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경자(65학번)가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을 회고한 수필이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뒤 미아리고개를 혼자 찾아 나선 강원도 양양 출신 열아홉 살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김동리 선생의 소설 창작 강의, 오정희와의 첫 만남, 황석영을 사칭한 남학생에게 이끌려 서울역 일대를 누비던 기억까지 1960년대 서라벌예술대학의 생생한 풍경을 담고 있다.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선 미아리 산동네의 학교, 담배 연기 자욱한 역전다방, 보문동 거리를 오가던 선후배들의 모습은 당시 성북 변두리를 무대로 형성된 문학 청년들의 생활세계를 증언한다.
부끄럽지만, 아름다웠던 시절
이경자(65학번, 소설가)
대학입시 1차에 떨어져서 생사도 구별하지 못하게 마음이 얼어 버린 때, 강릉고 출신의 남학생 정종명이 서라벌예술대학에 가 보라고 말해 줬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학교가 있다고 그랬다. 미아리고개라면 ‘단장의 미아리고개’일 테니 찾기도 쉬울 것이라 여겨 혼자 그곳을 찾아갔다. 아무리 오르고 내려도 험한 고개는 나오지 않았다. 강원도 산골 출신의 내게 4차선으로 뚫어 놓은 포장길이 고개로 보였을 리 만무.
그래도 운이 좋아 합격해서, 중학교 때부터 가출 및 탈출하고 싶었던 고향 땅 양양으로 돌아가지 않게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김동리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소설 창작만 열심히 듣고 다른 공부는 하지 않았다. 첫 학기에는 강의실이 비좁도록 학생들이 들이찼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열아홉 살 소설가 지망생이던 나는 소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토하듯이 소설을 써 댔다. 소설을 써서 시간 중에 읽힌다는 것만으로 소설을 잘 쓰는 편에 속했다.
어느 날 내 뒤에 앉았던 서울 출신의 여학생이 등을 툭 치더니 쪽지를 줬다. ‘경자 씨. 중국집에 가면 꼭 문을 조금 열어 놓고 먹어야 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화여고 출신의 오정희가 소설을 잘 썼다. 수업 중에 발표한 소설에 홀랑 반했다.
키가 작고 다부진 남학생이 기억난다. 잊지 못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용산고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소설을 잘 쓰려면 사회의 밑바닥을 알아야 한다며 나를 서울역으로 데려갔다. 지금의 대우빌딩 근처이니 유명한 사창가였던 ‘양동’의 입구쯤이었던 것 같다. 그는 기차같이 생긴 다방으로 데려갔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말소리가 천장까지 두텁게 쌓인 그곳은 아마 역전다방이란 이름이 붙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황석영’이라고 했다. 사춘기 때 『사상계』에서 읽고 「입석부근」을 쓴 그 황석영이라는 것이었다. 황석영이든 아니든 나는 그가 소설가라는 데 홀랑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게 소설을 잘 쓰려면 어쩌고저쩌고 사회의 밑바닥과 군중의 생활을 알아야 한다, 등등의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누군가를 소개도 해 줬다. 어떤 남자였던 것 같다.
그는 서울역으로 가서 구두닦이도 인사시키고 그랬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뒤에 등단을 하고 황석영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그 사람, 키가 작고 다부지고 얼굴색이 검은 편이던 그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일종의 저능아나 지진아 군에 속하는 편이다. 세장물정을 잘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랑 이야기를 해 보거나 살아 보면 내 의식이 좋으면 순수, 나쁘면 천치라는 걸 금방 깨닫는다. 이런 사람이라서 열아홉 살 그 나이에도 김동리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시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런 충격의 유사한 것이 또 있었다. 버스를 타고 보문동을 지나는데 허리가 조금 구부정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이동하 선배님! 왜 소설가가 되었는데도 저렇게 기운 없이 걸어가지? 내 현실감각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허공에 떠 있다.
출처: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2013, 14~15쪽.
출처: 김주영·이근배·오정희 외, 『문학이라 쓰고 인생이라 읽다』, 작가세계, 2013, 14~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