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다.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중외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김문집·이상 등과 친분을 가졌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형제들의 집과 셋방을 전전하며 지내다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1936년 정릉 근처 암자에서 요양하였다. 휴양 중에도 「산골 나그네」, 「토끼」, 「슬픈 이야기」, 「야앵」 등 30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 집을 전전하다 폐결핵으로 요절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동백꽃」, 「봄봄」, 「따라지」 등이 있다.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가이다.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인지와 문예지, 신문에 「두꺼비」, 「봄봄」 등 여러 편을 발표하고, 1935년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형제들의 집과 셋방을 전전하며 지내다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1936년 정릉 근처 암자에서 요양하였다. 휴양 중에도 「산골 나그네」, 「토끼」, 「슬픈 이야기」, 「동백꽃」, 「야앵」, 「따라지」 등 30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 집을 전전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소설가이다.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동인지와 문예지, 신문에 「두꺼비」, 「봄봄」 등 여러 편을 발표하고, 1935년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형제들의 집과 셋방을 전전하며 지내다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1936년 정릉 근처 암자에서 요양하였다. 휴양 중에도 「산골 나그네」, 「토끼」, 「슬픈 이야기」, 「동백꽃」, 「야앵」, 「따라지」 등 30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 집을 전전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