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발생한 경성제사공장의 파업 사건이다. 9월 21일 숭인면 신설리(현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 있었던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일제 경찰과 회사 측은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파업참가자들을 체포했고 파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파업을 통해 당시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인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처지를 볼 수 있다. 1929년 기준 하루 임금이 일본인 남성노동자가 2.32원, 일본인 여성노동자가 1.01원, 조선인 남성노동자가 1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0.59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확산된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도 있었는데, 이효정, 이병희, 허마리아 등이 주도한 당시의 파업에 이재유 등의 사회주의자도 연계되어 있었다.
1933년 9월 21일 오전 8시 동대문 밖 신설리 종연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에 삼엄한 분위기가 돌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500명이 총파업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총파업 소식에 동대문경찰서에서는 경관을 급파하고 주모자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 5~6명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파업을 단행하려는 여성 노동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관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제 경찰이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에 신속하게 대응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33년 9월 19일 숭인면 신설리에 있었던 서울고무회사 공장 여성노동자 120명이 무리한 작업환경 개선을 내세우며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경찰은 비슷한 시기 인접 공장에서 연달아 파업을 단행한 것을 심상치 않게 느꼈던 것이다. 신설리 일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은 일제 경찰에게 위협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동대문 밖 신설리 부근에 공장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였다. 전차역과 철도가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동대문 외곽 지역에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공장 가운데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고무공장과 종연방적 제사공장은 신설리에 세워졌다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공장 모두 여성노동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공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비중은 1920년대부터 급격하게 늘어났다. 1920년 이전 거의 없었던 공업 분야의 여성노동자들은 1920년 1만여 명을 돌파한 것을 기점으로 1940년에는 8만여 명까지 늘어났다. 여성 노동자의 증가율은 같은 기간 남성 노동자 증가율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공업 중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는 섬유공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사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920년대 초부터 제사 분야에서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85~90%에 이르렀는데, 이는 식민지배가 끝나는 1940년대까지 유지됐다. 그 정도로 제사 분야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고무공업 역시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였다. 전반적으로 화학공업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지 않았지만 고무 분야는 여성노동자의 비율이60~70%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고무 분야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제사와 고무 분야는 여성노동자들의 비중이 높았던 만큼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분야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성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본가들은 많은 이윤을 얻어내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속적으로 인하했다. 반면 노동시간은 하루 10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는 물론 조선인 남성노동자들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1929년 기준 하루에 일본인 남성노동자가 2.32원, 일본인 여성노동자가 1.01원, 조선인 남성노동자가 1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0.59원에 불과했다. 조선인 남성노동자 임금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밖에 받지못했던 것이다. 반면 노동시간에 있어선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조선에 있었던 공장들 가운데 가장 긴 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던 분야가 방직이었는데 방직 노동자의 82%가 12시간 이상 노동을 했다. 특히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긴 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인격모독, 남성 감독들의 성추행 등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이’ 공장에 나가는 것이 싫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부당한 현실에 눈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부당한 노동환경에 문제를 제기했고, 바로잡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920년대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여성노동자들의 움직임은 1930년대 들어서면 더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을밀대에 올라 처절한 노동자들의 실태를 고발하고 임금을 인하하려는 자본가 측의 의도를 비판했던 평양 고무 공장의 여성노동자였던 강주룡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었던 1930년대의 흐름 속에서 신설리 공장의 여성노동자들 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당시 서울고무공장 파업은 허마리아를 중심으로 지순이, 맹계임 등이 주도했고,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은 이병희와 이효정, 이순금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이병희와 이효정을 들 수 있다.
(중략)
1933년 신설리 지역 공장에서 일어난 파업에는 이효정과 이병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 파업에는 여성노동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만 배후에서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재유와 이현상이었다. 당시 이재유와 이현상은 소위 경성 트로이카를 구성하며 서울을 중심으로 혁명적 노조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서울의 공장지대를 중요한 운동 거점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신설리 지역 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고무회사 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은 경성 트로이카 그룹의 멤버였으며,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이병희, 이효정, 이순금 등도 경성 트로이카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1933년 신설리 지역 공장의 파업은 여성노동자들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1933년 9월 21일 오전 8시 동대문 밖 신설리 종연방직회사 경성제사공장京城製絲工場에 삼엄한 분위기가 돌았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500명이 총파업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총파업 소식에 동대문경찰서에서는 경관을 급파하고 주모자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 5~6명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파업을 단행하려는 여성 노동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관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제 경찰이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에 신속하게 대응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33년 9월 19일 숭인면 신설리에 있었던 서울고무회사 공장 여성노동자 120명이 무리한 작업환경 개선을 내세우며 파업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경찰은 비슷한 시기 인접 공장에서 연달아 파업을 단행한 것을 심상치 않게 느꼈던 것이다. 신설리 일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은 일제 경찰에게 위협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동대문 밖 신설리 부근에 공장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였다. 전차역과 철도가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동대문 외곽 지역에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공장 가운데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고무공장과 종연방적 제사공장은 신설리에 세워졌다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공장 모두 여성노동자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공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비중은 1920년대부터 급격하게 늘어났다. 1920년 이전 거의 없었던 공업 분야의 여성노동자들은 1920년 1만여 명을 돌파한 것을 기점으로 1940년에는 8만여 명까지 늘어났다. 여성 노동자의 증가율은 같은 기간 남성 노동자 증가율보다 더 높은 것이었다. 공업 중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는 섬유공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사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1920년대 초부터 제사 분야에서 여성 노동자의 비율은 85~90%에 이르렀는데, 이는 식민지배가 끝나는 1940년대까지 유지됐다. 그 정도로 제사 분야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고무공업 역시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였다. 전반적으로 화학공업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지 않았지만 고무 분야는 여성노동자의 비율이60~70%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고무 분야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제사와 고무 분야는 여성노동자들의 비중이 높았던 만큼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분야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여성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본가들은 많은 이윤을 얻어내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속적으로 인하했다. 반면 노동시간은 하루 10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는 물론 조선인 남성노동자들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1929년 기준 하루에 일본인 남성노동자가 2.32원, 일본인 여성노동자가 1.01원, 조선인 남성노동자가 1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0.59원에 불과했다. 조선인 남성노동자 임금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밖에 받지못했던 것이다. 반면 노동시간에 있어선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조선에 있었던 공장들 가운데 가장 긴 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던 분야가 방직이었는데 방직 노동자의 82%가 12시간 이상 노동을 했다. 특히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긴 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인격모독, 남성 감독들의 성추행 등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이’ 공장에 나가는 것이 싫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이 부당한 현실에 눈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부당한 노동환경에 문제를 제기했고, 바로잡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920년대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여성노동자들의 움직임은 1930년대 들어서면 더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을밀대에 올라 처절한 노동자들의 실태를 고발하고 임금을 인하하려는 자본가 측의 의도를 비판했던 평양 고무 공장의 여성노동자였던 강주룡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었던 1930년대의 흐름 속에서 신설리 공장의 여성노동자들 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당시 서울고무공장 파업은 허마리아를 중심으로 지순이, 맹계임 등이 주도했고,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은 이병희와 이효정, 이순금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이병희와 이효정을 들 수 있다.
(중략)
1933년 신설리 지역 공장에서 일어난 파업에는 이효정과 이병희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 파업에는 여성노동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만 배후에서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재유와 이현상이었다. 당시 이재유와 이현상은 소위 경성 트로이카를 구성하며 서울을 중심으로 혁명적 노조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서울의 공장지대를 중요한 운동 거점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신설리 지역 공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고무회사 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허마리아, 지순이, 맹계임 등은 경성 트로이카 그룹의 멤버였으며, 종연방직 경성제사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이병희, 이효정, 이순금 등도 경성 트로이카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1933년 신설리 지역 공장의 파업은 여성노동자들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파업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1933년 9월 19일 서울고무회사 공장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회사 측은 전면 휴업으로 대응했다. 또한 일제 경찰은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주모자로 지순이, 엄익, 맹계순 외 6명을 지목하고 곧바로 인치했다. 회사 측과 일제 경찰은 파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여성노동자들에게 쉽게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이후 파업의 양상은 신문 지상에 상세하게 보도되진 않았다. 다만 쌍방타협으로 1933년 9월 22일부터 작업을 재개한다는 보도가 있는것으로 보아 9월 21일 무렵에는 파업이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타협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과정을 살펴보자. 1933년 9월 21일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회사 측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파업에 나선 500명의 노동자들 모두 해고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경찰 역시 여성노동자 5명을 체포하며 파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회사 측과 경찰의 대응에도 여성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성제사공장 여성노동자 56명은 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여성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회사 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계속 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여성노동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회사 측은 1933년 9월 23일 직공모집 광고를 붙이고 24일까지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두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회사 측은 엄포에 놀란 노동자 대부분이 다시 출근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 측의 예상과 달리 여성노동자들은 강경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에 회사 측은 새로운 방법을 구사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다. 회사 측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복업을 요구하는 한편 남성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노동자들은 따로 여성노동자들을 모으고 회사 측에서 요구 조건을 승인했으니 작업장으로 복귀하라고 말했다. 남성노동자들의 말을 믿은 일부 여성노동자들은 다시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 측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복귀하자 회사 측은 요구 조건 승인을 말한 것은 남성노동자들이 자의적으로 말한 것일 뿐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기 시작했다. 파업의 힘이 약해지자 자신들의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에 아직 복업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은 임금 증액, 대우개선 등 13개 조건을 제출하고 다시 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남성노동자들의 배신으로 깨어진 단결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파업을 주도했던 이병희, 이효정, 허마리아 등의 여성노동자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또한 배후로 지목된 이재유 역시 신설동에 마련했던 아지트에서 탈출해 이곳저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34년 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서 신설리 지역에서 발생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은 안타깝게 실패로 일단락되었다.
그렇다면 파업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1933년 9월 19일 서울고무회사 공장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회사 측은 전면 휴업으로 대응했다. 또한 일제 경찰은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주모자로 지순이, 엄익, 맹계순 외 6명을 지목하고 곧바로 인치했다. 회사 측과 일제 경찰은 파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여성노동자들에게 쉽게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이후 파업의 양상은 신문 지상에 상세하게 보도되진 않았다. 다만 쌍방타협으로 1933년 9월 22일부터 작업을 재개한다는 보도가 있는것으로 보아 9월 21일 무렵에는 파업이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타협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파업 과정을 살펴보자. 1933년 9월 21일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회사 측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의 외출을 금지하고 파업에 나선 500명의 노동자들 모두 해고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경찰 역시 여성노동자 5명을 체포하며 파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회사 측과 경찰의 대응에도 여성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성제사공장 여성노동자 56명은 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여성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회사 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계속 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여성노동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회사 측은 1933년 9월 23일 직공모집 광고를 붙이고 24일까지 출근하지 않는 노동자는 모두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회사 측은 엄포에 놀란 노동자 대부분이 다시 출근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 측의 예상과 달리 여성노동자들은 강경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에 회사 측은 새로운 방법을 구사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것이다. 회사 측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복업을 요구하는 한편 남성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노동자들은 따로 여성노동자들을 모으고 회사 측에서 요구 조건을 승인했으니 작업장으로 복귀하라고 말했다. 남성노동자들의 말을 믿은 일부 여성노동자들은 다시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 측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이 복귀하자 회사 측은 요구 조건 승인을 말한 것은 남성노동자들이 자의적으로 말한 것일 뿐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기 시작했다. 파업의 힘이 약해지자 자신들의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에 아직 복업하지 않았던 여성노동자들은 임금 증액, 대우개선 등 13개 조건을 제출하고 다시 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남성노동자들의 배신으로 깨어진 단결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파업을 주도했던 이병희, 이효정, 허마리아 등의 여성노동자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또한 배후로 지목된 이재유 역시 신설동에 마련했던 아지트에서 탈출해 이곳저곳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34년 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서 신설리 지역에서 발생했던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은 안타깝게 실패로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