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다.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로 등단하였다. 휘문고보에서 가람 이병기에게 문학을 배우고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서정적이며 섬세한 묘사와 예술적 완성도로 근대시기를 대표하는 단편 소설 작가로 꼽힌다. 1933년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을 주관했다. 1933년 성북구 성북로26길 8에 ‘수연산방’이란 당호를 붙이고 1946년 월북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달밤』(1933), 『손거부』(1941), 『돌다리』(1943) 등의 단편과 『황진이』(1936), 『왕자호동』(1943) 등의 장편을 남기는 등 활 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달밤』과 『손거부』 등은 성북동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왔다. 얻어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 뿌리에서 새로 찢어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 볼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설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저윽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오고야 만 것이었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요 생선 씻은 물, 깻묵 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선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 <무서록> ‘파초’, 이태준
세 번째 인연 -시대를 품은 공간
· 61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첫 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성북동의 광명은 이 산상의 옛 성벽으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것이다. 한참 쳐다보노라면 성벽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성돌 하나하나 사이도 빤히 드러난다.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란다. 그러다가 찬물에 씽은 눈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면 성벽은 역시 조광보다는 석양의 배경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저녁에 보는 성곽은 확실히 일취 이상의 것이 있다. 풍수에 그을린 화강암의 성벽은 연기 어린 듯 자욱한데 그 반허리를 끊어 비낀 석양은 햇빛이 아니라 고대 미술품을 비추는 환등 빛인 것이다. 나는 저녁 먹기가 아직 이른 때면 가끔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성 터진 고개에서 백악 순성 로를 한참씩 올라간다.
- <무서록> ‘성’, 이태준
벼르고 벼르던 안채를 물자 제일 귀한 금년에, 더욱 초복에 시작해 말복을 통해 치목을 하며 달구질을 하며 참으로 집 귀한 맛을 골수에 느끼다. 목수 다섯 사람 중에 네 사람이 60객들이다. 그 중에도 ‘선다님’으로 불리어지는 탕건 쓴 이는 70이 불원한 노인으로 서울 바닥 목수치고 이 선다님더러 선생님이라고 안 하는 사람은 없다 한다.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 와서 해가 져 먹줄이 보이지 않아야 일손을 뗀다. 젊은이들처럼 재빠르진 못하나 꾸준하다. 남의 일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독실하다. 그들의 연장은 날카롭게는 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대로 힘차겐 문지른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 <무서록>, 이태준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왔다. 얻어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 뿌리에서 새로 찢어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 볼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설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저윽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오고야 만 것이었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요 생선 씻은 물, 깻묵 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선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 <무서록> ‘파초’, 이태준
세 번째 인연 -시대를 품은 공간
· 61
아침마다 안마당에 올라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들고 돌아서면 으레 눈은 건너편 산마루에 끌리게 된다. 산마루에는 산봉우리 생긴 대로 울멍줄멍 성벽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성벽은 아침이 첫 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성북동의 광명은 이 산상의 옛 성벽으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것이다. 한참 쳐다보노라면 성벽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성돌 하나하나 사이도 빤히 드러난다. 내 칫솔은 내 이를 닦다가 성돌 틈을 닦다가 하는 착각에 더러 놀란다. 그러다가 찬물에 씽은 눈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면 성벽은 역시 조광보다는 석양의 배경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저녁에 보는 성곽은 확실히 일취 이상의 것이 있다. 풍수에 그을린 화강암의 성벽은 연기 어린 듯 자욱한데 그 반허리를 끊어 비낀 석양은 햇빛이 아니라 고대 미술품을 비추는 환등 빛인 것이다. 나는 저녁 먹기가 아직 이른 때면 가끔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성 터진 고개에서 백악 순성 로를 한참씩 올라간다.
- <무서록> ‘성’, 이태준
벼르고 벼르던 안채를 물자 제일 귀한 금년에, 더욱 초복에 시작해 말복을 통해 치목을 하며 달구질을 하며 참으로 집 귀한 맛을 골수에 느끼다. 목수 다섯 사람 중에 네 사람이 60객들이다. 그 중에도 ‘선다님’으로 불리어지는 탕건 쓴 이는 70이 불원한 노인으로 서울 바닥 목수치고 이 선다님더러 선생님이라고 안 하는 사람은 없다 한다.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 와서 해가 져 먹줄이 보이지 않아야 일손을 뗀다. 젊은이들처럼 재빠르진 못하나 꾸준하다. 남의 일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독실하다. 그들의 연장은 날카롭게는 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대로 힘차겐 문지른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 <무서록>, 이태준
이태준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수연산방에 머물면서 <달밤><돌다리><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으며,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시절에 쓴 이태준의 글에는 그 시절 가족들이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행복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태준은 가난하고 외로운 초년시절을 지나 그의 생애 중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성북동에 거주하던 때였다고 한다. 덧붙여, 이태준은 수연산방을 아끼는 만큼 성북동의 하늘, 산, 성곽에도 감사하며 살았다. 눈이 덮여 흰 산만을 며칠째 보는 겨울에 그 산이 답답할 법도 한데, 이태준은 석양에 비친 산마루와 성곽을 한 폭의 병풍으로 삼아 성북동의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성북동 수연산방에 기거하며 썼던 수필집 <무서록>은 이태준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태준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수연산방에 머물면서 <달밤><돌다리><황진이> 등의 작품을 집필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으며,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성북동 시절에 쓴 이태준의 글에는 그 시절 가족들이 함께 나누었던 사랑과 행복한 모습이 드러난다. 이태준은 가난하고 외로운 초년시절을 지나 그의 생애 중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성북동에 거주하던 때였다고 한다. 덧붙여, 이태준은 수연산방을 아끼는 만큼 성북동의 하늘, 산, 성곽에도 감사하며 살았다. 눈이 덮여 흰 산만을 며칠째 보는 겨울에 그 산이 답답할 법도 한데, 이태준은 석양에 비친 산마루와 성곽을 한 폭의 병풍으로 삼아 성북동의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성북동 수연산방에 기거하며 썼던 수필집 <무서록>은 이태준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1930년대 성북동 풍경 : 이태준의 소설 「달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인 이태준의 소설 「달밤」 주인공 ‘나’가 말하는 성북동의 모습이다. ‘나’는 성북동을 시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시냇물 소리와 솔바람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황수건은 못난이였다. 소설 속 ‘나’는 “못난이들은 서울에서 대놓고 살 수 없는데 성북동은 시골이기 때문에 못난이 황수건이 눈에 더 잘 띈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황수건과 같은 사람들이 도시에서보다는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이러한 황수건도 이제 성북동에서 살기가 힘들어진다. 성북동에서 ‘노랑수건’하면 자신을 다 알 정도로 유명했던 황수건은 성북동 내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성북동이 신문사의 한 구역으로 배정되면서 신문배달 보조역 직을 잃게 된다. 참외장사는 잘 되지 않고 아내는 달아났다. 소설의 주인공이 보는 황수건은 처량하다. 소설 「달밤」에서 나타나는 성북동은 이제 옛날 시골 동네가 아니었다. 시골이 아닌 성북동에서 황수건이 차지할 곳은 없었다. 1933년 현재 이태준은 변화하는 성북동의 모습을 이 짧은 소설에 담은 것이다.
성북동이 신문사의 한 구역으로 배정되었다는 것은 성북동의 인구가 증가해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5년에 조사된 성북동의 인구는 총 810명이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1920년에는 5명 줄어들어 805명이 거주했다. 성북동의 인구는 1930년대 들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30년 조사에 따르면 성북동의 인구는 1,666명으로, 1920년 조사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를 볼 수 있다.
한편 1933년 말에 조사된 통계에 따르면 성북리에는 총 589호가 있었다. 이 중 농업호수는 2호로 전체 호수의 0.3%에 불과했다. 일제하 1930년대부터 경성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교외지에는 비농업인구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토지도 점포, 주택, 공장 등 비농업적 용도로 전환되었다. 경성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북리의 경우도 이러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30년대 성북동 풍경 : 이태준의 소설 「달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인 이태준의 소설 「달밤」 주인공 ‘나’가 말하는 성북동의 모습이다. ‘나’는 성북동을 시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시냇물 소리와 솔바람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황수건은 못난이였다. 소설 속 ‘나’는 “못난이들은 서울에서 대놓고 살 수 없는데 성북동은 시골이기 때문에 못난이 황수건이 눈에 더 잘 띈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황수건과 같은 사람들이 도시에서보다는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이러한 황수건도 이제 성북동에서 살기가 힘들어진다. 성북동에서 ‘노랑수건’하면 자신을 다 알 정도로 유명했던 황수건은 성북동 내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성북동이 신문사의 한 구역으로 배정되면서 신문배달 보조역 직을 잃게 된다. 참외장사는 잘 되지 않고 아내는 달아났다. 소설의 주인공이 보는 황수건은 처량하다. 소설 「달밤」에서 나타나는 성북동은 이제 옛날 시골 동네가 아니었다. 시골이 아닌 성북동에서 황수건이 차지할 곳은 없었다. 1933년 현재 이태준은 변화하는 성북동의 모습을 이 짧은 소설에 담은 것이다.
성북동이 신문사의 한 구역으로 배정되었다는 것은 성북동의 인구가 증가해서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5년에 조사된 성북동의 인구는 총 810명이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1920년에는 5명 줄어들어 805명이 거주했다. 성북동의 인구는 1930년대 들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30년 조사에 따르면 성북동의 인구는 1,666명으로, 1920년 조사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를 볼 수 있다.
한편 1933년 말에 조사된 통계에 따르면 성북리에는 총 589호가 있었다. 이 중 농업호수는 2호로 전체 호수의 0.3%에 불과했다. 일제하 1930년대부터 경성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교외지에는 비농업인구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토지도 점포, 주택, 공장 등 비농업적 용도로 전환되었다. 경성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성북리의 경우도 이러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5. 이태준의 눈으로 본 1930년대 성북동
단편소설을 잘 써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도 한 상허 이태준은 1933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는다. 일제강점기 말, 잠시세상을 피해 고향인 철원에 내려가기도 했지만, 이태준은 월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성북동에서 지냈다. 성북동 집은 이태준에게 단순한 안식처만이 아니라 작품을 집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집 이름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집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듯 성북동도 그에게 그냥 사는 마을이 아니었다. 성북동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그의 소설의 단골 주제가 되곤 했다. 「달밤」, 「손거부」, 「토끼 이야기」, 「장마」 등은 성북동 사람들, 그리고 성북동에서 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을 따라가면 그가 살았던 1930년대 성북동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가 성북동에 자리 잡은 1933년 무렵의 성북동은 비교적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우선 당시 경성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혜화문과도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다. 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주민들의 진정으로 술집이나 요정의 수가 제한되었고, 상수도 설치, 버스시간 연장 등의 주민 진정이 일부 받아 들여져 주거 환경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있던 지역은 이런 주택단지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초반 ‘대경성계획’을, 후반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하는데 성북동이 포함된 돈암지구는 그중 주택지구로서 1차 사업대상지로 선정되었다. 당시의 계획도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을 보면 성북동은 현재 마전터가 있는 간송미술관 앞까지만 개발이 계획되어 있었다. 즉 수연산방 지역은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태준은 그의 단편소설 「달밤」에서 성북동에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수연산방 앞에는 성북천이 물소리를 내며 흘렀고 ‘솔바람이 쏴―하고’ 불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마전터가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며 마전을 하여 납품할 상점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전은 1910년대까지도 성북동의 몇 안 되는 생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 옆으로는 1908년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일반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이 주택의 사람들은 서로 힘을 모아 총독부에 상수도 개설 등의 청원운동을 하는 등 상당한 주민 자치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6년 개발이 시작되기 전 성북동은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을지언정 조용하면서도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3년부터 성북동에 자리 잡은 이태준의 글에는 주민자치를 하고, 청원 운동을 하던 성북동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태준은 과연 어떤 사람들을 보고 그렸을까?
5. 이태준의 눈으로 본 1930년대 성북동
단편소설을 잘 써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도 한 상허 이태준은 1933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자리를 잡는다. 일제강점기 말, 잠시세상을 피해 고향인 철원에 내려가기도 했지만, 이태준은 월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성북동에서 지냈다. 성북동 집은 이태준에게 단순한 안식처만이 아니라 작품을 집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집 이름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벼루가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집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듯 성북동도 그에게 그냥 사는 마을이 아니었다. 성북동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그의 소설의 단골 주제가 되곤 했다. 「달밤」, 「손거부」, 「토끼 이야기」, 「장마」 등은 성북동 사람들, 그리고 성북동에서 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을 따라가면 그가 살았던 1930년대 성북동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가 성북동에 자리 잡은 1933년 무렵의 성북동은 비교적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우선 당시 경성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혜화문과도 가까워 교통이 편리했다. 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주민들의 진정으로 술집이나 요정의 수가 제한되었고, 상수도 설치, 버스시간 연장 등의 주민 진정이 일부 받아 들여져 주거 환경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있던 지역은 이런 주택단지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초반 ‘대경성계획’을, 후반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하는데 성북동이 포함된 돈암지구는 그중 주택지구로서 1차 사업대상지로 선정되었다. 당시의 계획도가 지금도 남아있는데, 그것을 보면 성북동은 현재 마전터가 있는 간송미술관 앞까지만 개발이 계획되어 있었다. 즉 수연산방 지역은 개발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태준은 그의 단편소설 「달밤」에서 성북동에 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수연산방 앞에는 성북천이 물소리를 내며 흘렀고 ‘솔바람이 쏴―하고’ 불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마전터가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며 마전을 하여 납품할 상점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마전은 1910년대까지도 성북동의 몇 안 되는 생업 가운데 하나였다. 그 옆으로는 1908년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일반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이 주택의 사람들은 서로 힘을 모아 총독부에 상수도 개설 등의 청원운동을 하는 등 상당한 주민 자치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6년 개발이 시작되기 전 성북동은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을지언정 조용하면서도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33년부터 성북동에 자리 잡은 이태준의 글에는 주민자치를 하고, 청원 운동을 하던 성북동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태준은 과연 어떤 사람들을 보고 그렸을까?
다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태준의 수연산방과 한용운의 심우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1933년에 지어졌다. 두 집 모두 큰 규모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상당한 공사비가 들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태준의 경우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용운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도움 등 주변 지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도의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36년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된 이후 성북동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ㄴ, ㄷ, ㅁ자 한옥들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혜화동은 많은 샐러리맨들의 중상급 주거지로 사랑받았는데, 그와 멀지 않은 성북동 역시(성북동뿐만 아니라 돈암지구) 중산층 주거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한옥도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성북동에 중산층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역시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이태준이 그린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다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태준의 수연산방과 한용운의 심우장이다. 공교롭게도 두 집 모두 1933년에 지어졌다. 두 집 모두 큰 규모의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번듯한 기와집이었고 상당한 공사비가 들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태준의 경우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한용운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의 도움 등 주변 지인들의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도의 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36년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시작된 이후 성북동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ㄴ, ㄷ, ㅁ자 한옥들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혜화동은 많은 샐러리맨들의 중상급 주거지로 사랑받았는데, 그와 멀지 않은 성북동 역시(성북동뿐만 아니라 돈암지구) 중산층 주거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한옥도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성북동에 중산층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역시 성북동의 주민이었다. 이태준이 그린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이태준 소설에 비친 성북동 사람들의 직업
지금도 그렇지만 성북동은 1930년대에도, 생산의 장소는 아니었다. 베를 표백하던 마전은 1930년대에는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많이 잃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태준과 같은 문인들(혹은 엘리트들)은 사대문 안에 좋은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서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달밤」의 황수건은 조금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나름 열심히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에서 급사로 일하기도 했고, 거기서 쫓겨난 이후에는 신문사의 보조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님 내외, 자신내외, 이렇게 7식구가 같이 살아 쉬이 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나중에 보조배달원마저 잘리게 되자 그는 다시 삼산학교 급사로 들어갈 요량으로 운동도 하고 학교 사무실을 찾아가 조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자기보다 힘 좋고 일 잘하는 급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거부」의 손서방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부인과 아들둘을 둔 가장이다. 딸도 하나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다. 아들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그는 아들의 책값과 월사금을 대느라 ‘일정한 직업은 없지만’ ‘진일 마른일 다 쫓아 댕’기다 하루는 채석장에서 일하다 손이 쪄 엄지손가락 하나를 못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아들을 하나 더 낳는다. 이태준의 눈에 비친 성북동의 토막민들은 항상 취업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1930년대 취업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비단 황수건과 손서방 뿐만이 아니었다. 1910년에 약 1천 3백만 명이었던 인구는 1930년이되면서 이미 2천만 명을 돌파했고, 1930년에는 2천 3백만 명에 육박한다. 25년 만에 약 77%에 가까운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1930년 조사를 보면 경성의 무업자는 무려 65.32%에 달했다. 물론 당시의무업자에는 학생, 지주, 종속자 등 직업 없이 다른 사람들의 수입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들의 비율을 곧 실업률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 직업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수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업자, 즉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경성부 인구의 34.58%였는데이것을 일본인과 조선인,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를 해 놓으면 그 안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여성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13.94%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여성 일자리가 가사도우미, 여급, 간호원, 전화 교환원, 점원 등으로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회 분위기도 이에 한 몫을 했다. 이케다 키요시는 ‘말을 바꾸어 직업여성에게 다시 고한다. 장래의 모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늦지않았다. 빨리 직장을 버리고 여성 본래의 사명인 가정으로 돌아가 심창深窓의 현모양처 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시선의 일면을 보여준다. 직업도 많이 없고, 시선도 곱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진출―특히조선인 여성―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인 여성에 비하면 조선인 남성들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지만,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취업률로만 보면 남성 유업자의 비율은53.52%로 여성에 비하면 3배 이상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남성의 경우 거의 20% 가까운 사람들이 단순한 막노동에 종사하고있었으며, 지위가 높은 공무 자유업 종사자는 9%에 불과했다. 하층으로 가면 이런 추세는 더욱 심화되었다. 1940년의 자료이긴 하지만 토막민으로 불리는 당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남성은 736명이 유업자임에 반해, 여성은 83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성 유업자에 40%가 넘는 301명은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소설 속손거부는 여기에 속했다. 나머지 직업도 수레꾼, 마차꾼, 청소 인부, 운송 인부, 운반 인부, 화물운반 짐꾼, 구두공, 넝마주이 등 단순 노동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 할 수 없는 직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래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여성의 경우 작부酌婦와여급 등이 직업으로 확인되었다. 한 세대 당 유업자 수는 1명인 경우가 63%, 2명인 경우가 26%로거의 90%에 육박했다. 조사에서는 여성 취업률이 낮은 이유를 ‘그들의 기술에 상응하는 직업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세대 당 유업자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전체적인 유업자 비율이 낮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들의 임금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1940년 기준 토막민 남성 유업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1.30원이었다. 재봉사, 벽돌공, 미장이 등 기술이 필요한 직업의 경우 토막민들이 토막민 이외의 조선인 노동자보다 임금이 현저히 낮았다. 막노동과 인부 등 힘쓰는 직종의 직업을 갖은 사람들은 토막민 이외의 사람들보다 수입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전체 평균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황수건과 손서방은 직업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토막민들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몸을 쓰는 막노동 이외에 다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이도 할 수 있는 막노동(채석장 일)이나 신문배달 혹은 학교 급사뿐이었다. 그리고 식구는 많은데 임금은 낮은 수준이었으므로 가난은 그들의 운명처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태준의 시선은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다. 마치 이태준의 시선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득한 동네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성북동은 ‘문인촌’이라 불렸을 만큼 문인들이 많이 살았고, 서슬 퍼런 총독부에 청원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산과 실력을 가진 소위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또한 부자들의 별장과 그들이 노는 요정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태준의 시선은 왜 가난한 자들을 향했을까?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혹 이것이 해방 이후 이태준의 행적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않을까? 1930년 이태준의 눈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였다.
이태준 소설에 비친 성북동 사람들의 직업
지금도 그렇지만 성북동은 1930년대에도, 생산의 장소는 아니었다. 베를 표백하던 마전은 1930년대에는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많이 잃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태준과 같은 문인들(혹은 엘리트들)은 사대문 안에 좋은 직장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서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달밤」의 황수건은 조금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지만 나름 열심히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에서 급사로 일하기도 했고, 거기서 쫓겨난 이후에는 신문사의 보조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님 내외, 자신내외, 이렇게 7식구가 같이 살아 쉬이 놀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나중에 보조배달원마저 잘리게 되자 그는 다시 삼산학교 급사로 들어갈 요량으로 운동도 하고 학교 사무실을 찾아가 조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자기보다 힘 좋고 일 잘하는 급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거부」의 손서방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부인과 아들둘을 둔 가장이다. 딸도 하나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다. 아들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그는 아들의 책값과 월사금을 대느라 ‘일정한 직업은 없지만’ ‘진일 마른일 다 쫓아 댕’기다 하루는 채석장에서 일하다 손이 쪄 엄지손가락 하나를 못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아들을 하나 더 낳는다. 이태준의 눈에 비친 성북동의 토막민들은 항상 취업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1930년대 취업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비단 황수건과 손서방 뿐만이 아니었다. 1910년에 약 1천 3백만 명이었던 인구는 1930년이되면서 이미 2천만 명을 돌파했고, 1930년에는 2천 3백만 명에 육박한다. 25년 만에 약 77%에 가까운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이런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1930년 조사를 보면 경성의 무업자는 무려 65.32%에 달했다. 물론 당시의무업자에는 학생, 지주, 종속자 등 직업 없이 다른 사람들의 수입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들의 비율을 곧 실업률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 직업이 없다는 것은 상당히 높은 수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업자, 즉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경성부 인구의 34.58%였는데이것을 일본인과 조선인,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를 해 놓으면 그 안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여성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전체의13.94%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여성 일자리가 가사도우미, 여급, 간호원, 전화 교환원, 점원 등으로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회 분위기도 이에 한 몫을 했다. 이케다 키요시는 ‘말을 바꾸어 직업여성에게 다시 고한다. 장래의 모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늦지않았다. 빨리 직장을 버리고 여성 본래의 사명인 가정으로 돌아가 심창深窓의 현모양처 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당시 사회가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시선의 일면을 보여준다. 직업도 많이 없고, 시선도 곱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진출―특히조선인 여성― 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인 여성에 비하면 조선인 남성들의 상황은 나은 편이었지만,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취업률로만 보면 남성 유업자의 비율은53.52%로 여성에 비하면 3배 이상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조선인 남성의 경우 거의 20% 가까운 사람들이 단순한 막노동에 종사하고있었으며, 지위가 높은 공무 자유업 종사자는 9%에 불과했다. 하층으로 가면 이런 추세는 더욱 심화되었다. 1940년의 자료이긴 하지만 토막민으로 불리는 당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남성은 736명이 유업자임에 반해, 여성은 83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남성 유업자에 40%가 넘는 301명은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소설 속손거부는 여기에 속했다. 나머지 직업도 수레꾼, 마차꾼, 청소 인부, 운송 인부, 운반 인부, 화물운반 짐꾼, 구두공, 넝마주이 등 단순 노동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고정적인 수입을 기대 할 수 없는 직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래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여성의 경우 작부酌婦와여급 등이 직업으로 확인되었다. 한 세대 당 유업자 수는 1명인 경우가 63%, 2명인 경우가 26%로거의 90%에 육박했다. 조사에서는 여성 취업률이 낮은 이유를 ‘그들의 기술에 상응하는 직업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 세대 당 유업자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전체적인 유업자 비율이 낮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들의 임금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1940년 기준 토막민 남성 유업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1.30원이었다. 재봉사, 벽돌공, 미장이 등 기술이 필요한 직업의 경우 토막민들이 토막민 이외의 조선인 노동자보다 임금이 현저히 낮았다. 막노동과 인부 등 힘쓰는 직종의 직업을 갖은 사람들은 토막민 이외의 사람들보다 수입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전체 평균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황수건과 손서방은 직업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토막민들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몸을 쓰는 막노동 이외에 다른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결국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이도 할 수 있는 막노동(채석장 일)이나 신문배달 혹은 학교 급사뿐이었다. 그리고 식구는 많은데 임금은 낮은 수준이었으므로 가난은 그들의 운명처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태준의 시선은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다. 마치 이태준의 시선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득한 동네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성북동은 ‘문인촌’이라 불렸을 만큼 문인들이 많이 살았고, 서슬 퍼런 총독부에 청원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산과 실력을 가진 소위 ‘중산층’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또한 부자들의 별장과 그들이 노는 요정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태준의 시선은 왜 가난한 자들을 향했을까?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혹 이것이 해방 이후 이태준의 행적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않을까? 1930년 이태준의 눈으로 본 성북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였다.
3. 식민지 문인·화가들의 사랑방-노시산방 사람들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상허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용준의 집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집을 지었다. 1933년의 일이다. 김용준이 성북동에 자리 잡은 해는 그의 글에 따르면 기묘년(1939년)에서 5년 전의 일이니 1934년이 된다. 그러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서로만 보면 그가 이태준을 따라 성북동에 자리 잡은 셈이다. 그 둘은 1904년생으로 나이도 같았다. 한 명은 산문의 일인자로 불렸고, 한 명은 회화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니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점도 비슷했다.
이태준은 김용준이 자신과 한 마을로 이사 온 것이 반가웠는지, 그의 집 마당에 나이든 감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늙은 감나무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에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준다. 어떤 이는 노老라는 글자가 주는 늙은 이미지가 별로라고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좋아했다. 아니 실은 김용준은 ‘노老’라는 글자를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보면 그는 노경老境이란 경지, 노련老鍊이라는 말을 모두 사랑했다. 혹 이태준이 그런 김용준의 취향을 알고 당호를 지어준 것이라면 그 둘의 관계는 보통은 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좋은 당호를 받았으니 자신도 무언가 선물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을까? 김용준은 같은 해 이태준의 『달밤』이라는 소설집의 표지를 장정裝幀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표지 디자인을 해준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이태준이 그의 또 다른 친구 정지용과 함께 발행한 잡지 『문장』의 표지도 장정해 준다. 그들이 오랫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인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용준은 정지용의 『지용시선芝溶詩選』의 장정도 맡게 된다. 이태준이 산문의 일인자였다면 정지용은 운문의 일인자였다. 이태준이 성북동에 이사 오기 전부터 친구사이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듯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알음알음 이어진다.
(중략)
『문장』이 발행되던 그해,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가 『문장』에 실리며 등단한다. 『문장』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 이태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이들이 알던 사이였기에 좋게 봐줬을 것이라는 불온한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등단 이후 한 번 인사라도 하러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피하기 어렵다.
(중략)
그러나 조지훈→정지용→이태준→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성북동인 맥도를 거꾸로 찾아올라 가보고 싶은 욕심은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보니 그들의 집도 그렇게 성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례로 만날 수 있다.
3. 식민지 문인·화가들의 사랑방-노시산방 사람들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상허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용준의 집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집을 지었다. 1933년의 일이다. 김용준이 성북동에 자리 잡은 해는 그의 글에 따르면 기묘년(1939년)에서 5년 전의 일이니 1934년이 된다. 그러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서로만 보면 그가 이태준을 따라 성북동에 자리 잡은 셈이다. 그 둘은 1904년생으로 나이도 같았다. 한 명은 산문의 일인자로 불렸고, 한 명은 회화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니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점도 비슷했다.
이태준은 김용준이 자신과 한 마을로 이사 온 것이 반가웠는지, 그의 집 마당에 나이든 감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늙은 감나무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에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준다. 어떤 이는 노老라는 글자가 주는 늙은 이미지가 별로라고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좋아했다. 아니 실은 김용준은 ‘노老’라는 글자를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보면 그는 노경老境이란 경지, 노련老鍊이라는 말을 모두 사랑했다. 혹 이태준이 그런 김용준의 취향을 알고 당호를 지어준 것이라면 그 둘의 관계는 보통은 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좋은 당호를 받았으니 자신도 무언가 선물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을까? 김용준은 같은 해 이태준의 『달밤』이라는 소설집의 표지를 장정裝幀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표지 디자인을 해준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이태준이 그의 또 다른 친구 정지용과 함께 발행한 잡지 『문장』의 표지도 장정해 준다. 그들이 오랫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인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용준은 정지용의 『지용시선芝溶詩選』의 장정도 맡게 된다. 이태준이 산문의 일인자였다면 정지용은 운문의 일인자였다. 이태준이 성북동에 이사 오기 전부터 친구사이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듯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알음알음 이어진다.
(중략)
『문장』이 발행되던 그해,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가 『문장』에 실리며 등단한다. 『문장』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 이태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이들이 알던 사이였기에 좋게 봐줬을 것이라는 불온한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등단 이후 한 번 인사라도 하러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피하기 어렵다.
(중략)
그러나 조지훈→정지용→이태준→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성북동인 맥도를 거꾸로 찾아올라 가보고 싶은 욕심은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보니 그들의 집도 그렇게 성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수연산방과 간송미술관
1. 수연산방-상허 이태준과 구인회
1933년은 이태준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그해 성북동 골짜기 개천 옆에 집을 짓고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벼루硯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壽 글을 쓰는 집’이란 의미였다.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긴 하지만 수연산방은 월북할 때까지 그의 보금자리였다. 1933년, 이태준에게 보금자리의 마련만큼 특별했던 일은 구인회의 결성이었다.
1930년대 초반은 문학계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가 맹위를 떨치던 시점이다. 카프는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계몽·선전하려 했다. 구인회는 이런 경향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단체였다. 처음 구인회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이종명과 김유영이다. 이들은 카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단체의 구성을 희망했고, 이를 위해 당시 소위 순수 문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인들에게 접근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단체에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이 바로 이태준이다. 다만 이태준은 카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문학 자체에 충실한 모임이 되길 원했고, 모임에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을 하며 자연스럽게 모임의 좌장으로 자리 잡는다. 구인회라는 이름 역시 이태준의 제안이었다.
구인회가 본격적으로 창립을 선언한 것은 1933년 8월의 일이다.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각 신문은 8월에 구인회의 창립을 전하고 있다. 이태준의 구인회 활동은 공교롭게도 성북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인회의 주요 활동 무대는 사대문 안이었다. 본격적인 창립 준비를 위한 발회식은 광교 주변의 작은 양식집에서 이루어졌고, 모임도 종로의 카페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구인회의 공식적인 첫 활동은 월평회였는데, 월평회가 이루어진 것도 사대문 안이었다. 1934년 6월 17일부터 6월 2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을 연재한 것은 구인회의 첫 집단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신문연재에 지역을 따질 수는 없지만 조선중앙일보 사무실이 종로에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종로에서 일어난 일로 볼 수도 있다.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으로 첫 집단행동을 한 구인회는 바로 두 번째 행동에 돌입한다. 바로 강연회이다. 첫 번째 강연회는 1934년 6월 30일 열린 “시와 소설의 밤”이었다. 당시 광고는 “시와 소설의 밤”의 주체가 구인회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이었고, 장소는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이다. 역시 종로였다.
이렇게만 보면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았을 뿐 활동은 주로 종로에서 한 셈이다. 하지만 〈표-1〉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태준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933년 성북동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성북동에서 『아담의 후예』, 『달밤』, 『어머니』, 『색시』, 『손거부』, 『장마』, 『토끼 이야기』, 『가마귀』, 『황진이』, 『밤길』등 그의 많은 대표작을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달밤』, 『손거부』, 『장마』, 『토끼이야기』 등 많은 작품에서 성북동을 소재로 삼았다. 『무서록』에도 성북동을 소재로 하는 수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성북동 수연산방은 이태준에게 가장 적합한 글쓰기 장소였을지 모른다.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지용, 이상, 박태원 등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상은 1937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정지용, 박태원과는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다. 특히 돈암동에 살던 박태원은 해방 이후 수연산방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태준과 박태원은 월북했다. 정지용은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북으로 가는 도중 폭격으로 죽었거나, 북에서 폭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급의식에 입각한 문학을 지향한 카프와는 다른 길을 걷기 위해 만든 구인회의 핵심 회원이었던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에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 하지만 적어도 이태준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월북은 그렇게까지 의외의 일은 아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항상 힘없고, 가난한 사회 최하층민이었다.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던 사회를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혹은 구인회 회원들은) 문학이 도구화되는 것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이태준의 월북으로 수연산방은 ‘이태준 가옥’이라는 이름조차 잃었다. 이름을 찾은 것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1988년의 일이다. 이태준은 이곳 수연산방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집의 당호에 어울리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함께 했다. 가끔 찾아오는 벗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지금은 찻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집이지만 주인 잃은 수연산방은 어쩌면 그곳에 앉아 글 쓰던 주인을 지금도 기다릴지 모른다.
수연산방과 간송미술관
1. 수연산방-상허 이태준과 구인회
1933년은 이태준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그해 성북동 골짜기 개천 옆에 집을 짓고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벼루硯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壽 글을 쓰는 집’이란 의미였다.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긴 하지만 수연산방은 월북할 때까지 그의 보금자리였다. 1933년, 이태준에게 보금자리의 마련만큼 특별했던 일은 구인회의 결성이었다.
1930년대 초반은 문학계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가 맹위를 떨치던 시점이다. 카프는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계몽·선전하려 했다. 구인회는 이런 경향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단체였다. 처음 구인회의 결성을 주도한 것은 이종명과 김유영이다. 이들은 카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단체의 구성을 희망했고, 이를 위해 당시 소위 순수 문학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인들에게 접근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단체에 참여 의사를 밝힌 사람이 바로 이태준이다. 다만 이태준은 카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문학 자체에 충실한 모임이 되길 원했고, 모임에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을 하며 자연스럽게 모임의 좌장으로 자리 잡는다. 구인회라는 이름 역시 이태준의 제안이었다.
구인회가 본격적으로 창립을 선언한 것은 1933년 8월의 일이다.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조선인들이 운영하던 각 신문은 8월에 구인회의 창립을 전하고 있다. 이태준의 구인회 활동은 공교롭게도 성북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인회의 주요 활동 무대는 사대문 안이었다. 본격적인 창립 준비를 위한 발회식은 광교 주변의 작은 양식집에서 이루어졌고, 모임도 종로의 카페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구인회의 공식적인 첫 활동은 월평회였는데, 월평회가 이루어진 것도 사대문 안이었다. 1934년 6월 17일부터 6월 2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을 연재한 것은 구인회의 첫 집단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신문연재에 지역을 따질 수는 없지만 조선중앙일보 사무실이 종로에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종로에서 일어난 일로 볼 수도 있다.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으로 첫 집단행동을 한 구인회는 바로 두 번째 행동에 돌입한다. 바로 강연회이다. 첫 번째 강연회는 1934년 6월 30일 열린 “시와 소설의 밤”이었다. 당시 광고는 “시와 소설의 밤”의 주체가 구인회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이었고, 장소는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이다. 역시 종로였다.
이렇게만 보면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았을 뿐 활동은 주로 종로에서 한 셈이다. 하지만 〈표-1〉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태준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933년 성북동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성북동에서 『아담의 후예』, 『달밤』, 『어머니』, 『색시』, 『손거부』, 『장마』, 『토끼 이야기』, 『가마귀』, 『황진이』, 『밤길』등 그의 많은 대표작을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달밤』, 『손거부』, 『장마』, 『토끼이야기』 등 많은 작품에서 성북동을 소재로 삼았다. 『무서록』에도 성북동을 소재로 하는 수필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성북동 수연산방은 이태준에게 가장 적합한 글쓰기 장소였을지 모른다.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지용, 이상, 박태원 등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상은 1937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정지용, 박태원과는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다. 특히 돈암동에 살던 박태원은 해방 이후 수연산방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이태준과 박태원은 월북했다. 정지용은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북으로 가는 도중 폭격으로 죽었거나, 북에서 폭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급의식에 입각한 문학을 지향한 카프와는 다른 길을 걷기 위해 만든 구인회의 핵심 회원이었던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에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 하지만 적어도 이태준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월북은 그렇게까지 의외의 일은 아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항상 힘없고, 가난한 사회 최하층민이었다.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던 사회를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혹은 구인회 회원들은) 문학이 도구화되는 것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이태준의 월북으로 수연산방은 ‘이태준 가옥’이라는 이름조차 잃었다. 이름을 찾은 것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된 1988년의 일이다. 이태준은 이곳 수연산방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집의 당호에 어울리는 활동이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함께 했다. 가끔 찾아오는 벗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지금은 찻집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집이지만 주인 잃은 수연산방은 어쩌면 그곳에 앉아 글 쓰던 주인을 지금도 기다릴지 모른다.
상허 이태준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6길 8
이 고택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이 29세였던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를 붙이고, 1946년 월북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수록된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집을 지은 1933년은 이태 준이 정지용, 김유영, 이종명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수연산방에서 『달밤』, 『손거부』, 『돌다리』 등의 단편과, 『황진이』, 『왕자호동』 등의 장편을 남기는 등 활 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달밤』과 『손거부』 등은 성북동이 무대가 된다.
수연산방은 앞에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 리 잡았으며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일각대문이 세워져 있다. 집터 안에 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건평은 23.2평이며 ‘공자工字’형의 건물로 정면4칸, 측면4칸으로 구성된 보통의 ‘ㄱ자’형 집과 비슷하나,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 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벌대이고, 초석은 긴 육면체로써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각주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정원은 감나무, 사철나무로 주류로 하여 다양한 화초가 심어져 있어 민가 정원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현재 수연산방이란 상호를 달고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상허 이태준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6길 8
이 고택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이 29세였던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를 붙이고, 1946년 월북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수록된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집을 지은 1933년은 이태 준이 정지용, 김유영, 이종명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는 수연산방에서 『달밤』, 『손거부』, 『돌다리』 등의 단편과, 『황진이』, 『왕자호동』 등의 장편을 남기는 등 활 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달밤』과 『손거부』 등은 성북동이 무대가 된다.
수연산방은 앞에 내를 두고 뒤에 동산을 낀 터에 서남향으로 자 리 잡았으며 막돌로 쌓은 화장담에 일각대문이 세워져 있다. 집터 안에 는 북동쪽에 몸채 하나만 배치되고, 행랑채 등의 별채는 없다.
건평은 23.2평이며 ‘공자工字’형의 건물로 정면4칸, 측면4칸으로 구성된 보통의 ‘ㄱ자’형 집과 비슷하나,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 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다듬돌로 줄을 맞춰 쌓은 네벌대이고, 초석은 긴 육면체로써 위가 약간 좁은 네모뿔대 모양인데 면을 접었다. 기둥은 약간 흘림을 가진 각주로 면을 접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로서 역시 면을 접었다.
정원은 감나무, 사철나무로 주류로 하여 다양한 화초가 심어져 있어 민가 정원의 맛을 듬뿍 느끼게 한다. 뒤쪽을 약간 덧달아서 개축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는데 이 집은 규모는 작지만 사랑채와 안채를 집약시킨 집으로 1900년대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다. 현재 수연산방이란 상호를 달고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월북 작가 이태준 작품 출간
우리나라 30년대 순수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현진건 등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손꼽히는 월북작가 이태준(1904년생)의 작품전집 제1권과 閔忠煥(민충환) 교수 (부천공업전문대)의 「이태준 연구」 등 두 권의 책이 깊은샘출판사에서 출간, 문공부에 납본됨으로써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 즉 해금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태준은 강원 철원 태생으로 휘문고보를 다녔으며 25년 단편 「五夢女(오몽녀)」가 「조선문단」지에 추천, 문단에 나왔다. 호는 尙虛(상허). 등단 이후 그는 李箱(이상) 李孝石(이효석) 등과 「九人會(구인회)」의 멤버로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으며 원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광복이전까지 그는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식민치하 우리민족의 불우한 환경, 불우한 삶을 탁월한 문장과 소설적 기법으로 형상화했다. 해방 이후 그가 좌익문화단체에 가입하고 이어 47년경 北(북)으로 간뒤 오늘날까지 그의 문학은 이 땅에서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尙虛(상허)는 북에서조차 “부르주아반동사상의 잔재를 지닌 작가” “카프를 반대하는 「九人會(구인회)」를 조직, 일제의 앞잡이로 혁명사상을 반대했다”는 등의 혹독한 비판을 받은 후 숙청됐는데 아직도 생사불명이다.
尙虛(상허)의 작품집으로는 「달밤」(34년) 「가마귀」(37년) 「이태준단편집」(41년) 「돌다리」(43년) 「복덕방」(47년)등이 손꼽힌다. 그는 특히 작품마다 선명한 인간상을 표출하는 수완과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생활 속에 독특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부각시키는 점이 돋보인다.
그의 책 서문을 보면 문학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첫 창작집 「달밤」에서 그는 “나의 조그만 경험에서는 아직 한번도 자기의 작품을 만족히 읽은 기억이 없다”면서 “자꾸 고치자! 나는 여간해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놔보지 못할 것을 깨달았고 그대신 기회만 있으면 평생을 두고 고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가마귀」의 서문을 보면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쓰고 싶은 때에, 내가 쓰고 싶은 투로 쓰는 것은 나의 생활에서 가장 즐겁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성하기도 한 일”이라고 했다. 尙虛(상허)의 작품에 대해 故 李殷相(고 이은상)은 30년대말 “그의 글은 진실로 달밤 같은 글이다. 달밤같이 향기롭다. 깨끗하다. 그의 명랑한 글은 읽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 이 높고 깨끗한 사상과 맑고 아름다운 감성을 가진이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현 문단의 자랑스러운 보배일 뿐 아니라 조선말, 조선땅, 조선사람과 긴 생명을 가질 줄 나는 확실히 믿는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나온 전집 제1권에는 「五夢女(오몽녀)」 「아무일도없소」 「코스모스 이야기」 「손거부」등 주옥 같은 단편 29편이 실렸는데 잇따라 단․중편집이 나올 계획이다. 이밖에 그는 장편․희곡․수필 등을 숱하게 남겨 전집의 분량은 10여 권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략)
『동아일보』 1988. 4. 14.
월북 작가 이태준 작품 출간
우리나라 30년대 순수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현진건 등과 함께 근대적 의미의 한국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손꼽히는 월북작가 이태준(1904년생)의 작품전집 제1권과 閔忠煥(민충환) 교수 (부천공업전문대)의 「이태준 연구」 등 두 권의 책이 깊은샘출판사에서 출간, 문공부에 납본됨으로써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 즉 해금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태준은 강원 철원 태생으로 휘문고보를 다녔으며 25년 단편 「五夢女(오몽녀)」가 「조선문단」지에 추천, 문단에 나왔다. 호는 尙虛(상허). 등단 이후 그는 李箱(이상) 李孝石(이효석) 등과 「九人會(구인회)」의 멤버로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으며 원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광복이전까지 그는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식민치하 우리민족의 불우한 환경, 불우한 삶을 탁월한 문장과 소설적 기법으로 형상화했다. 해방 이후 그가 좌익문화단체에 가입하고 이어 47년경 北(북)으로 간뒤 오늘날까지 그의 문학은 이 땅에서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尙虛(상허)는 북에서조차 “부르주아반동사상의 잔재를 지닌 작가” “카프를 반대하는 「九人會(구인회)」를 조직, 일제의 앞잡이로 혁명사상을 반대했다”는 등의 혹독한 비판을 받은 후 숙청됐는데 아직도 생사불명이다.
尙虛(상허)의 작품집으로는 「달밤」(34년) 「가마귀」(37년) 「이태준단편집」(41년) 「돌다리」(43년) 「복덕방」(47년)등이 손꼽힌다. 그는 특히 작품마다 선명한 인간상을 표출하는 수완과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생활 속에 독특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부각시키는 점이 돋보인다.
그의 책 서문을 보면 문학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첫 창작집 「달밤」에서 그는 “나의 조그만 경험에서는 아직 한번도 자기의 작품을 만족히 읽은 기억이 없다”면서 “자꾸 고치자! 나는 여간해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놔보지 못할 것을 깨달았고 그대신 기회만 있으면 평생을 두고 고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가마귀」의 서문을 보면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가 쓰고 싶은 때에, 내가 쓰고 싶은 투로 쓰는 것은 나의 생활에서 가장 즐겁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성하기도 한 일”이라고 했다. 尙虛(상허)의 작품에 대해 故 李殷相(고 이은상)은 30년대말 “그의 글은 진실로 달밤 같은 글이다. 달밤같이 향기롭다. 깨끗하다. 그의 명랑한 글은 읽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힘을 가졌다. 이 높고 깨끗한 사상과 맑고 아름다운 감성을 가진이 작가의 작품은 반드시 현 문단의 자랑스러운 보배일 뿐 아니라 조선말, 조선땅, 조선사람과 긴 생명을 가질 줄 나는 확실히 믿는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나온 전집 제1권에는 「五夢女(오몽녀)」 「아무일도없소」 「코스모스 이야기」 「손거부」등 주옥 같은 단편 29편이 실렸는데 잇따라 단․중편집이 나올 계획이다. 이밖에 그는 장편․희곡․수필 등을 숱하게 남겨 전집의 분량은 10여 권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하략)
『동아일보』 1988. 4. 14.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은 1904년 1월 7일 강원도 철원 용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구한말 개화의 흐름을 타고 아버지 이문교(李文敎)가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면서 몇 년간 외국 생활을 하였다. 이문교는 개화파라는 이유로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산 속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가족들은 의병들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갖다 바치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결국, 이문교는 가솔을 이끌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는데, 이때가 1909년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후 병으로 죽고, 3년 뒤에는 이태준의 어머니까지 산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다.
부모를 다 잃고 고아가 된 이태준은 아홉 살에 다시 강원도 철원 용담으로 되돌아왔다.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주변의 동정과 괄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어렵게 봉명학교를 졸업하는데, 남다른 강인함과 성취욕을 지녀서 졸업생을 대표해서 상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오래도록 남아 그 후 작품에 청소년기를 회상하는 글을 남겼다.
이태준은 용담시절, 외조부와 낚시질을 하다가 그것이 갑갑하면 외삼촌들을 따라 선비소로 가 그물놀이를 하곤 했다. 이태준은 후에 도회지로 떠돌면서도 늘 이곳을 그리워했다. 용담은 이태준에게 정신의 고향이자 고달픈 삶의 귀향처였던 것이다.
졸업 후 상경하여 배재학당에 응시,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였다. 그러던 중 원산 물산객주 집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한 상인을 만나 그의 호의로 낮에는 상회 일을 보고 밤에는 청년회관의 야학교 고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한 뒤로는 교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학비를 면제 받으며 힘들게 생활했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투르게네프의 『전야』,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의『부활』등 문학작품을 탐독했다. 이때 동기생으로는 화가 이마동, 전 국무총리 백두진, 전형필 등이 있고, 선배로는 화가 오지호, 무용가 조택원, 시인 정지용, 이선근, 삽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종화 등이 있다. 스승으로는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다.
그러나 휘문고보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학교의 비리와 교주(校主)의 횡포에 대항해서 일어선 동맹휴교 사건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동맹휴교에 주모자로 인정되어 5년제 과정 중 4년 1학기에 퇴학처분을 받고 친구 김연만의 도움을 받아 동경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도쿄[東京] 조치대학[上智大學]에 입학하여서도 신문, 우유배달을 하는 등 한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이태준은“차표가 떨어져 학교에 못 가고 비 소리와 벌레 소리에 싸인 벌판 외딴 집에 누워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라고 작품에서 이때를 회상한다. 이 같은 어려움을 끝내 감내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오른다.
서울로 돌아와 여러 신문사와 모교인 휘문고보에 취직을 알아보았지만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배운 지식을 우리나라로 돌아와 펼치려던 뜻은 좌절되었다. 탑골공원 주위를 서성거리며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데, 이 시기는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를 체험하면서 작가의 역량을 축적하던 준비기라 할 수 있다.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은 1904년 1월 7일 강원도 철원 용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구한말 개화의 흐름을 타고 아버지 이문교(李文敎)가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면서 몇 년간 외국 생활을 하였다. 이문교는 개화파라는 이유로 의병들의 습격을 받아 산 속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 가족들은 의병들에게 음식을 장만하여 갖다 바치는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결국, 이문교는 가솔을 이끌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는데, 이때가 1909년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후 병으로 죽고, 3년 뒤에는 이태준의 어머니까지 산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뜬다.
부모를 다 잃고 고아가 된 이태준은 아홉 살에 다시 강원도 철원 용담으로 되돌아왔다. 친척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주변의 동정과 괄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어렵게 봉명학교를 졸업하는데, 남다른 강인함과 성취욕을 지녀서 졸업생을 대표해서 상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오래도록 남아 그 후 작품에 청소년기를 회상하는 글을 남겼다.
이태준은 용담시절, 외조부와 낚시질을 하다가 그것이 갑갑하면 외삼촌들을 따라 선비소로 가 그물놀이를 하곤 했다. 이태준은 후에 도회지로 떠돌면서도 늘 이곳을 그리워했다. 용담은 이태준에게 정신의 고향이자 고달픈 삶의 귀향처였던 것이다.
졸업 후 상경하여 배재학당에 응시,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였다. 그러던 중 원산 물산객주 집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한 상인을 만나 그의 호의로 낮에는 상회 일을 보고 밤에는 청년회관의 야학교 고등과에 입학을 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한 뒤로는 교장실 청소를 전담하고 학비를 면제 받으며 힘들게 생활했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투르게네프의 『전야』,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의『부활』등 문학작품을 탐독했다. 이때 동기생으로는 화가 이마동, 전 국무총리 백두진, 전형필 등이 있고, 선배로는 화가 오지호, 무용가 조택원, 시인 정지용, 이선근, 삽화가 이승만, 소설가 박종화 등이 있다. 스승으로는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다.
그러나 휘문고보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학교의 비리와 교주(校主)의 횡포에 대항해서 일어선 동맹휴교 사건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동맹휴교에 주모자로 인정되어 5년제 과정 중 4년 1학기에 퇴학처분을 받고 친구 김연만의 도움을 받아 동경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도쿄[東京] 조치대학[上智大學]에 입학하여서도 신문, 우유배달을 하는 등 한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 이태준은“차표가 떨어져 학교에 못 가고 비 소리와 벌레 소리에 싸인 벌판 외딴 집에 누워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라고 작품에서 이때를 회상한다. 이 같은 어려움을 끝내 감내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오른다.
서울로 돌아와 여러 신문사와 모교인 휘문고보에 취직을 알아보았지만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배운 지식을 우리나라로 돌아와 펼치려던 뜻은 좌절되었다. 탑골공원 주위를 서성거리며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데, 이 시기는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를 체험하면서 작가의 역량을 축적하던 준비기라 할 수 있다.
강원도 철원 출생.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로 등단한 소설가이다. 휘문고보에서 가람 이병기에게 문학을 배우고,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서정적이며 섬세한 묘사와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소설로 근대시기를 대표하는 단편 소설 작가로 꼽힌다. 1934년 성북동 248번지에 고향집과 닮은 집을 짓고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 탁본을 떠 직접 편액을 만들어 걸고, 기와집에는 문향루聞香樓, 죽향루竹香樓, 초가집에는 상심루賞心樓라는 편액을 달았다. 난, 파초나 서화, 골동품을 완상玩賞하는 취미를 가져 집치레에 얽힌 일화를 수필로 남기기도 했다. 「밤길」, 「가마귀」 등 단편집을 발간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구인회’ 참여 등 성북동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근원 김용준과 이웃으로 살며 각별하게 지냈다. 이태준의 책 『달밤』, 『복덕방』 , 『돌다리』의 장정을 김용준이 하였다. 1939년 창간된 월간 문학잡지 『문장』의 주간을 맡아 순수 문학을 지향하고, 문학 작품 뿐 아니라 국문학 논문을 소개하고, 신인 추천제로 신진 문인을 발굴하였다. 정지용, 김용준, 길진섭 등이 참여하였다. 해방 후 좌익계열 문학단체 활동을 하다 1946년 무렵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강원도 철원 출생. 1925년 《조선문단》에 「오몽녀」로 등단한 소설가이다. 휘문고보에서 가람 이병기에게 문학을 배우고,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서정적이며 섬세한 묘사와 예술적 완성도를 높인 소설로 근대시기를 대표하는 단편 소설 작가로 꼽힌다. 1934년 성북동 248번지에 고향집과 닮은 집을 짓고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 탁본을 떠 직접 편액을 만들어 걸고, 기와집에는 문향루聞香樓, 죽향루竹香樓, 초가집에는 상심루賞心樓라는 편액을 달았다. 난, 파초나 서화, 골동품을 완상玩賞하는 취미를 가져 집치레에 얽힌 일화를 수필로 남기기도 했다. 「밤길」, 「가마귀」 등 단편집을 발간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구인회’ 참여 등 성북동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근원 김용준과 이웃으로 살며 각별하게 지냈다. 이태준의 책 『달밤』, 『복덕방』 , 『돌다리』의 장정을 김용준이 하였다. 1939년 창간된 월간 문학잡지 『문장』의 주간을 맡아 순수 문학을 지향하고, 문학 작품 뿐 아니라 국문학 논문을 소개하고, 신인 추천제로 신진 문인을 발굴하였다. 정지용, 김용준, 길진섭 등이 참여하였다. 해방 후 좌익계열 문학단체 활동을 하다 1946년 무렵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돌연 홍명희와 함께 월북
·월북 초기에 평양조선문화협회 방문사절단 1호로 소련에 다녀오는 등 특별대우를 받음
·이후 문예총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점차 한설야 등의 극좌파에 의해 소외 당함
·1956년 무렵 지난날 카프(KAPF)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모여 결성한 구인회에 가담해 다수의 우경적이고 친일적인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규탄을 받고 함흥으로 쫓겨남
·<함흥로동신문>의 교정원과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노동자로 전락
·같은 해 문학예술출판부 열성자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숙청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돌연 홍명희와 함께 월북
·월북 초기에 평양조선문화협회 방문사절단 1호로 소련에 다녀오는 등 특별대우를 받음
·이후 문예총 부위원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점차 한설야 등의 극좌파에 의해 소외 당함
·1956년 무렵 지난날 카프(KAPF)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모여 결성한 구인회에 가담해 다수의 우경적이고 친일적인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규탄을 받고 함흥으로 쫓겨남
·<함흥로동신문>의 교정원과 콘크리트 블록 공장의 노동자로 전락
·같은 해 문학예술출판부 열성자회의에서 비판을 받고 숙청
1904.11. 4. 철원 출생, 사망연도 불분명
1925년 일본 도쿄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발표
이태준은 「오몽녀」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오몽녀》는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 작품이기도 함.
1933년 성북동으로 이사, 8월에 구인회 결성(참여)
1939년 2월 “문장”지의 편집자 겸 소설추천심사위원 활동
『문장』지의 시 부문 추천심사위원은 정지용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 또한 『문장』지로 등단
시인 정지용은 1944년 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 사회를 봄
1946년 10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 방문
1974년 강원도 장동탄광노동자 지구로 추방(사망연도 불분명)
1904.11. 4. 철원 출생, 사망연도 불분명
1925년 일본 도쿄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발표
이태준은 「오몽녀」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오몽녀》는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 작품이기도 함.
1933년 성북동으로 이사, 8월에 구인회 결성(참여)
1939년 2월 “문장”지의 편집자 겸 소설추천심사위원 활동
『문장』지의 시 부문 추천심사위원은 정지용으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 또한 『문장』지로 등단
시인 정지용은 1944년 김환기와 김향안의 결혼식 사회를 봄
1946년 10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 방문
1974년 강원도 장동탄광노동자 지구로 추방(사망연도 불분명)
[독서일기] 파초 그늘 아래 이태준의 조촐한 행복(주간『뉴스메이커』770호, 2008. 4)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쓴 이태준(1904~1956)은 비운의 소설가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나라를 개혁하려고 개화당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하자 가족을 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몇 해 뒤 부모를 잃고 이태준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누이 둘과 함께 철원의 친척 집에 맡겨졌지만 친척 어른의 구박에 반발해 가출한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휘문고보 등을 거쳐 스물한 살 때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치대 문과에 입학하지만 곧 자퇴한다. 그 무렵 쓴 작품 ‘오몽녀’로 문단에 나온 뒤 ‘까마귀’와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을 내놓으며 탁월한 미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상허(尙虛·이태준의 호)의 산문, 지용(芝溶·시인 정지용)의 운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문체가 뿜어내는 아취는 당대의 일급이었다. 이태준이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을 창간하고, 이효석·박태준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고, 해방 후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직에 있었다는 문단사적 이력은 그 자취가 뚜렷하나 여기서 그것들을 조목조목 주워섬길 필요는 없다. 그보다 이태준이 남긴 사진 한 장에 더 주목한다. 이태준 일가가 1943년 서울 성북동 한옥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태준은 갓난애인 삼녀 소현을 안고, 아내 이순옥 등과 함께 장녀 소명, 차녀 소남, 장남 유백, 차남 유진 등을 앞세우고 가족 사진을 박았다. 이태준과 아이들은 환하게 웃고 있다. 어린 시절은 박복했으나 단란한 일가를 이룬 성북동 시절은 이태준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터다. 비 갠 맑은 아침에는 새들이 꽃숲에서 지저귀고, 여름에는 뜰의 발육이 좋은 큰 파초가 절정에서 꽃을 피웠다. 파초 그늘 아래 의자를 놓고 남국의 정조를 명상하던 그 즈음의 조촐한 행복을 드러내는 이 사진을 들여다볼때마다 내 가슴은 아릿해진다. 이태준 일가의 뒤로 사철나무가 보인다. 얼마 전 이태준의 성북동 옛집을 다녀왔는데 지금도 이 사철나무는 그 푸름을 뽐낸다. 이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이태준의 핏줄이 운영하는 찻집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소극적 처세에만 머문 제 행적을 내내 자책하며 자괴감을 떨쳐내지 못한 이태준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돌연 홍명희와 함께 월북하지만 1956년 무렵 친일 혐의가 짙고 우경적 경향의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규탄당한 뒤 함흥으로 추방되어 콘크리트 블록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다.
‘무서록’은 이태준의 수필집이다. 파초와 난을 키우고, 오래된 성벽을 바라보며 양치질을 하고, 책을 아끼고, 고완품(古翫品)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이태준의 청담고박한 생활과 서권향(書卷香) 그윽한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산문들이 실려 있다. 이태준의 성정은 다감하고 온화한 탓에 두루 깨끗한 고요함을 바라고, 고상한 덕과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청결한 취미를 아꼈다. 책과 난과 서화(書畵)와 도자(陶瓷)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불가피한 성정 탓이다. 허나 생활은 촌음의 여유도 없이 바특하기만 했던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러 해 별러 초려(草廬) 한 칸을 지어놓고 공부할 책권(冊卷)과 눈을 쉬일 서화 몇 폭을 걸어놓고 상심루(賞心樓)란 현판을 얻어 걸어놓은 지 이미 7, 8년. 그러나 하루를 누(累) 없이 상심낙사(賞心樂事)한적이 별로 없다.” (‘난’) 한일(閑日)에 주린 각박한 생활에서 그가 누린 청복은 난을 돌보는 일이었다. 기르는 난들에 물을 주고 볕을 쪼여주고 잎을 닦아주는 것에서 마음의 위안과 소일의 보람을 찾았다.
책읽기에 지치거나 글쓰기가 막힐 때 난초 잎을 닦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하루 저녁의 부주의로 난들을 얼려 잃은 뒤 상실감이 얼마나 컸던지 마치 식구가 집 나가 돌아오지 않은 듯 허전해 견딜 수 없었다고 쓴다. 이태준은 파초를 사랑했다. 소 선지가 파초에 좋은 거름이란 소리를 듣고 소 선지와 생선 씻은 물, 깻묵물을 틈틈이 주며 정성스럽게 키운다. 마침내 파초는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로 우뚝 자란다. 늠름하게 잘 자란 파초에 대한 그의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은 파초를 팔아 집 수리비에라도 보태라는 이웃의 채근에도 꿈쩍 않는 데서 드러난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 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파초’) 장대하게 키운 파초가 폭염 속에 드리우는 그 싱그러운 그늘에 눈길을 주고, 비 내리는 날 넓은 파초 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청복으로 삼는 이의 여유가 손에 잡힐 듯하다.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분원사기(分院沙器), 담청 바탕에 선홍 반점이 선연한 천도형(天桃形) 연적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어린 시절에 헤어져 아무 기억이 없는, 글씨를 좋아하셨다는 아버지의 기품과 교훈, 그리고 참먹 향기를 맡아보려는 그의 태도는 견결하다.(‘고완’) 이태준은 고완품에 마음을 뺏겨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호고인(好古人)의 속되지 않고 고고하며 의젓한 취향이 심미적 자부심을 예찬한다.
“그림 하나를 옮겨 걸고, 빈 접시 하나를 바꿔놓고도 그것으로 며칠을 갇혀 넉넉히 즐길 수 있게 된다. 고요함과 가까움에 몰입되는 것이다. 호고인들의 성격상 극도의 근시적 일면이 생기기 쉬운 것도 이러한 연유다. 빈 접시요, 빈 병이다. 담긴 것은 떡이나 물이 아니라 정적과 허무다. 그것은 이미 그릇이라기보다 한 천지요 우주다. 남 보기에는 한낱 파기편명(破器片皿)에 불과하나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무궁한 산하요 장엄한 가람(伽藍) 일 수 있다.”(‘고완품과 생활’)
‘무서록’은 아껴 음미하며 읽을 만한 책이다. 삶과 자연, 문학과 크고 작은 생명에까지 미친 날카로운 관찰과 그윽한 성찰은 잔잔한 감동을 가져온다. 몇 평 안 되는 마당에 앵두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모란, 백화, 파초를 심어 기르며 식구들 모두 떠받들어 귀히 여기는 범부의 행복을 실감할 수 있고, 고서와 옛 기물들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며 기쁨을 누리는 선비의 정신을 엿보고 그 청복의 고요함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는 “천재는 더 오래 산다고 더 나올 것이 없게 그 짧은 생애에서라도 자기 천분(天分)의 절정을 숙명적으로 빨리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枯淡)의 노경(老境)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조숙’) 그가 품은 높은 뜻과 교양과 견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쉰을 갓 넘기며 맞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설야 등 극좌파와의 권력쟁투에서 밀려 변방으로 쫓겨나고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만난(萬難)에 맞닥뜨린 것을 이념의 현혹으로 잠시 저 북쪽을 이채찬연(異彩燦然)한 화원으로 착각한 어리석음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학이 “더 넓은 삶,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는 여권”(수전 손택)이라면, 이태준은 그 여권을 들고 불운한 운명이 소용돌이치는 시간대(時間帶)를 잘못 찾아들어간 것이다. 운명의 생태는 어느 시대에나 누구에게나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다. 다만 반세기 뒤에 한 후학이 “고담의 노경”을 누리지 못하고 떠난 그의 비운을 쓸쓸하게 회고한다는 사실을 여기에 적어둔다. 〈장석주_시인·문학평론가>
[독서일기] 파초 그늘 아래 이태준의 조촐한 행복(주간『뉴스메이커』770호, 2008. 4)
“소설만으로 전업을 못 삼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쓴 이태준(1904~1956)은 비운의 소설가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나라를 개혁하려고 개화당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하자 가족을 끌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몇 해 뒤 부모를 잃고 이태준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누이 둘과 함께 철원의 친척 집에 맡겨졌지만 친척 어른의 구박에 반발해 가출한다. 고학을 하며 어렵게 휘문고보 등을 거쳐 스물한 살 때 일본 도쿄로 건너가 조치대 문과에 입학하지만 곧 자퇴한다. 그 무렵 쓴 작품 ‘오몽녀’로 문단에 나온 뒤 ‘까마귀’와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을 내놓으며 탁월한 미문가로 이름을 날린다.
“상허(尙虛·이태준의 호)의 산문, 지용(芝溶·시인 정지용)의 운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의 문체가 뿜어내는 아취는 당대의 일급이었다. 이태준이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을 창간하고, 이효석·박태준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고, 해방 후 좌익 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의 부위원장직에 있었다는 문단사적 이력은 그 자취가 뚜렷하나 여기서 그것들을 조목조목 주워섬길 필요는 없다. 그보다 이태준이 남긴 사진 한 장에 더 주목한다. 이태준 일가가 1943년 서울 성북동 한옥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태준은 갓난애인 삼녀 소현을 안고, 아내 이순옥 등과 함께 장녀 소명, 차녀 소남, 장남 유백, 차남 유진 등을 앞세우고 가족 사진을 박았다. 이태준과 아이들은 환하게 웃고 있다. 어린 시절은 박복했으나 단란한 일가를 이룬 성북동 시절은 이태준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터다. 비 갠 맑은 아침에는 새들이 꽃숲에서 지저귀고, 여름에는 뜰의 발육이 좋은 큰 파초가 절정에서 꽃을 피웠다. 파초 그늘 아래 의자를 놓고 남국의 정조를 명상하던 그 즈음의 조촐한 행복을 드러내는 이 사진을 들여다볼때마다 내 가슴은 아릿해진다. 이태준 일가의 뒤로 사철나무가 보인다. 얼마 전 이태준의 성북동 옛집을 다녀왔는데 지금도 이 사철나무는 그 푸름을 뽐낸다. 이 집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이태준의 핏줄이 운영하는 찻집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소극적 처세에만 머문 제 행적을 내내 자책하며 자괴감을 떨쳐내지 못한 이태준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돌연 홍명희와 함께 월북하지만 1956년 무렵 친일 혐의가 짙고 우경적 경향의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규탄당한 뒤 함흥으로 추방되어 콘크리트 블록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다.
‘무서록’은 이태준의 수필집이다. 파초와 난을 키우고, 오래된 성벽을 바라보며 양치질을 하고, 책을 아끼고, 고완품(古翫品)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이태준의 청담고박한 생활과 서권향(書卷香) 그윽한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산문들이 실려 있다. 이태준의 성정은 다감하고 온화한 탓에 두루 깨끗한 고요함을 바라고, 고상한 덕과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청결한 취미를 아꼈다. 책과 난과 서화(書畵)와 도자(陶瓷)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불가피한 성정 탓이다. 허나 생활은 촌음의 여유도 없이 바특하기만 했던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러 해 별러 초려(草廬) 한 칸을 지어놓고 공부할 책권(冊卷)과 눈을 쉬일 서화 몇 폭을 걸어놓고 상심루(賞心樓)란 현판을 얻어 걸어놓은 지 이미 7, 8년. 그러나 하루를 누(累) 없이 상심낙사(賞心樂事)한적이 별로 없다.” (‘난’) 한일(閑日)에 주린 각박한 생활에서 그가 누린 청복은 난을 돌보는 일이었다. 기르는 난들에 물을 주고 볕을 쪼여주고 잎을 닦아주는 것에서 마음의 위안과 소일의 보람을 찾았다.
책읽기에 지치거나 글쓰기가 막힐 때 난초 잎을 닦는 것이 제일이라고 말한다. 하루 저녁의 부주의로 난들을 얼려 잃은 뒤 상실감이 얼마나 컸던지 마치 식구가 집 나가 돌아오지 않은 듯 허전해 견딜 수 없었다고 쓴다. 이태준은 파초를 사랑했다. 소 선지가 파초에 좋은 거름이란 소리를 듣고 소 선지와 생선 씻은 물, 깻묵물을 틈틈이 주며 정성스럽게 키운다. 마침내 파초는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로 우뚝 자란다. 늠름하게 잘 자란 파초에 대한 그의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은 파초를 팔아 집 수리비에라도 보태라는 이웃의 채근에도 꿈쩍 않는 데서 드러난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 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파초’) 장대하게 키운 파초가 폭염 속에 드리우는 그 싱그러운 그늘에 눈길을 주고, 비 내리는 날 넓은 파초 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청복으로 삼는 이의 여유가 손에 잡힐 듯하다.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분원사기(分院沙器), 담청 바탕에 선홍 반점이 선연한 천도형(天桃形) 연적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어린 시절에 헤어져 아무 기억이 없는, 글씨를 좋아하셨다는 아버지의 기품과 교훈, 그리고 참먹 향기를 맡아보려는 그의 태도는 견결하다.(‘고완’) 이태준은 고완품에 마음을 뺏겨 완물상지(玩物喪志)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호고인(好古人)의 속되지 않고 고고하며 의젓한 취향이 심미적 자부심을 예찬한다.
“그림 하나를 옮겨 걸고, 빈 접시 하나를 바꿔놓고도 그것으로 며칠을 갇혀 넉넉히 즐길 수 있게 된다. 고요함과 가까움에 몰입되는 것이다. 호고인들의 성격상 극도의 근시적 일면이 생기기 쉬운 것도 이러한 연유다. 빈 접시요, 빈 병이다. 담긴 것은 떡이나 물이 아니라 정적과 허무다. 그것은 이미 그릇이라기보다 한 천지요 우주다. 남 보기에는 한낱 파기편명(破器片皿)에 불과하나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무궁한 산하요 장엄한 가람(伽藍) 일 수 있다.”(‘고완품과 생활’)
‘무서록’은 아껴 음미하며 읽을 만한 책이다. 삶과 자연, 문학과 크고 작은 생명에까지 미친 날카로운 관찰과 그윽한 성찰은 잔잔한 감동을 가져온다. 몇 평 안 되는 마당에 앵두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 모란, 백화, 파초를 심어 기르며 식구들 모두 떠받들어 귀히 여기는 범부의 행복을 실감할 수 있고, 고서와 옛 기물들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며 기쁨을 누리는 선비의 정신을 엿보고 그 청복의 고요함을 부러워할 수도 있다. 그는 “천재는 더 오래 산다고 더 나올 것이 없게 그 짧은 생애에서라도 자기 천분(天分)의 절정을 숙명적으로 빨리 도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枯淡)의 노경(老境)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조숙’) 그가 품은 높은 뜻과 교양과 견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쉰을 갓 넘기며 맞은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설야 등 극좌파와의 권력쟁투에서 밀려 변방으로 쫓겨나고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만난(萬難)에 맞닥뜨린 것을 이념의 현혹으로 잠시 저 북쪽을 이채찬연(異彩燦然)한 화원으로 착각한 어리석음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학이 “더 넓은 삶, 자유의 영역에 들어가는 여권”(수전 손택)이라면, 이태준은 그 여권을 들고 불운한 운명이 소용돌이치는 시간대(時間帶)를 잘못 찾아들어간 것이다. 운명의 생태는 어느 시대에나 누구에게나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다. 다만 반세기 뒤에 한 후학이 “고담의 노경”을 누리지 못하고 떠난 그의 비운을 쓸쓸하게 회고한다는 사실을 여기에 적어둔다. 〈장석주_시인·문학평론가>
○ 시로 적은 조국해방의 열망
《문장》역시 성북구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문장》에서 소설을 심사했던 이태준은 성북동에 거주했고 시를 심사했던 정지용은 이종석 가옥에서 활동했으며 돈암동에서 거주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장정(裝幀)은 성북동 노시산방의 김용준이 주도했는데 이들 외에도 《문장》에 참여한 많은 예술인들이 성북구에 거주하거나 성북구를 문학의 아지트 삼아 자주 드나들곤 했지요.
○ 시로 적은 조국해방의 열망
《문장》역시 성북구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문장》에서 소설을 심사했던 이태준은 성북동에 거주했고 시를 심사했던 정지용은 이종석 가옥에서 활동했으며 돈암동에서 거주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장정(裝幀)은 성북동 노시산방의 김용준이 주도했는데 이들 외에도 《문장》에 참여한 많은 예술인들이 성북구에 거주하거나 성북구를 문학의 아지트 삼아 자주 드나들곤 했지요.
혜화문 : 이태준의 눈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혜화문(동소문) 밖 성북동의 모습
일제 강점기 혜화문 밖 성북동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교외지역이면서 지가가 싼 편이라, 서민들이 주로 살았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혜화문에서 도보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태준은 월북 작가였기에 80년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운문에 지용, 산문에 태준’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자연스럽게 성북동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작가가 살던 당시 성북동 일대는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이 살지만, 아직 인정이 남아있는 성 밖 마을이었다. 작가는 배우지 못해 어리석지만, 악하지는 않은 하층민들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주로 자전적인 면들을 바탕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혜화문 : 이태준의 눈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혜화문(동소문) 밖 성북동의 모습
일제 강점기 혜화문 밖 성북동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교외지역이면서 지가가 싼 편이라, 서민들이 주로 살았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혜화문에서 도보로 약 20분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태준은 월북 작가였기에 80년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운문에 지용, 산문에 태준’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자연스럽게 성북동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작가가 살던 당시 성북동 일대는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이 살지만, 아직 인정이 남아있는 성 밖 마을이었다. 작가는 배우지 못해 어리석지만, 악하지는 않은 하층민들에게 애정을 느끼면서 주로 자전적인 면들을 바탕으로 관찰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문인들의 가정생활
A기자
이태준 씨 가정생활
씨는 남달리 아름다운 소설을 쓰느니만큼 가정생활에도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다.
먼저 부부 간에 있어서 매우 원만하고 재미가 많으시다. 부인과 함께 산으로 괴석을 주으러 다니고 또 장녀(소명) 등 삼인 동행으로 산초를 캐러 다니는것을 보면 씨의 부부 간 소식을 알기에 족하다.
씨는 자녀로 장녀 소명(3세)과 아들 유백(2세)이 있는데 상냥한 씨이니만큼 자녀에 대한 부성애도 지극하다. 외출하였다 집에 오는 때면 반드시 과자 등을 사다가 자녀를 주는데 어떤 때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많이 따른다고.
씨는 꽃을 매우 사랑하여 집 좌우에는 각색 화초를 많이 심었는데 할년, 꽃창포, 철쭉, 미쓰칼니포니아, 파초 등을 많이 심었고 씨의 특히 사랑하는 꽃은 진달래라고 한다.
씨는 가정에 있어서 음식이면 무엇이든지 잘 자시는데 특히 떡을 좋아하여 틈틈이 떡을 많이 해 자신다고 하며 과실로는 참외, 수박을 좋아하시고 가장 싫어하는 과실은 대추, 밤 등이라고 한다.
씨는 가정에 있어서도 매우 명랑하고 모든일에 세밀하여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손수 마당을 쓸고 화초에 물을 주며 산에 가서 철쭉꽃을 파다가 심는 등 퍽이나 부지런한 모양이나 집안에서 잔소리를 하여 공연한 싸움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나 재미있는 부부이니만치 간간이 사랑싸움이 있는 모양.
씨는 창작에 있어서 밤 열두 시까지 종종 쓰는 일이 있는데 고요한 밤에 촛불을 켜고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한다. 씨는 체홉, 투르게네프 등을 좋아하여 서재에는 그네들의 저서가 많으며 그네들의 사진도 있다.
씨의 가정은 문자 그대로 ‘스윗홈’인데 가정생활에 있어서 가장 괴로운 것은 물질의 부족이며 그와 반면에 가장 기쁜 것은 자녀들의 재롱을 보는 것이라고. 씨의 가정의 1개월 생활비는 약 50원가량이고 저금은 별로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