을 열고, 《음악주보》(1946)를 만들었다.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있을 때는 매월 ‘희망음악회’를 열었는데, 관객들이 원하는 신청곡을 음악가들이 연주했고, 원하는 사람은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일반인들이 조금 더 음악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극장을 개방하고 유명한 연주자를 초대해 수준 높은 음악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극장의 인기가 높아지며 정기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위한 극장 소속의 음악극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젊은이들을 모아 ‘새들예술원’을 만들고, 악보 보는 방법과 발성법 등 기초부터 가르쳐 공연을 올렸다.
교육자로서 학교 교육 전반에 관심을 가졌던 금수현은 교과서 개정, 수업 방식 개선 등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금수현이 고안한 ‘이동식학습안’은 각 과목마다 특성화된 교실로 이동해 수업을 받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1953년 교장으로 부임한 경남여중에서 시범 운영되었다. 1957년에는 우리말을 보급하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문교부 편수관으로 서울에 올라온다. 정부가 주장한‘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적는 한글간소화’에 반대서명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시골로 발령을 받은 지 1년만의 일이었다. 편수관으로 국정교과서 편찬, 외래어 간판 한글화 등 올바른 우리말을 알리려는 활동을 계속하며, 음악용어사전과 인명사전 출판에도 참여한다.
1966년에는 ‘영필하모니관현악단’을 창설한다. 잠시 정치계에 몸담으며 국회의원에 출마까지 했지만 실패하면서 몇 달 동안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던 중이었다. 이웃에 이사 온 작곡가 정윤주는 금수현을 찾아와 관현악단 창설을 제안하였다. 당시에는 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뿐이어서 음악을 전공한 젊은 연주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적고, 한국 작곡가의 곡이 공연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금수현은 우리나라 음악계를 활성화시키자는 결심을 하고 관현악단의 이사장을 맡는다. 음악교육을 바로잡으려 음악 교육과정에 국악을 넣고, 일반 대중이 건전한 음악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운동도 펼쳤다.
이즈음 부산 집에 세를 들어 살던 사람의 제안으로 정릉동 논 300평과 부산 집을 바꾸었다. 살고 있던 용두동보다 교통이 불편하긴 했지만 5남매가 자라면서 넓은 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사를 결심하였다. 건축비가 없어 고민하던 금수현은 혼자 건축 책을 보며 설계 도면을 그리고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방한과 방온, 방습, 방음을 위해 이중벽을 고안하여, 시멘트 벽돌을 쌓은 바깥으로 공간을 두고 빨간색 벽돌로 벽을 한 번 더 쌓았다. 아이들도 힘을 합쳐 집 앞의 개천에서 모래를 퍼다 나르고 단단한 벽돌을 만들었다. 이때는 정릉천의 물과 모래를 이용해 벽돌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벽돌을 사거나 직접 만들어 썼다.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방 4개를 두고, 거실과 각 방들 사이에는 공기구멍을 만들어 바람이 통하게 했다.
우리는 용두동 집을 팔기로 하고 정릉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 땅 옆에 2미터정도의 개천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일종의 기적이 일어난다. 약간의 폭우가 쏟아지고 나면 개천위에 왕모래가 두자쯤 쌓인다. 시멘트벽돌을 찍기에 안성맞춤이란다. … 나로서는 처음 짓는 집이라 연구를 안 할 수 없다.
- 금수현, 「왕모래집」
집이 완공되고 정릉 생활을 하며 가까운 곳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공시설이 없는 것을 알고, 남은 땅에 유치원을 짓기로 하였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유치원 건물을 지었고, 1968년 결혼 25주년 기념에 맞춰 완성된 ‘금잔디유치원’에서 부부는 은혼식을 올렸다. 시조 작가 이은상 선생이 주례를 맡고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이 축사를, 테너 박인수가 금수현이 작곡한 <구름>을 불러주었다. 5남매는 부모님의 은혼식을 축하하는 무언극無言劇을 공연했다.
음악가가 만든 유치원답게 금수현이 원가園歌를 짓고,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도 만들어 함께 불렀다. 결혼으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아내는 유치원 일에 의욕을 보여,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부부동반 모임까지 열어 이웃과 화합하고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유치원이 지금 45회 졸업생이 나갔으니까 거의 50년이야. … 오페레타를 지어서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거야. 피터팬같이. 하도 이뻐서 KBS에 교섭을 해서 어린이 시간에 우리 유치원이 전부 가서 오페레타도 하고. 정릉 지역은 애정을 가지고 계몽을 한 곳이에요. 금수현이 즉석에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적어가며 유치원을 얼마나 도왔다고. 지역사회. 어머니 모임 뿐 아니라 아버지 모임도 하고, 또 연말에는 가족모임. 부부모임 등.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 아내 전혜금의 말
금수현은 음악을 널리 전하려는 뜻을 세우고, 전문 음악잡지가 거의 없던 시절 《월간 음악》을 만들었다. 친구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아두고 시작한 일이었다. ‘음악교실’, ‘상식 음악 강좌’등을 실은 창간호가 1970년 7월에 발간되었다. 금수현은 창간사에서 ‘이 땅의 음악지의 역사가 항시 불행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땅에 풍성한 생활과 아름다운 음악이 가득 차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잡지 발행에 힘을 쓰는 한편 몇 몇 지인들과 힘을 모아 음악가들의 창조 공간이자 음악제를 열 수 있는 ‘안골음악촌’을 진해 바닷가 언덕에 열었다. 음악촌에는 여름이면 음악가들이 찾아와 작곡과 연주 연습을 하였고, 금수현도 이곳에 머물며 후배 음악인들과 교류하며 곡을 썼다. 《월간 음악》 발행비를 조달하느라 힘들게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교인 대저초등학교의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피아노를 기증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망설임 없이 졸업 동문을 대표하여 선뜻 나섰다. 연습할 피아노가 없어 고생했던 자신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월간 음악》의 원고와 외부청탁 수필, 음악인 인명록 발간을 위해 한 달에 3백장이 넘는 원고를 작성하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건강이 나빠질수록 ‘작곡가로서 오페라 한 곡을 남기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다. 오페라 주제는 신라의 해상무역왕 ‘장보고’였다. 장보고의 활동무대를 수 십 차례 답사하고 극중 이름 하나까지 정확하게 고증하려 자료를 거듭해서 검토했다. 대본을 쓰고, 해마다 1막씩 만들어 7년만인 1991년 연주시간 2시간 10분, 총 3막으로 구성된 561쪽의 악보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장보고>가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2년 건강 악화로 생을 마감한다. 그해, 고향의 강변 제방에는 아들 누리가 조각한 <그네> 노래비가 세워졌고, 2013년에는 부산에서 살던 집 뒤에 ‘금수현음악살롱’이 세워졌다. 금수현이 손수 짓고 작품 활동을 한 정릉집과 금잔디유치원은 45년 전 모습 그대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 작은 음악의 전당으로 남아있다.
금수현
1919년 부산 대저면 출생
1940년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 졸업
1945년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 교감
1947년 경남도립극장 극장장
1953년 경남여자중학교 교장
1957년 문교부 편수관
1965년 영필하모니악단 이사장
1968년 금잔디유치원 설립
1970년《월간 음악》발간
1982년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1992년 작고
대표작품
가곡 <심봉사의 슬픔(아리아)>, <그네>, <구름>, <파랑새>, <완화삼>, <고향산천>,
<안골포>, 오페라 <장보고>, 동요 <오리>, <나의 집> 등
상훈
녹조훈장(1960), 외솔상(1981), 옥관문화훈장(1992)
금수현
1919년 부산 대저면 출생
1940년 일본 동양음악학교(현 동경음악대학) 졸업
1945년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 교감
1947년 경남도립극장 극장장
1953년 경남여자중학교 교장
1957년 문교부 편수관
1965년 영필하모니악단 이사장
1968년 금잔디유치원 설립
1970년《월간 음악》발간
1982년 사단법인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1992년 작고
대표작품
가곡 <심봉사의 슬픔(아리아)>, <그네>, <구름>, <파랑새>, <완화삼>, <고향산천>,
<안골포>, 오페라 <장보고>, 동요 <오리>, <나의 집> 등
상훈
녹조훈장(1960), 외솔상(1981), 옥관문화훈장(1992)
가곡 <그네>의 작곡가이다.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그네>는 장모인 김말봉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이다. 부산에서 윤이상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벌었다. 전문 음악잡지가 귀하던 때인 1970년 잡지 《월간 음악》을 만들어 음악에 대한 정보와 음악계 소식을 알렸다. 한글교육에도 뜻을 두어 ‘김金’에서 ‘금’으로 자신의 성姓을 고쳐 읽고, 자녀의 이름을 한글로 지었다.
1960년대 정릉동에 땅을 마련하여 직접 집을 설계하고, 정릉천의 물과 모래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둘째 아들 금난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가곡 <그네>의 작곡가이다.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그네>는 장모인 김말봉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이다. 부산에서 윤이상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벌었다. 전문 음악잡지가 귀하던 때인 1970년 잡지 《월간 음악》을 만들어 음악에 대한 정보와 음악계 소식을 알렸다. 한글교육에도 뜻을 두어 ‘김金’에서 ‘금’으로 자신의 성姓을 고쳐 읽고, 자녀의 이름을 한글로 지었다.
1960년대 정릉동에 땅을 마련하여 직접 집을 설계하고, 정릉천의 물과 모래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둘째 아들 금난새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금수현 1919~1992
대저초등학교 3학년 학예회 이중창 무대에서 큰 박수와 칭찬을 받은 금수현은 가슴 벅찬 이 경험을 계기로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음악가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그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던 해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가족들은 부산 제2상업학교에 다니던 금수현이 은행에 취직해 생계에 도움을 주길 바랐지만, 그는 음악학교 진학을 목표로 세웠고 독학으로 공부하고 연주 연습을 하였다.
동경 동양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의 힘으로 공부를 이어가던 금수현은 졸업작품으로 아리아 「심봉사의 탄식」을 발표하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지만 1941년 4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김해로 돌아온다. 이듬해 부산 동래고등여학교의 음악교사로 들어가게 되고 소설가 김말봉의 소개로 전혜금을 만나 1943년 가을 혼례를 올렸다. 장모 김말봉은 딸을 만나러 온 사위와 함께 부산에서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데, 김말봉이 불러주는 시조에 맞춰 금수현이 즉석으로 작곡한 이 곡이 지금까지 애창가곡으로 불리는 「그네」이다.
스물여섯의 금수현은 일제강점기에 핍박받은 우리말을 올바로 되살리고자 한글 교육에 뜻을 두고 자신의 성 ‘김(金)’을 ‘금’으로 고쳐 읽었다. 해방 후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호적에 올리면서 한국 사람이 한글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음악교과서 『음악글』을 순우리말로 만들어 보급하였고 한자말을 우리말로 바꾸는데 힘을 쏟아 교과목 중에 음악용어가 가장 먼저 한글화되었다. 교육자로서 교과서 개정, 수업 방식 개선 등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가까워지길 바라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에는 우리나라 음악계의 활성화를 위해 ‘영필하모니관현악단’을 만들어 이사장을 맡으며 음악교육을 바로 잡으려 음악 교육과정에 국악을 넣고, 일반 대중이 건전한 음악문화를 즐길 수 있는 운동도 펼쳤다.
이즈음 금수현은 정릉동으로 이사를 하지만 건축비가 없었다. 결국 부산 집과 바꾼 논 300평에 직접 건축 책을 보며 집을 짓기 시작했다. 넓은 거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방 4개를 둔 집이 아이들의 힘을 합쳐 만들어졌다.
우리는 용두동 집을 팔기고 하고 정릉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 땅 옆에 2미터 정도의 개천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일종의 기적이 일어난다. 약간의 폭우가 쏟아지고 나면 개천 위에 왕모래가 두 자쯤 쌓인다. 시멘트벽돌을 찍기에 안성맞춤이란다. …… 나로서는 처음 짓는 집이라 연구를 안 할 수 없다.
- 금수현, 「왕모래집」
또 한 번 가족이 힘을 모아 남은 땅에 건물을 지었다. 가까운 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었고 이에 금잔디유치원이 세워졌다. 금잔디유치원은 1968년 3월 정릉3동 683-1번지에 문을 연다. 금수현과의 결혼으로 교사를 그만두어야 했던 아내 전혜금은 유치원 일에 의욕을 보이며 이웃과 화합하고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정릉의 아이들을 키운 금잔디유치원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유치원이 지금 45회 졸업생이 나갔으니까 거의 50년이야. …… 오페레타를 지어서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거야. 피터팬 같이. 하도 이뻐서 KBS에 교섭을 해서 어린이 시간에 우리 유치원이 전부 가서 오페레타도 하고, 정릉 지역은 애정을 가지고 계몽을 한 곳이에요. 금수현이 즉석에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적어가며 유치원을 얼마나 도왔다고. 지역사회, 어머니 모임뿐 아니라 아버지 모임도 하고, 또 연말에는 가족모임, 부부모임 등. 참 재미있게 지냈어요.
- 아내 전혜금의 말
전문 음악잡지가 거의 없던 시절 금수현은 음악을 널리 전하고자 『월간음악』을 만들었다. 잡지 발행에 힘을 쓰고 발행 비용을 조달하느라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음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그럴수록 금수현의 “작곡가로서 오페라 한 곡을 남기겠다”는 목표는 뚜렷해졌다. 주제는 신라의 해상 무역왕 ‘장보고’였다. 드디어 7년 만인 1991년, 금수현은 연주시간 2시간 10분의 총 3막으로 구성된 561쪽의 악보를 완성하였지만 「장보고」가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2년 건강악화로 세상을 등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