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다. 1929년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적빈」이 입선, 「잡초」, 「두만강」 등 50∼6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종교잡지 『예수』를 창간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에 당선된 「순애보」는 다음 해 6개월간 신문에 연재되었고 단행본 초판 1천부 매진, 70여 판 인쇄라는 기록을 세웠다. 1940년대 돈암동 산72-1번지(현 동선동4가 352)에 살았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가 탈출하여 다시 돈암동 98-1번지에 집을 구했다. 1958년 이사 간 정릉동 685-123호 집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투병 생활을 하였다. 돈암동 미아리고개로 이사한 뒤 세상을 떠났다.
비고:1940년대 돈암동 산72-1번지(현 동선동4가 352) 거주 6.25전쟁 이후 돈암동 98-1번지 거주 1958년 정릉동 685-123 거주 1960년대 투병생활 이후 미아리고개 일대에 거주
「별」은 이제 어디에 朴啓周(박계주)씨의 靈前(영전)에 붙여
최정희씨, 모윤숙씨, 조애실씨, 이렇게 같이들 보러갔을 때 박선생은 아기처럼 웃으며 기뻐했지요. 박선생이 좋아하시는 냉면을 시켜다 먹으며 옛날이야기들도 했지요. 걸음도 조금씩 걷기 시작하고, 한 1년후에는 모든 기능이 회복되리라 믿어졌던 박선생. 그래서 우리는 안심했지요. 너무나 박선생 일에 대해 방심했지요. 오랜 병치료에 시달린 끝에 정릉집마저 팔아버리고 미아리 산꼭대기 게딱지 같은 집으로 옮겨앉으신 박선생, 거기서 한없이 한없이 옛 친구들이 그리워, 사람들이 그리워 기나긴 나날을 옛 추억을 더듬으며 그리움 속에 살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주지않는 이 청명한 봄날에 박선생은 다시 못 올 저 세상으로 더 큰 작품을 써보려던 야망과 그리움을 안은채 가버리셨군요.
경향신문 1966. 4. 11
「별」은 이제 어디에 朴啓周(박계주)씨의 靈前(영전)에 붙여
최정희씨, 모윤숙씨, 조애실씨, 이렇게 같이들 보러갔을 때 박선생은 아기처럼 웃으며 기뻐했지요. 박선생이 좋아하시는 냉면을 시켜다 먹으며 옛날이야기들도 했지요. 걸음도 조금씩 걷기 시작하고, 한 1년후에는 모든 기능이 회복되리라 믿어졌던 박선생. 그래서 우리는 안심했지요. 너무나 박선생 일에 대해 방심했지요. 오랜 병치료에 시달린 끝에 정릉집마저 팔아버리고 미아리 산꼭대기 게딱지 같은 집으로 옮겨앉으신 박선생, 거기서 한없이 한없이 옛 친구들이 그리워, 사람들이 그리워 기나긴 나날을 옛 추억을 더듬으며 그리움 속에 살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주지않는 이 청명한 봄날에 박선생은 다시 못 올 저 세상으로 더 큰 작품을 써보려던 야망과 그리움을 안은채 가버리셨군요.
경향신문 1966. 4. 11
소설가이다. 《간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한 「적빈」으로 1929년 등단하였다. 기독교 신자로 《예수》를 창간하고, 종교논문과 시조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에 당선된 「순애보」는 다음해 6개월 간 신문에 연재되며 화제에 올랐고, 단행본 초판 1천부 매진, 70여 판 인쇄라는 기록을 세웠다. 「죄 없는 죄인」, 「순애보」, 「별아 내 가슴에」 등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40년대 돈암동 산72-1번지로 이사해 살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납북, 탈출에 성공해 다시 돈암동 98-1번지에 집을 구했다. 같은 성북구에 살던 김내성과 방인근, 문단 활동을 같이 하던 김광섭, 안수길, 조병화들과 교류하였다. 1958년 이사 간 정릉동 685-123호 집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투병생활을 하였다. 돈암동 미아리고개로 이사한 뒤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이다. 《간도일보》 신춘문예에서 입선한 「적빈」으로 1929년 등단하였다. 기독교 신자로 《예수》를 창간하고, 종교논문과 시조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에 당선된 「순애보」는 다음해 6개월 간 신문에 연재되며 화제에 올랐고, 단행본 초판 1천부 매진, 70여 판 인쇄라는 기록을 세웠다. 「죄 없는 죄인」, 「순애보」, 「별아 내 가슴에」 등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40년대 돈암동 산72-1번지로 이사해 살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납북, 탈출에 성공해 다시 돈암동 98-1번지에 집을 구했다. 같은 성북구에 살던 김내성과 방인근, 문단 활동을 같이 하던 김광섭, 안수길, 조병화들과 교류하였다. 1958년 이사 간 정릉동 685-123호 집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투병생활을 하였다. 돈암동 미아리고개로 이사한 뒤 세상을 떠났다.
박계주(朴啓周) 1913-1966 서운(曙雲)
소설가. 간도 용정 출생. 1929년 《간도일보》에 「적빈赤貧」이 입선되었고, 1937년 《새사람》의 동인 겸 편집장을 지냈다. 1938년 「순애보」가 《매일신보》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 『순애보』, 『죄 없는 죄인』(1947), 『진리의 밤』(1957) 등이 영화화되었다.
박계주(朴啓周) 1913-1966 서운(曙雲)
소설가. 간도 용정 출생. 1929년 《간도일보》에 「적빈赤貧」이 입선되었고, 1937년 《새사람》의 동인 겸 편집장을 지냈다. 1938년 「순애보」가 《매일신보》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 『순애보』, 『죄 없는 죄인』(1947), 『진리의 밤』(1957) 등이 영화화되었다.
최장기 베스트셀러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1913년 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시절 읽은 문학작품은 이국땅에서 겪은 설움과 한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작가의 삶을 그린 박계주는 1929년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적빈」이 입선, 「잡초」, 「두만강」 등 50∼6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종교잡지 《예수》를 창간하여 종교논문을 30여 편 발표하였다. 1936년에는 전영택 목사의 주선으로 《새사람》편집도 맡았는데, 이때 춘원 이광수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박계주의 대표작 「순애보」, 「진리의 밤」, 「구원의 정화」 등에는 기독교 정신이 반영되었다.
1938년 매일신보의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된 「순애보」는 박계주를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매일신보의 현상모집 기일이 두 달 연기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고민 끝에 응모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시절 서울 내자동에 오동나무집으로 불리던 하숙집에 머물며 밤낮으로 글을 쓴다. 당선금은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천 원이었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천 5백 매나 되는 원고를 완성하였다. 당선작은 박진朴進이라는 필명으로 1939년 1월 1일부터 6월 17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상주의와 기독교적 박애주의를 바탕으로 한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층에게까지 큰 인기를 끌어 단행본 초판 1천부는 보름 만에 매진되었다.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던 매일신보가 「순애보」 덕분에 구독률이 두 배 이상 높아져 기사회생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출판사를 달리해 70여 판 이상을 찍으며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박진朴進’, ‘서운曙雲’이라는 필명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순애보>, <죄 없는 죄인>, <진리의 밤>, <별아 내 가슴에> 등은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다시 한 번 관심을 받았다.
최장기 베스트셀러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는 1913년 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시절 읽은 문학작품은 이국땅에서 겪은 설움과 한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작가의 삶을 그린 박계주는 1929년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적빈」이 입선, 「잡초」, 「두만강」 등 50∼6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종교잡지 《예수》를 창간하여 종교논문을 30여 편 발표하였다. 1936년에는 전영택 목사의 주선으로 《새사람》편집도 맡았는데, 이때 춘원 이광수를 만나 그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박계주의 대표작 「순애보」, 「진리의 밤」, 「구원의 정화」 등에는 기독교 정신이 반영되었다.
1938년 매일신보의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된 「순애보」는 박계주를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매일신보의 현상모집 기일이 두 달 연기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고민 끝에 응모하기로 마음을 정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시절 서울 내자동에 오동나무집으로 불리던 하숙집에 머물며 밤낮으로 글을 쓴다. 당선금은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천 원이었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천 5백 매나 되는 원고를 완성하였다. 당선작은 박진朴進이라는 필명으로 1939년 1월 1일부터 6월 17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상주의와 기독교적 박애주의를 바탕으로 한 순수한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층에게까지 큰 인기를 끌어 단행본 초판 1천부는 보름 만에 매진되었다.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던 매일신보가 「순애보」 덕분에 구독률이 두 배 이상 높아져 기사회생 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출판사를 달리해 70여 판 이상을 찍으며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박진朴進’, ‘서운曙雲’이라는 필명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순애보>, <죄 없는 죄인>, <진리의 밤>, <별아 내 가슴에> 등은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다시 한 번 관심을 받았다.
1940년대에는 삼청동에서 돈암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돈암동 산72-1번지(현재 동선동4가 352)에서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납북되었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돌아왔지만 돈암동 집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후 돈암동 98-1번지에 세를 들어 다시 살림을 꾸렸다. 당시 추리소설로 인기를 얻은 김내성이 돈암동 전차종점 근처에, 연애소설로 명성을 떨친 방인근이 성북동에 살고 있어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많은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이 되어 한국 대중영화의 수원지라 불리기도 했다. 김내성과 친분으로 1957년 그가 타계한 이후 묘비 건립 기금마련에 힘쓰고, 내성문학상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5년 발족한 ‘한국자유문학자협회’의 사무국장과 ‘국제PEN클럽’ 초기 회원으로 활동하며 김광섭, 모윤숙, 안수길, 조병화 등과 교류하였다. 1958년 정릉동 685-123호에 집을 얻었다. ‘부흥주택, 국민주택’이라고 불린 시멘트로 지은 공공주택단지가 들어서며 집을 분양받은 것이다. 오래 머물던 돈암동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낯설지 않고, 친구들과 지내기도 좋았다. 여느 때처럼 모임에서 약주를 마시고 돌아와 잠을 청한 날, 문틈으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고 만다.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여수」가 필화사건에 휩싸여 집필이 중단되며 생활이 어려워진 때였다. 치료비 때문에 정릉 집마저 팔아버리고 돈암동 미아리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3년 간 투병생활을 하였다. 마지막 1년을 보낸 집은 미아리고개 막바지, 미아리고개 버스정류소에서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곳이었다.
오랜 병 치료에 시달린 끝에 정릉 집마저 팔아버리고 미아리산꼭대기 게딱지같은 집으로 옮겨 앉으신 박선생, 순애보 이래 문단의 산역사요, 증인이었던 박선생, 그 독설과 재담으로 남의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고 훈훈하게도 해 주던 박선생, 건장한 체구에 아기 같이 욕심 없던 박선생, 그저 마냥 무엇인가 그리워 친구들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던 죄 없는 박선생, 알아 누우신 3년 동안 더욱 그리움에 지치고 야속한 인정에 지쳐영 눈 감어 버리신 박선생, 오래잖아 라일락도 필 이 따사로운 봄날에 박선생은 어이그리 훌훌히 떠나셨나이까.
전숙희, <별은 이제 어디에 박계주씨의 영전에 붙여>경향신문, 1966.04.11
박계주는 축대 위로 올라선 돈암동 13, 9통 6반 자그마한 집에서 1966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소설 외에도 시, 수필, 평론 등 여러 분야의 글을 남겼고, 현대 대중문학을 개척했다는 평가 받은 그의 장례는 문인장文人葬으로 세종로 예총회관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1940년대에는 삼청동에서 돈암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돈암동 산72-1번지(현재 동선동4가 352)에서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납북되었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돌아왔지만 돈암동 집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후 돈암동 98-1번지에 세를 들어 다시 살림을 꾸렸다. 당시 추리소설로 인기를 얻은 김내성이 돈암동 전차종점 근처에, 연애소설로 명성을 떨친 방인근이 성북동에 살고 있어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많은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이 되어 한국 대중영화의 수원지라 불리기도 했다. 김내성과 친분으로 1957년 그가 타계한 이후 묘비 건립 기금마련에 힘쓰고, 내성문학상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5년 발족한 ‘한국자유문학자협회’의 사무국장과 ‘국제PEN클럽’ 초기 회원으로 활동하며 김광섭, 모윤숙, 안수길, 조병화 등과 교류하였다. 1958년 정릉동 685-123호에 집을 얻었다. ‘부흥주택, 국민주택’이라고 불린 시멘트로 지은 공공주택단지가 들어서며 집을 분양받은 것이다. 오래 머물던 돈암동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낯설지 않고, 친구들과 지내기도 좋았다. 여느 때처럼 모임에서 약주를 마시고 돌아와 잠을 청한 날, 문틈으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고 만다.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여수」가 필화사건에 휩싸여 집필이 중단되며 생활이 어려워진 때였다. 치료비 때문에 정릉 집마저 팔아버리고 돈암동 미아리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3년 간 투병생활을 하였다. 마지막 1년을 보낸 집은 미아리고개 막바지, 미아리고개 버스정류소에서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곳이었다.
오랜 병 치료에 시달린 끝에 정릉 집마저 팔아버리고 미아리산꼭대기 게딱지같은 집으로 옮겨 앉으신 박선생, 순애보 이래 문단의 산역사요, 증인이었던 박선생, 그 독설과 재담으로 남의 가슴을 서늘하게도 하고 훈훈하게도 해 주던 박선생, 건장한 체구에 아기 같이 욕심 없던 박선생, 그저 마냥 무엇인가 그리워 친구들을 찾아 밤거리를 헤매던 죄 없는 박선생, 알아 누우신 3년 동안 더욱 그리움에 지치고 야속한 인정에 지쳐영 눈 감어 버리신 박선생, 오래잖아 라일락도 필 이 따사로운 봄날에 박선생은 어이그리 훌훌히 떠나셨나이까.
전숙희, <별은 이제 어디에 박계주씨의 영전에 붙여>경향신문, 1966.04.11
박계주는 축대 위로 올라선 돈암동 13, 9통 6반 자그마한 집에서 1966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소설 외에도 시, 수필, 평론 등 여러 분야의 글을 남겼고, 현대 대중문학을 개척했다는 평가 받은 그의 장례는 문인장文人葬으로 세종로 예총회관 광장에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