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우리나라 화단을 이끄는 노수현, 장우성, 서세옥 등에게 가르침을 받고, 서세옥을 중심으로 결성된 ‘묵림회’와 동문들이 모여 만든 ‘한국화회’에 참여한다. 『새벗』, 『새소년』과 같은 아동지와 신문연재소설의 삽화, 문인들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나갔고, 국전이나 여러 미술제의 심사위원을 맡거나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완당선생 적거도」, 「사미승」, 「승무도」 등이 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성북동에 터를 잡았는데 돌과 매화를 아주 좋아한다는 뜻으로 집에 ‘매석취호(梅石醉豪)’라는 당호를 붙였다.
화가 우현 송영방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외아들을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곧 일어난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자 어린 아들이 걱정 되어 다시 고향에 있는 화수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 학교에서는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이 곧잘 뽑혀 교실 뒤 게시판에 걸려 있었다. 수원에서 열린 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고는 어린 마음에 화가가 무언지도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가 우현 송영방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외아들을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나 곧 일어난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자 어린 아들이 걱정 되어 다시 고향에 있는 화수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 학교에서는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이 곧잘 뽑혀 교실 뒤 게시판에 걸려 있었다. 수원에서 열린 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고는 어린 마음에 화가가 무언지도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잡지 『소년』에 이원수, 박화목 같은 아동문학가가 쓴 글의 삽화나 일본 책에 있는 정물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집안 아이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니, 서울에 사는 친척들이 올 때면 크레용, 도화연필을 사다줬다. 한학자인 아버지는 명절 때나 기제사를 지낼 때마다 아들에게 지방(紙榜)을 쓰게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글씨 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먹과 친해졌다.
어릴 때 잡지 『소년』에 이원수, 박화목 같은 아동문학가가 쓴 글의 삽화나 일본 책에 있는 정물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집안 아이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니, 서울에 사는 친척들이 올 때면 크레용, 도화연필을 사다줬다. 한학자인 아버지는 명절 때나 기제사를 지낼 때마다 아들에게 지방(紙榜)을 쓰게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글씨 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먹과 친해졌다.
서울 용산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 사촌형과 둘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부산 생활, 드럼통과 나무를 구해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미군부대에서 사온 잼을 넣고 만들어 판 호덕은 재료를 많이 쓴 탓에 장사는 됐지만 수익이 적었다. 부모님 품에서 벗어난 객지 생활은 힘들기만 했고, 얼마간을 피난지에서 보낸 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는 다시 용산중학교에 복학을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등록금과 용돈을 벌어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림 소질을 살려 용산중학교 동기 신동우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서울 용산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 사촌형과 둘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부산 생활, 드럼통과 나무를 구해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미군부대에서 사온 잼을 넣고 만들어 판 호덕은 재료를 많이 쓴 탓에 장사는 됐지만 수익이 적었다. 부모님 품에서 벗어난 객지 생활은 힘들기만 했고, 얼마간을 피난지에서 보낸 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9.28 서울 수복 이후에는 다시 용산중학교에 복학을 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등록금과 용돈을 벌어가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림 소질을 살려 용산중학교 동기 신동우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서양화와 동양화를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어린시절 아버지 옆에서 먹을 갈며 맡은 묵향이 코끝에 맴돌아서일까, 삼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갈림길에서 우현은 동양화를 선택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서양화와 동양화를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어린시절 아버지 옆에서 먹을 갈며 맡은 묵향이 코끝에 맴돌아서일까, 삼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는 갈림길에서 우현은 동양화를 선택한다.
단체전이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초대작가로 꾸준한 활동을 했지만,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졸업 후 한참만인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다. 이후 국내외에서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고, 국전이나 여러 미술제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이외에도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국대 컨벤션센터에 대규모 불화를 완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단체전이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초대작가로 꾸준한 활동을 했지만,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졸업 후 한참만인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다. 이후 국내외에서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고, 국전이나 여러 미술제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이외에도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국대 컨벤션센터에 대규모 불화를 완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연보
1936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경력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예술대 학장,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동아미술대전 심사위원 등
수상
제9회 국전 특선, 서울시 문화상, 문화예술상 미술상
전시
뉴델리 트리엔날레(인도, 1972), 대만역사박물관(1978), 아시아 현대미술전(일본, 1980), 초청한국현대미술 초대전(이태리, 1982), 국립현대미술관(1987, 1988), 현대화랑(1984, 1988, 2000), 예술의 전당(1997, 1999, 2000) 등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한국), 대영박물관 한국관(영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미국) 등
연보
1936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경력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예술대 학장,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동아미술대전 심사위원 등
수상
제9회 국전 특선, 서울시 문화상, 문화예술상 미술상
전시
뉴델리 트리엔날레(인도, 1972), 대만역사박물관(1978), 아시아 현대미술전(일본, 1980), 초청한국현대미술 초대전(이태리, 1982), 국립현대미술관(1987, 1988), 현대화랑(1984, 1988, 2000), 예술의 전당(1997, 1999, 2000) 등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한국), 대영박물관 한국관(영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미국) 등
경기도 화성 출생.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뿐만 아니라 불화와 삽화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보이는 화가이다. 서울대 동양화과의 묵림회와 한국화회 결성에 참여한다. 《새벗》, 《새소년》과 같은 아동지와 신문연재소설의 삽화, 법정스님과 시인 신경림 등 문인들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조지훈의 시를 그림으로 담은 <승무>가 잘 알려진 작품이다. 성북동 집은 1960년대 중반 터를 잡고 지은 집으로 돌과 매화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으로 ‘매석취호梅石醉豪’라는 당호를 붙였다. 젊은 시절부터 모은 수석과 석물이 마당에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경기도 화성 출생.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뿐만 아니라 불화와 삽화에 이르는 작품 세계를 보이는 화가이다. 서울대 동양화과의 묵림회와 한국화회 결성에 참여한다. 《새벗》, 《새소년》과 같은 아동지와 신문연재소설의 삽화, 법정스님과 시인 신경림 등 문인들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동국대 미술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조지훈의 시를 그림으로 담은 <승무>가 잘 알려진 작품이다. 성북동 집은 1960년대 중반 터를 잡고 지은 집으로 돌과 매화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으로 ‘매석취호梅石醉豪’라는 당호를 붙였다. 젊은 시절부터 모은 수석과 석물이 마당에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우현(牛玄) 송영방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대로 옮기기 보다는 한 번 마음 속에 품은 후 걸러내어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흉중구학’(胸中丘壑·마음속에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이 있다는 뜻)을 자신의 예술자세로 표현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비록 구상화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마음 속에서 그의 뜻과 감흥에 따라 한번 걸러진 ‘흉중구학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림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쓴다는 집안 어른들의 칭찬으로 제사 때마다 붓글씨로 지방을 쓴 덕분에 붓, 먹이 낯설지 않았던 우현은 자연스레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 산정 서세옥의 지도를 받았고 1961년 스승, 동료들과 함께 묵림회(墨林會)를 창립하는데 일조했고, 이후 ‘한국화회’에 참여하는 등 새로운 추상수묵을 동양화에 도입하려는 고민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를 포함해 불화와 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작가는 대학 때부터 학비를 벌어 고학했던 탓에 아동잡지와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 법정스님과 신경림 시인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조지훈의 시 ‘승무’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가장 잘 알려진 삽화이다.
1960년대 중반, 일찌감치 그가 성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로 스승인 산정 서세옥을 비롯해 이석 임송희, 노석 신영상, 백계 정탁영 등 여러 지인들이 성북동으로 들어왔다. 돌 모으는 취미로 맺어진 벗들과 사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우현은 돌과 매화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으로 당호를 ‘매석취호’로 정했다.
우현은 성북동에 살면서 법정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다양한 매체에 삽화를 그리던 시절이었는데, 법정스님이 전화를 해서 한 잡지의 표지가 마음에 드니 팔라는 것이었다. 출판사에서 간수를 잘 하지 못해 그림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한 장을 그려 선물해 법정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로 자신의 책에는 우현의 표지그림을 늘 넣었다.
우현은 “동양화의 전통을 이으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자기다움의 길을 찾아가라는 말을 깊이 새긴다”고 작품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잘 알려진 ‘승무’나 산수화, 많이 발표되지 않은 추상화에서도 드러나는 심상은 먹과 색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담담한 아름다움과 평안함이다. 작가의 느낌이 단숨에 드러나는 스케치나 추상화에도 꾸미지 않은 직관과 형태를 구하되 형태를 구하지 않는다는 동양화의 정신이 담겨있다.
1984년 이후 동국대 교수로 강단에 서서 퇴임 때까지 후학을 길러냈다.
우현(牛玄) 송영방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대로 옮기기 보다는 한 번 마음 속에 품은 후 걸러내어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흉중구학’(胸中丘壑·마음속에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이 있다는 뜻)을 자신의 예술자세로 표현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비록 구상화라고 하더라도 작가의 마음 속에서 그의 뜻과 감흥에 따라 한번 걸러진 ‘흉중구학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림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쓴다는 집안 어른들의 칭찬으로 제사 때마다 붓글씨로 지방을 쓴 덕분에 붓, 먹이 낯설지 않았던 우현은 자연스레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 산정 서세옥의 지도를 받았고 1961년 스승, 동료들과 함께 묵림회(墨林會)를 창립하는데 일조했고, 이후 ‘한국화회’에 참여하는 등 새로운 추상수묵을 동양화에 도입하려는 고민을 해왔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를 포함해 불화와 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작가는 대학 때부터 학비를 벌어 고학했던 탓에 아동잡지와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 법정스님과 신경림 시인의 책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조지훈의 시 ‘승무’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가장 잘 알려진 삽화이다.
1960년대 중반, 일찌감치 그가 성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로 스승인 산정 서세옥을 비롯해 이석 임송희, 노석 신영상, 백계 정탁영 등 여러 지인들이 성북동으로 들어왔다. 돌 모으는 취미로 맺어진 벗들과 사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우현은 돌과 매화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으로 당호를 ‘매석취호’로 정했다.
우현은 성북동에 살면서 법정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다양한 매체에 삽화를 그리던 시절이었는데, 법정스님이 전화를 해서 한 잡지의 표지가 마음에 드니 팔라는 것이었다. 출판사에서 간수를 잘 하지 못해 그림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한 장을 그려 선물해 법정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로 자신의 책에는 우현의 표지그림을 늘 넣었다.
우현은 “동양화의 전통을 이으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자기다움의 길을 찾아가라는 말을 깊이 새긴다”고 작품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잘 알려진 ‘승무’나 산수화, 많이 발표되지 않은 추상화에서도 드러나는 심상은 먹과 색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담담한 아름다움과 평안함이다. 작가의 느낌이 단숨에 드러나는 스케치나 추상화에도 꾸미지 않은 직관과 형태를 구하되 형태를 구하지 않는다는 동양화의 정신이 담겨있다.
1984년 이후 동국대 교수로 강단에 서서 퇴임 때까지 후학을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