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자연환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 봄을 맞이하기 위해 산이나 계곡을 유람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중 성북동의 복숭아꽃이 손꼽혔다고 한다. 복숭아꽃뿐만 아니라 앵두꽃과 자두꽃이 화려하게 피어, 봄마다 성북동 골짜기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성북동은 문학작품에서는 ‘시골’로 표현되었다. 화려한 별장들을 제외하고 백성들이 마전을 하고 메주를 쑤며 생활을 하던 성북동은 시골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성북동에는 자연환경을 흠모하여 이사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북동을 가로지르는 성북천과 마을을 둘러싼 산림은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풍치를 유지하거나 보호하기 위해 풍치지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북저동의 복사꽃을 보고 아름다운 산세와 골짜기의 계곡들을 노래했던 것처럼 성북동은 근대 문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당시 내로라하는 한국의 문인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수려한 산세를 품은 성북동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달밤> 이태준
성북동 수연산방에 거주하면서 한국 대표 문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성북동을 ‘시골’이라 표현했다. 화려한 별장들을 제외하고 백성들이 마전을 하고 메주를 쑤며 생활을 하던 성북동은 정말 시골 그 자체였다. 이태준이 ‘황수건’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느낀 성북동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닮은 민초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성북동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4대문 안으로만 조성되어 있던 도시 구조를 도성 밖으로 넓히면서 도성 밖 지역에 이주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택지조성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성북동은 기존에 있던 초가집들을 허물고 개화된 ‘조선집’들이 들어섰다.
성북동에도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원주민 보다 이사 온 외지인의 수가 많아졌는데,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성북동에는 자연풍경을 흠모하여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북저동의 복사꽃을 보고 아름다운 산세와 골짜기의 계곡들을 노래했던 것처럼 성북동은 근대 문인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작은 집’이라는 뜻의 수연산방은 당시 내로라하는 한국의 문인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수려한 산세를 품은 성북동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주었다.’
<달밤> 이태준
성북동 수연산방에 거주하면서 한국 대표 문인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이태준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성북동을 ‘시골’이라 표현했다. 화려한 별장들을 제외하고 백성들이 마전을 하고 메주를 쑤며 생활을 하던 성북동은 정말 시골 그 자체였다. 이태준이 ‘황수건’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느낀 성북동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닮은 민초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성북동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4대문 안으로만 조성되어 있던 도시 구조를 도성 밖으로 넓히면서 도성 밖 지역에 이주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택지조성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성북동은 기존에 있던 초가집들을 허물고 개화된 ‘조선집’들이 들어섰다.
성북동에도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였다. 어느새 원주민 보다 이사 온 외지인의 수가 많아졌는데,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성북동에는 자연풍경을 흠모하여 이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삼각산(북악)이 두활개를 쩍 벌린듯한 동쪽 활개에 해당한 소지맥이 먼 안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흠절이라면 흠절이지마는 그 지맥 구릉과 이편 성벽이 서있는 구릉 사이에 삼태기 밑바탕처럼 옴쑥히 들어박힌 평지가 성북 마전터의 조그마한 초평이다. 그 초평의 가운데를 맑은 물이 구비쳐 흘러내려가서 삼선평 일대의 습지를 만들어 준다. … 마전터 초평에는 마전하여 길게 펼쳐 말리고 있는 포목이 수없이 흰줄을 그리어 있으며 그 은저리로 왔다갔다 하는 남녀 빨랫군이 조그만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었다.
윤백남, 「야화」, 1952
삼각산(북악)이 두활개를 쩍 벌린듯한 동쪽 활개에 해당한 소지맥이 먼 안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흠절이라면 흠절이지마는 그 지맥 구릉과 이편 성벽이 서있는 구릉 사이에 삼태기 밑바탕처럼 옴쑥히 들어박힌 평지가 성북 마전터의 조그마한 초평이다. 그 초평의 가운데를 맑은 물이 구비쳐 흘러내려가서 삼선평 일대의 습지를 만들어 준다. … 마전터 초평에는 마전하여 길게 펼쳐 말리고 있는 포목이 수없이 흰줄을 그리어 있으며 그 은저리로 왔다갔다 하는 남녀 빨랫군이 조그만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이었다.
윤백남, 「야화」, 1952
앵두꽃과 자두꽃도 복숭아꽃에 지지 않고 화려하게 피었으니, 봄마다 성북동은 신선들도 찾아올만한 풍경이었다. 어느 것이 복숭아 꽃잎이 고 어느 것이 화류객의 도포자락이고, 또 어느 것이 여인들의 치맛자락인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성북동 골짜기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 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에 취한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는 당시의 감회를 시구로 남겼다.
앵두꽃과 자두꽃도 복숭아꽃에 지지 않고 화려하게 피었으니, 봄마다 성북동은 신선들도 찾아올만한 풍경이었다. 어느 것이 복숭아 꽃잎이 고 어느 것이 화류객의 도포자락이고, 또 어느 것이 여인들의 치맛자락인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성북동 골짜기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 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에 취한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 1786-1856는 당시의 감회를 시구로 남겼다.
○ 샌드위치피크닉 장소
“처마 저쪽엔 앵두나무가 몇 그루 있는가 하면 진달래 나무의 곷매듭과 복사나무의 꽃매듭은 그만 봉우리가 피려는 듯이 볼록볼록하고 있다. … 이리하여 성북동엔 꿀벌도 모이고 나비는 날고 노고지리 운작은 잔디밭 위 상공에서 한껏 울고 노래를 부를 때가 온 것이다. … 그러나 벌써 ‘샌드위치피크닉’이 시작된다. 일본 여자의 능청거리는 걸음과 그녀 옆에 병정 같은 사나이의 두 볼엔 샌드위치를 미어질 듯이 씹는다.”
○ 샌드위치피크닉 장소
“처마 저쪽엔 앵두나무가 몇 그루 있는가 하면 진달래 나무의 곷매듭과 복사나무의 꽃매듭은 그만 봉우리가 피려는 듯이 볼록볼록하고 있다. … 이리하여 성북동엔 꿀벌도 모이고 나비는 날고 노고지리 운작은 잔디밭 위 상공에서 한껏 울고 노래를 부를 때가 온 것이다. … 그러나 벌써 ‘샌드위치피크닉’이 시작된다. 일본 여자의 능청거리는 걸음과 그녀 옆에 병정 같은 사나이의 두 볼엔 샌드위치를 미어질 듯이 씹는다.”
○ 고요한 산, 태고의 산
“산이 고요해서 太古와 같아!”란 말은 성북동을 두고 이름이 아닐른지.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저녁밥을 먹으면 산상 와서 이 세상에 둘도없이 가장 친한 벗과 오붓이 밥 사먹는 느낌이 난다. 그 고요함. 그 어둠. 그 바람. 그 정취. … 그믐밤이 되면 절벽과 같이 깜깜하고 그와 반대로 달밤이 되면 塵世가 아니라는 듯이 皎皎하다. 멀리 개짓는 소리만이 들린다할까. 성북동은 그렇다. … 봄이 행진하면 할수록 성북동은 천재를 발휘하리라. 자신은 분장한 교태를 자랑하리라. 그러고 한없는 예찬과 끝없는 감탄을 받으리라.
○ 고요한 산, 태고의 산
“산이 고요해서 太古와 같아!”란 말은 성북동을 두고 이름이 아닐른지.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저녁밥을 먹으면 산상 와서 이 세상에 둘도없이 가장 친한 벗과 오붓이 밥 사먹는 느낌이 난다. 그 고요함. 그 어둠. 그 바람. 그 정취. … 그믐밤이 되면 절벽과 같이 깜깜하고 그와 반대로 달밤이 되면 塵世가 아니라는 듯이 皎皎하다. 멀리 개짓는 소리만이 들린다할까. 성북동은 그렇다. … 봄이 행진하면 할수록 성북동은 천재를 발휘하리라. 자신은 분장한 교태를 자랑하리라. 그러고 한없는 예찬과 끝없는 감탄을 받으리라.
○ 일제강점기에도 변하지 않은 성북동의 경관요소
1. 성북동 가로지르는 성북천과 마을을 둘러싼 산림(풍치지구 지정)
2. 전차나 버스가 삼선교를 거쳐가므로 성북동 내의 주요 교통수단은 ‘도보’가 유일
3. 마전터는 그대로 유지되며 주변에 전문 세탁, 표백 공장이 생기며 평창동, 삼청동 지역의 세탁업자와 조합 결성으로까지 나아감 → 마을 자치 활동, 삼산학교, 성북유치원의 설립 재원
○ 일제강점기에도 변하지 않은 성북동의 경관요소
1. 성북동 가로지르는 성북천과 마을을 둘러싼 산림(풍치지구 지정)
2. 전차나 버스가 삼선교를 거쳐가므로 성북동 내의 주요 교통수단은 ‘도보’가 유일
3. 마전터는 그대로 유지되며 주변에 전문 세탁, 표백 공장이 생기며 평창동, 삼청동 지역의 세탁업자와 조합 결성으로까지 나아감 → 마을 자치 활동, 삼산학교, 성북유치원의 설립 재원
성북2동 할머니경로당에서의 한 할머니 말씀이다.
“이곳 주변은 모두 판자촌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 갔다 온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했다. 없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이곳 꼭대기 마을이다. 돈이 없어서 내려가서 살지 못한다. 연탄까지 지고 나르느라고 힘들었다. 지금은 양반 된 것이다. 마을버스가 어디 있었던가! 지금도 시골처럼 먹을 것도 나눠먹고 인심이 좋다.”
성북동의 맑은 물과 계곡이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도로가 나 있는 것이 생활에는 편리하지만 정취도, 추억도 사라진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 와서 다시 개천을 복원한다고 하니 사람들의 변덕이 심하다고 해야 할까,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보아야 할까?
성북동은 조선시대에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한경지략」(1834)의 명승조에는 성북동에 대하여,
“북사동(北寺洞: 성북동의 또 다른 이름)은 혜화문 밖에 있다. 옛날 묵사(墨寺)가 있었으므로 묵사동이라고도 하고 또 어영청의 북쪽 창고가 있어 북둔(北屯)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냇물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 매년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의 수레와 말들이 골짜기를 메운다. 깨끗한 초가들이 많다.”고 하였다.
성북2동 할머니경로당에서의 한 할머니 말씀이다.
“이곳 주변은 모두 판자촌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 갔다 온 사람들이 여기에 정착했다. 없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이곳 꼭대기 마을이다. 돈이 없어서 내려가서 살지 못한다. 연탄까지 지고 나르느라고 힘들었다. 지금은 양반 된 것이다. 마을버스가 어디 있었던가! 지금도 시골처럼 먹을 것도 나눠먹고 인심이 좋다.”
성북동의 맑은 물과 계곡이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도로가 나 있는 것이 생활에는 편리하지만 정취도, 추억도 사라진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 와서 다시 개천을 복원한다고 하니 사람들의 변덕이 심하다고 해야 할까,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보아야 할까?
성북동은 조선시대에도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한경지략」(1834)의 명승조에는 성북동에 대하여,
“북사동(北寺洞: 성북동의 또 다른 이름)은 혜화문 밖에 있다. 옛날 묵사(墨寺)가 있었으므로 묵사동이라고도 하고 또 어영청의 북쪽 창고가 있어 북둔(北屯)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냇물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복숭아를 심어 생업을 삼고 있다. 매년 봄이면 놀이를 나온 사람들의 수레와 말들이 골짜기를 메운다. 깨끗한 초가들이 많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