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이다. 차범석은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고, 연희전문대학교에 입학한 후 연극 극본 집필과 연출 활동을 시작했다.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글을 썼는데,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 이듬해 「귀향」이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삼선동에 자가를 마련했다가 좀더 싸고 넓은 정릉(보국문로16가길 80)으로 이사하여 평생을 살면서 많은 문화예술계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1963년 극단 ‘산하’를 창단하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0년간 꾸준히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표작으로는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산불」,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원일기」 등이 있다.
목포 유달산 아래 북교동 184번지에서 태어난 차범석은 우리나라 연극계가 성장하는데 버팀목이 된 극작가이다. 어린 시절, 책을 읽거나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와 뛰어놀기보다 혼자 노래하고, 공연 때 보았던 최승희의 춤을 따라 추며 시간을 보냈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 연극에서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아이 역할을 한 뒤로 무대를 동경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가서 2년을 지내지만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을 당해 제주도까지 끌려가고 만다. 곧 해방이 되고, 다른 학생들 보다 너덧 살이 많은 스물세 살에 연희전문학교(현재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차범석은 연극무대라면 가리지 않았고, 영화나 전시 관람, 문학인과 교류 등 예술 전 분야를 모두 섭렵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대학시절을 보냈다. 염상섭이나 유치진, 이무영, 이해랑 등 문화계 중진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갔다. 대학 선후배들과‘극예술연구회’를 꾸려 극본가로, 연출가로, 배우로 연극에 참여했다. 1949년 유치진과 오영진이 주관한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 차범석이 연출한 「오이디프스왕」이 차석次席을 하고, 이를 기회로 연극을 꿈꾸는 대학생들의 모임인 ‘대학극회’가 만들어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차범석, 김병규, 고려대의 김경옥, 최창봉, 동국대의 조효경들이 모여 희곡 낭독회를 주최하고, 연극을 발표했다.
문학이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독 연극은 한 공간 안에 모여 있는 관객 동시에 상대하는 예술이라는 개념파악은 먼 훗날까지도 나의 작업에 큰 견인력이 되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으로‘대학극회’도 무산되고, 회원도 흩어졌다. 아내의 패물을 팔아가며 버텼지만 형제들까지 거두어야 하는 살림은 곧 바닥이 나고, 타향살이를 더 버티지 못해 낙향을 결심한다. 그러나 전쟁은 넉넉했던 고향집에도 영향을 미쳤고, 목포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학교 사택에서 생활한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난, 인간의 죽음과 맞대면 한 차범석은 스스로, 세상에 대해 단단해진다. 교사를 하면서도 연극을 향한 끈을 놓지 않아 여러 지면에 꾸준히 희곡을 발표하고, 연출한 극을 무대에 올린다. 1951년에는 목포문화협회에서 주최한 예술제에 극본, 연출, 주연을 맡은 「별은 밤마다」를 공연한다.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서 공연한 차범석의 작품이었다. 전쟁 후에도 학교에 연극반을 만들어 연극을 가르치고, 학교 예술제에서 연극을 공연하며 3년을 더 목포에서 지낸다.
서른두 살, 늦은 나이에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분야에 당선, 목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다. 정식 등단만 늦었을 뿐 극본 집필과 연출을 하며 이미 연극계에서 활동력을 인정받을 때였다. 같은 해 대학극회 동인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제 극단으로 소극장 운동을 주도한 ‘제작극회’(1956)를 만든다. 차범석이 번역한 「사형수(원작:홀 워시 홀)」 공연을 시작으로 차범석 극본의 「공상도시」, 「불모지」 등을 공연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자리를 잡은 동네는 가회동이었다. 덕성여고의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잠시 셋방살이를 했고, 왕십리, 신당동 전셋집을 옮겨 다니다 삼선동 21-1번지 작은 양옥집을 마련했다. 서울에서 처음 내 집을 장만했지만,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 집값이 더 싼 정릉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정릉동은 목포 출신 문인인 박화성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박화성은 친누나와 친구라 가족처럼 지냈는데, 차범석이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하였다.
정릉4동 266-10번지, 마당이 있는 단층 양옥이었다. 넓어진 집 마당에 문주란, 연산홍, 동백 같은 좋아하는 꽃을 한껏 심고, 자녀들의 혼인 같은 기념할 일이 생기면 단풍, 대추, 포도, 은행, 라일락 같은 나무를 한그루씩 심었다. 유럽에 다녀온 해에는 여행에서 본 사루비아 꽃이 인상에 남았다며 마당 가득 사루비아를 심기도 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5남매가 모두 혼인을 해서 살림을 나가고, 『차범석희곡집』중 절반인 4권이 쓰였다.
어느덧 목련 꽃봉오리가 눈에 띌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몇 해 전에 육백 원을 주고 두 그루를 사다 심은 목련이다. 올 봄에는 두 그루의 목련 나뭇가지에 힘겨웁도록 꽃이 피리라고 생각하니 지금부터 나는 흐뭇해지기만 한다. … 잔디가 제대로 자라고 나무 잎사귀가 제 형태를 갖추고 장미가 잽싸게 피어나는 오월이 되면 나는 정원에서 식사를 한다. 아침식사의 즐거움은 뜰에서 할때다. … 새들이 머리 위 라일락 가지에서 노래를 부른다. 멀리 북악산 등성이가 바라다 보이는 뜰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면 나는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 차범석, 「아침식사」-
서울로 올라와 십여 년 동안 다니던 방송국을 그만 둔 뒤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마당 쪽으로 창을 낸 서재에서 평소에 떠오르는 소재나 상황을 스케치 해 두었다가 생각을 정리해가며 글을 썼다. 집필 시간인 밤부터 새벽까지는 예민해져서 식구들은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할 만큼 조심을 했다.
글과 연극 밖에 모르던 그를 대신해 아이를 키우고 관공서에 가거나 집을 고치는 것까지 집 안팎일은 모두 아내 몫이었다. 차범석은 평생 휴대폰과 신용카드, 자동차 없이 살 정도로 무언가에 매이는 것도 꺼려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산 정릉 집은 연극 계통에 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와 봤다고 할 정도로 손님이 잦았고, 설날이면 세배객이 집을 가득 채웠다. 끼가 많았던 차범석은 흥이 오르면 동석한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풍류를 즐겼다. 관심 폭이 넓은 만큼 화가 이만익, 무용가 이매방, 영화감독 김수용, 민속학자 이두현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나주 출신인 아내는 겨울이 되면 장독에 홍어를 삭혀 손님맞이 음식으로 준비해두었고, 갑작스럽게 오는 손님이라도 언제나 반겨 맞이했다.
차범석이 극단 대표로 아버지 같았다면, 차범석의 아내는 연극 의상이나 소품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연극 연습 중이나 연극이 끝난 뒤 음식을 해가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극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대표, 연극계의 중책을 맡으면서 일에 관해서는 엄격하였다.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바른 말을 직설적으로 잘하여 차범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후배들이나 신인 배우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지금보다도 예술이나 창작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때 극단을 꾸리고 관객을 모으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연극을 보는 사람도 드문 상황이니 돈이 모일 리가 없었다. 가난한 사정을 아는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고, 극단 연습실도 구하기 힘들어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연습을 하였다. 온 힘을 모아 만든 연극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평소 도움을 받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빠뜨리지 않고 초대권을 보냈다. 그러나 관객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연극을 보지 않는 관객을‘짝사랑’하는 기분이었다.
같은 시대를 사는 관객과 호흡하며 시대를 반영하고 의미를 주는 연극을 하고자 차범석과 김유성, 오화섭, 임희재들은 1963년 극단‘산하’를 창단하였다. 창단 다음해부터 차범석이 대표를 맡아 극단 설립 취지처럼 현실을 담은 창작극을 발굴하여 공연하였다. 운영위원을 두어 배우와 연출가가 연극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고, 지방순회공연을 하며 관객과 만났다.
극단의 대표작은 차범석이 쓰고 연출한 <산불>(1966)이었다. 광주에서 1만 5천 명이나 되는 관객이 보러 올만큼 공연은 크게 성공하였다. 배우 이순재, 천선녀, 강부자 등이 활동하며 오학영, 윤대성, 최인훈 등의 창작극과 번역극을 선보였다. ‘산하’는 어려운 상황에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연극계를 이끌었지만, 연극이 본래 역할과 의미를 잃고 진정한 예술로 평가 받지 못하는 풍토에 20년만인 1983년 자진 해산한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애정으로 대하되 예리하게 파헤치는 일만이 작가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가려진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들추고 그래서 절망 아닌 힘을 부여하는 길이 작가의 책임이자 오늘의 연극이 나아갈 길이라고 믿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차범석에게 이 땅과 사람은 곧 연극이었다. 특히‘고향에서 내 육체가 태어난 것만이 아니라 고향이 나로 하여금 작품을 쓰도록 키워 주었고 그 속에서 영감과 신념과 긍지를 느끼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향은 떨어져 있지만 늘 같이 있는 곳이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밀주」, 대표작인「산불」,「 갈매기떼」,「 학이여 사랑일레라」등은 고향땅을 배경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가리켜 리얼리즘 희곡작가니 리얼리즘연극의 파수꾼이라고 불러주게 되었다. 사실상 나의 초기작품인 <밀주>, <귀향>, <산불>, <불모지> 등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었고 <청기와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 <갈매기떼> <새야새야 파랑새야> 등은 사회적 비리나 정치적 부패를 파헤치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TV극 <전원일기>의 초기 1년간 집필도 같은 맥락이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목포의 천석지기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때까지 방학이면 목포에서 40리 떨어진 중등포 간척지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농장에 놀러가 농촌의 생활과 정情에 푹 빠져 지냈다. ‘물가에서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 모깃불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연기와 마른 풀 타는 내음, 별똥이 사라져가는 밤하늘 쳐다보며 부르는 노래, 밭에서 갓 따온 참외며 수박의 싱그러운 미각,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도깨비 얘기를 듣다가 그만 평상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추억이 깃든 농촌은‘ 맑고 향기롭고 구김 없는 꿈’을 꿀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었다. 후에「전원일기」극본을 부탁받 았을 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 생활만 한 자신이 어떻게 농촌 드라마를 쓰느냐고 하였지만, 어린 시절 경험과 리얼리즘 연극을 해온 차범석은 누구보다 1980년대를 사는 농촌의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 전 국민이 생각하는‘어머니’상像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전원일기」의 김회장 아내(배우: 김혜자)의 모습은 평생 자신과 극단의 내조를 한 차범석 아내의 모습이기도 했다. 차범석은 동랑 유치진의 영향으로 극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유치진에 이어 우리나라 사실주의 연극의 맥을 이었다. 한국전쟁 때 고향으로 가는 19일 간의 피난길에서 죽음 앞에서는 상하 귀천도, 부자와 거지의 구분도 없음을 깨달았고, 20세기 격변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생생히 겪었다. 인간과 사회를 보는 매서운 눈과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그는 연극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자신의 신념을 주장할 줄 아는 연극인이었다. 때로는 풍자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 소외된 사람들과 우리가 처한 시대적 고뇌,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극을 만들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꿈하늘」, 「장미의 성」 등 리얼리즘 연극을 대표하는 작품을 남긴 차범석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품을 계속 집필하였고, 50여 년간 소극장 연극운동 현장에 있던 경험을 담아 『한국소극장연극사』(2004)를 출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현대 연극이 자리 잡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문화예술계의 어른으로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자세와 연극계의 앞날에 대해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평생 모은 책 3천 5백여 권과 연극 자료들을 고향에 있는 대학과 산울림 소극장에 기증하였고, 목포에서는 문학관을 지으며 늘 고향을 그리워한 차범석의 작품과 유품을 모아 전시하였다. 차범석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 박옥순이 유산을 정리한 돈을 연극인을 위해 내 놓아 ‘차범석연극재단’이 설립되었다. 아버지를 이어 연극의 길을 간 큰 딸 혜영이 이사장을 맡아 창작극을 지원하는‘차범석희곡상’을 만들고, 차범석의 연극정신을 이어 우리나라 연극계의 발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천성이 가무와 신명을 마다하지 않으니 이 또한 나의 숙명이리라’는 묘비명처럼 연극이 숙명이었던 연극인 차범석은 지금도 우리 연극계를 비추는 빛으로 남아있다.
목포 유달산 아래 북교동 184번지에서 태어난 차범석은 우리나라 연극계가 성장하는데 버팀목이 된 극작가이다. 어린 시절, 책을 읽거나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와 뛰어놀기보다 혼자 노래하고, 공연 때 보았던 최승희의 춤을 따라 추며 시간을 보냈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 연극에서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아이 역할을 한 뒤로 무대를 동경하게 되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가서 2년을 지내지만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을 당해 제주도까지 끌려가고 만다. 곧 해방이 되고, 다른 학생들 보다 너덧 살이 많은 스물세 살에 연희전문학교(현재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차범석은 연극무대라면 가리지 않았고, 영화나 전시 관람, 문학인과 교류 등 예술 전 분야를 모두 섭렵하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대학시절을 보냈다. 염상섭이나 유치진, 이무영, 이해랑 등 문화계 중진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갔다. 대학 선후배들과‘극예술연구회’를 꾸려 극본가로, 연출가로, 배우로 연극에 참여했다. 1949년 유치진과 오영진이 주관한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 차범석이 연출한 「오이디프스왕」이 차석次席을 하고, 이를 기회로 연극을 꿈꾸는 대학생들의 모임인 ‘대학극회’가 만들어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차범석, 김병규, 고려대의 김경옥, 최창봉, 동국대의 조효경들이 모여 희곡 낭독회를 주최하고, 연극을 발표했다.
문학이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독 연극은 한 공간 안에 모여 있는 관객 동시에 상대하는 예술이라는 개념파악은 먼 훗날까지도 나의 작업에 큰 견인력이 되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으로‘대학극회’도 무산되고, 회원도 흩어졌다. 아내의 패물을 팔아가며 버텼지만 형제들까지 거두어야 하는 살림은 곧 바닥이 나고, 타향살이를 더 버티지 못해 낙향을 결심한다. 그러나 전쟁은 넉넉했던 고향집에도 영향을 미쳤고, 목포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학교 사택에서 생활한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난, 인간의 죽음과 맞대면 한 차범석은 스스로, 세상에 대해 단단해진다. 교사를 하면서도 연극을 향한 끈을 놓지 않아 여러 지면에 꾸준히 희곡을 발표하고, 연출한 극을 무대에 올린다. 1951년에는 목포문화협회에서 주최한 예술제에 극본, 연출, 주연을 맡은 「별은 밤마다」를 공연한다.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서 공연한 차범석의 작품이었다. 전쟁 후에도 학교에 연극반을 만들어 연극을 가르치고, 학교 예술제에서 연극을 공연하며 3년을 더 목포에서 지낸다.
서른두 살, 늦은 나이에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분야에 당선, 목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다. 정식 등단만 늦었을 뿐 극본 집필과 연출을 하며 이미 연극계에서 활동력을 인정받을 때였다. 같은 해 대학극회 동인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제 극단으로 소극장 운동을 주도한 ‘제작극회’(1956)를 만든다. 차범석이 번역한 「사형수(원작:홀 워시 홀)」 공연을 시작으로 차범석 극본의 「공상도시」, 「불모지」 등을 공연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자리를 잡은 동네는 가회동이었다. 덕성여고의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잠시 셋방살이를 했고, 왕십리, 신당동 전셋집을 옮겨 다니다 삼선동 21-1번지 작은 양옥집을 마련했다. 서울에서 처음 내 집을 장만했지만,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 집값이 더 싼 정릉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정릉동은 목포 출신 문인인 박화성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박화성은 친누나와 친구라 가족처럼 지냈는데, 차범석이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사 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하였다.
정릉4동 266-10번지, 마당이 있는 단층 양옥이었다. 넓어진 집 마당에 문주란, 연산홍, 동백 같은 좋아하는 꽃을 한껏 심고, 자녀들의 혼인 같은 기념할 일이 생기면 단풍, 대추, 포도, 은행, 라일락 같은 나무를 한그루씩 심었다. 유럽에 다녀온 해에는 여행에서 본 사루비아 꽃이 인상에 남았다며 마당 가득 사루비아를 심기도 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5남매가 모두 혼인을 해서 살림을 나가고, 『차범석희곡집』중 절반인 4권이 쓰였다.
어느덧 목련 꽃봉오리가 눈에 띌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몇 해 전에 육백 원을 주고 두 그루를 사다 심은 목련이다. 올 봄에는 두 그루의 목련 나뭇가지에 힘겨웁도록 꽃이 피리라고 생각하니 지금부터 나는 흐뭇해지기만 한다. … 잔디가 제대로 자라고 나무 잎사귀가 제 형태를 갖추고 장미가 잽싸게 피어나는 오월이 되면 나는 정원에서 식사를 한다. 아침식사의 즐거움은 뜰에서 할때다. … 새들이 머리 위 라일락 가지에서 노래를 부른다. 멀리 북악산 등성이가 바라다 보이는 뜰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면 나는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 차범석, 「아침식사」-
서울로 올라와 십여 년 동안 다니던 방송국을 그만 둔 뒤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마당 쪽으로 창을 낸 서재에서 평소에 떠오르는 소재나 상황을 스케치 해 두었다가 생각을 정리해가며 글을 썼다. 집필 시간인 밤부터 새벽까지는 예민해져서 식구들은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할 만큼 조심을 했다.
글과 연극 밖에 모르던 그를 대신해 아이를 키우고 관공서에 가거나 집을 고치는 것까지 집 안팎일은 모두 아내 몫이었다. 차범석은 평생 휴대폰과 신용카드, 자동차 없이 살 정도로 무언가에 매이는 것도 꺼려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산 정릉 집은 연극 계통에 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와 봤다고 할 정도로 손님이 잦았고, 설날이면 세배객이 집을 가득 채웠다. 끼가 많았던 차범석은 흥이 오르면 동석한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풍류를 즐겼다. 관심 폭이 넓은 만큼 화가 이만익, 무용가 이매방, 영화감독 김수용, 민속학자 이두현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나주 출신인 아내는 겨울이 되면 장독에 홍어를 삭혀 손님맞이 음식으로 준비해두었고, 갑작스럽게 오는 손님이라도 언제나 반겨 맞이했다.
차범석이 극단 대표로 아버지 같았다면, 차범석의 아내는 연극 의상이나 소품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연극 연습 중이나 연극이 끝난 뒤 음식을 해가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극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대표, 연극계의 중책을 맡으면서 일에 관해서는 엄격하였다.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바른 말을 직설적으로 잘하여 차범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후배들이나 신인 배우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지금보다도 예술이나 창작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때 극단을 꾸리고 관객을 모으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연극을 보는 사람도 드문 상황이니 돈이 모일 리가 없었다. 가난한 사정을 아는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고, 극단 연습실도 구하기 힘들어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연습을 하였다. 온 힘을 모아 만든 연극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평소 도움을 받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빠뜨리지 않고 초대권을 보냈다. 그러나 관객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연극을 보지 않는 관객을‘짝사랑’하는 기분이었다.
같은 시대를 사는 관객과 호흡하며 시대를 반영하고 의미를 주는 연극을 하고자 차범석과 김유성, 오화섭, 임희재들은 1963년 극단‘산하’를 창단하였다. 창단 다음해부터 차범석이 대표를 맡아 극단 설립 취지처럼 현실을 담은 창작극을 발굴하여 공연하였다. 운영위원을 두어 배우와 연출가가 연극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고, 지방순회공연을 하며 관객과 만났다.
극단의 대표작은 차범석이 쓰고 연출한 <산불>(1966)이었다. 광주에서 1만 5천 명이나 되는 관객이 보러 올만큼 공연은 크게 성공하였다. 배우 이순재, 천선녀, 강부자 등이 활동하며 오학영, 윤대성, 최인훈 등의 창작극과 번역극을 선보였다. ‘산하’는 어려운 상황에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연극계를 이끌었지만, 연극이 본래 역할과 의미를 잃고 진정한 예술로 평가 받지 못하는 풍토에 20년만인 1983년 자진 해산한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애정으로 대하되 예리하게 파헤치는 일만이 작가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가려진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들추고 그래서 절망 아닌 힘을 부여하는 길이 작가의 책임이자 오늘의 연극이 나아갈 길이라고 믿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차범석에게 이 땅과 사람은 곧 연극이었다. 특히‘고향에서 내 육체가 태어난 것만이 아니라 고향이 나로 하여금 작품을 쓰도록 키워 주었고 그 속에서 영감과 신념과 긍지를 느끼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향은 떨어져 있지만 늘 같이 있는 곳이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밀주」, 대표작인「산불」,「 갈매기떼」,「 학이여 사랑일레라」등은 고향땅을 배경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가리켜 리얼리즘 희곡작가니 리얼리즘연극의 파수꾼이라고 불러주게 되었다. 사실상 나의 초기작품인 <밀주>, <귀향>, <산불>, <불모지> 등은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었고 <청기와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 <갈매기떼> <새야새야 파랑새야> 등은 사회적 비리나 정치적 부패를 파헤치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TV극 <전원일기>의 초기 1년간 집필도 같은 맥락이었다.
- 차범석,「 나의 삶 나의 생각」-
목포의 천석지기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때까지 방학이면 목포에서 40리 떨어진 중등포 간척지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농장에 놀러가 농촌의 생활과 정情에 푹 빠져 지냈다. ‘물가에서 울어대는 맹꽁이 소리, 모깃불에서 피어오르는 보랏빛 연기와 마른 풀 타는 내음, 별똥이 사라져가는 밤하늘 쳐다보며 부르는 노래, 밭에서 갓 따온 참외며 수박의 싱그러운 미각,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도깨비 얘기를 듣다가 그만 평상에서 잠이 들어버리는 ’추억이 깃든 농촌은‘ 맑고 향기롭고 구김 없는 꿈’을 꿀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었다. 후에「전원일기」극본을 부탁받 았을 때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도시 생활만 한 자신이 어떻게 농촌 드라마를 쓰느냐고 하였지만, 어린 시절 경험과 리얼리즘 연극을 해온 차범석은 누구보다 1980년대를 사는 농촌의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 전 국민이 생각하는‘어머니’상像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전원일기」의 김회장 아내(배우: 김혜자)의 모습은 평생 자신과 극단의 내조를 한 차범석 아내의 모습이기도 했다. 차범석은 동랑 유치진의 영향으로 극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유치진에 이어 우리나라 사실주의 연극의 맥을 이었다. 한국전쟁 때 고향으로 가는 19일 간의 피난길에서 죽음 앞에서는 상하 귀천도, 부자와 거지의 구분도 없음을 깨달았고, 20세기 격변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생생히 겪었다. 인간과 사회를 보는 매서운 눈과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그는 연극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자신의 신념을 주장할 줄 아는 연극인이었다. 때로는 풍자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 소외된 사람들과 우리가 처한 시대적 고뇌,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극을 만들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꿈하늘」, 「장미의 성」 등 리얼리즘 연극을 대표하는 작품을 남긴 차범석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작품을 계속 집필하였고, 50여 년간 소극장 연극운동 현장에 있던 경험을 담아 『한국소극장연극사』(2004)를 출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현대 연극이 자리 잡는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문화예술계의 어른으로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자세와 연극계의 앞날에 대해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평생 모은 책 3천 5백여 권과 연극 자료들을 고향에 있는 대학과 산울림 소극장에 기증하였고, 목포에서는 문학관을 지으며 늘 고향을 그리워한 차범석의 작품과 유품을 모아 전시하였다. 차범석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 박옥순이 유산을 정리한 돈을 연극인을 위해 내 놓아 ‘차범석연극재단’이 설립되었다. 아버지를 이어 연극의 길을 간 큰 딸 혜영이 이사장을 맡아 창작극을 지원하는‘차범석희곡상’을 만들고, 차범석의 연극정신을 이어 우리나라 연극계의 발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천성이 가무와 신명을 마다하지 않으니 이 또한 나의 숙명이리라’는 묘비명처럼 연극이 숙명이었던 연극인 차범석은 지금도 우리 연극계를 비추는 빛으로 남아있다.
차범석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46년 연희전문대학교 문과에 입학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 입선, ’56년 <귀향> 당선 등단
1961년 문화방송 연예과장, 이후 제작부장, 편성부국장
1963년 극단‘산하’창단
1965년 국제 P.E.N 클럽 중앙위원
1968년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7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1984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1999년 ‘차범석 연극제’(대구), 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취임, 한일문화인교류회 한국 대표
2006년 작고
대표작품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산불』, 『통곡의 땅』, 『학이여, 사랑이여』
TV극 <전원일기>, 오페라 <녹두장군>, <산불> 등
상훈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1981), 연극상(1983), 대한민국문학상(1991)
차범석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1946년 연희전문대학교 문과에 입학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 입선, ’56년 <귀향> 당선 등단
1961년 문화방송 연예과장, 이후 제작부장, 편성부국장
1963년 극단‘산하’창단
1965년 국제 P.E.N 클럽 중앙위원
1968년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7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1984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1999년 ‘차범석 연극제’(대구), 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취임, 한일문화인교류회 한국 대표
2006년 작고
대표작품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대리인』, 『산불』, 『통곡의 땅』, 『학이여, 사랑이여』
TV극 <전원일기>, 오페라 <녹두장군>, <산불> 등
상훈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1981), 연극상(1983), 대한민국문학상(1991)
극작가, 연극 연출가이다. 대학시절부터 이미 연극 극본 집필과 연출 활동을 하던 차범석은 1955년 《조선일보》에 신춘문예 「밀주」, 이듬해 「귀향」이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하였다. 대학극회 동인들과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제 극단인 ‘제작극회’를 조직한다. 이후 극단 ‘산하’를 만들고 대표작 <산불>을 전국으로 다니며 공연한다.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꿈하늘>, <장미의 성> 등 작품을 만들었다. 소극장 운동을 펼쳤고, 『한국소극장연극사』를 집필하였다. 서울에서 집을 옮겨 다니며 지내다 삼선동 21-1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팔고 정릉4동 266-10번지로 이사한다. 가족처럼 여기던 극단 사람들과 화가 이만익, 무용가 이매방 등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오갔다.
극작가, 연극 연출가이다. 대학시절부터 이미 연극 극본 집필과 연출 활동을 하던 차범석은 1955년 《조선일보》에 신춘문예 「밀주」, 이듬해 「귀향」이 당선되면서 정식 등단하였다. 대학극회 동인들과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제 극단인 ‘제작극회’를 조직한다. 이후 극단 ‘산하’를 만들고 대표작 <산불>을 전국으로 다니며 공연한다.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꿈하늘>, <장미의 성> 등 작품을 만들었다. 소극장 운동을 펼쳤고, 『한국소극장연극사』를 집필하였다. 서울에서 집을 옮겨 다니며 지내다 삼선동 21-1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팔고 정릉4동 266-10번지로 이사한다. 가족처럼 여기던 극단 사람들과 화가 이만익, 무용가 이매방 등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