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성북로 168(성북동 274-1)에 있었던 옛집의 이름이다. 화가이자 수필가였던 김용준(1904~1967, 호는 근원)이 1933년 무렵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인데, 오래된 감나무가 있어서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김용준의 수필에 따르면 감나무가 많아 온 집안에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1944년 김용준은 화가였던 김환기(1913~1974, 호는 수화)에게 집을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당시 막 결혼했던 김환기는 자신의 호인 수화 중 ‘수’자와 부인 김향안의 ‘향’자를 따서 수향산방으로 불렀고, 194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노시산방은 근대 한국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의 숨결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성북동 32-2번지 노시산방. 결혼 후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기를 꺼려하는 아내를 끊임없이 설득해 이사 했다고 한다.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다. 그 개울물은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 김용준, 열화당
성북동 32-2번지 노시산방. 결혼 후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기를 꺼려하는 아내를 끊임없이 설득해 이사 했다고 한다.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다. 그 개울물은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중 한 구절이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의 조그만 한옥이다.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그 모습 또한 아주 일품이었다고 한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중 한 구절이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의 조그만 한옥이다.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그 모습 또한 아주 일품이었다고 한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푸른 이끼가 낀 늙은 감나무)산방이라 한 것은 3, 4년 전에 이 군(상허 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80년은 묵은 성 싶은 늙은 감나무 2, 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 지라 이 군이 일러 노시사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기에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중략)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노옥을 노시산방이라 불러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 <근원수필>, 노시산방기, 김용준
석양이 내 정원에 비낄 때면 피로한 신경을 이끌고 발길이 문을 나선다. 석교를 건너서면 들국화 가냘프게 피어 늘어진 조붓한 길이 청룡암으로 향한다. 나는 내 산보의 유일한 동반자로 밤마다 도적을 보살피는 종군을 앞세운다. 성북동의 산보로 달밤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드시 겨울 달밤이어야 한다. 나는 가끔 찬 달밤별들을 헤아리며 등불이 묵묵히 박힌 산 밑 길을 묵묵히 거닐기도 한다.
- <겨울 달밤 성북동>, 김용준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푸른 이끼가 낀 늙은 감나무)산방이라 한 것은 3, 4년 전에 이 군(상허 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80년은 묵은 성 싶은 늙은 감나무 2, 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 지라 이 군이 일러 노시사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기에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중략)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노옥을 노시산방이라 불러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 <근원수필>, 노시산방기, 김용준
석양이 내 정원에 비낄 때면 피로한 신경을 이끌고 발길이 문을 나선다. 석교를 건너서면 들국화 가냘프게 피어 늘어진 조붓한 길이 청룡암으로 향한다. 나는 내 산보의 유일한 동반자로 밤마다 도적을 보살피는 종군을 앞세운다. 성북동의 산보로 달밤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드시 겨울 달밤이어야 한다. 나는 가끔 찬 달밤별들을 헤아리며 등불이 묵묵히 박힌 산 밑 길을 묵묵히 거닐기도 한다.
- <겨울 달밤 성북동>, 김용준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만큼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었다.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에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이 꽃을 피웠고 여름엔 파초가 커다란 잎을 펼쳤다. 운치 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가 무성했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나무가 있었다. 김용준이 살았던 노시산방의 옛 모습이다. 성북동의 풍수에 딱 알맞은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만큼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었다.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에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이 꽃을 피웠고 여름엔 파초가 커다란 잎을 펼쳤다. 운치 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가 무성했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나무가 있었다. 김용준이 살았던 노시산방의 옛 모습이다. 성북동의 풍수에 딱 알맞은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2. 노시산방의 두 예술가-근원 김용준 수화 김환기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의 인연은 고즈넉한 성북동에 깃들어 있다. 그 중 노시산방老枾山房은 근원과 수화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살았던 곳으로 두 예술가를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발원지다. 지금은 무심히 시간이 흘러 표석조차 없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늙은 감나무는 그 시절을 사색하듯 그곳을 지키고 있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老枾舎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중략)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을 노시산방이라 불러 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김용준, 「노시산방기」중에서
그의 수필 「노시산방기」로 미루어 근원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1934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수화에게 집을 물려준 것이 1944년 즈음이니 근원은 그의 삼십 대를 온전히 노시산방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가 1931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미술사학자로서 그 입지를 구축해 가던 시절이다. 길진섭과 함께 1939년에 창간된 문학잡지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1936년부터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舎와 백귀제白鬼祭」 등의 작품을 시작으로 꾸준히 수필을 발표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딸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시기이다. 근원 김용준이 노시산방에 머문 시절은 비유하자면 그의 수필과도 같이 순수하고 담백하여 그 인생 전체에 있어 자양분이 되어주는 삶의 한 장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수화 김환기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것은 1944년 김향안과 결혼식을 올린 직후이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에서
노시산방은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매듭으로서 새로운 주인장의 신혼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주면서 그 이름을 수화의 수樹 자와 김향안의 향鄕 자를 따서 ‘수향산방’이라 부르고 〈수향산방 전경〉이란 그림으로 남겼다. 그 그림 속에는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가 오랜 감나무 아래 정겹게 마주 하고 있다. 비록 수화가 그곳에 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근원과 수화를 묶어주는 근원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나며 하나의 수필을 남겼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예술가로서 소통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는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과 수화의 삶이 깃든 노시산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한국의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노시산방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가 당면한 문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 노시산방의 두 예술가-근원 김용준 수화 김환기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의 인연은 고즈넉한 성북동에 깃들어 있다. 그 중 노시산방老枾山房은 근원과 수화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살았던 곳으로 두 예술가를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발원지다. 지금은 무심히 시간이 흘러 표석조차 없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늙은 감나무는 그 시절을 사색하듯 그곳을 지키고 있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老枾舎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중략)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을 노시산방이라 불러 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김용준, 「노시산방기」중에서
그의 수필 「노시산방기」로 미루어 근원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1934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수화에게 집을 물려준 것이 1944년 즈음이니 근원은 그의 삼십 대를 온전히 노시산방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가 1931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미술사학자로서 그 입지를 구축해 가던 시절이다. 길진섭과 함께 1939년에 창간된 문학잡지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1936년부터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舎와 백귀제白鬼祭」 등의 작품을 시작으로 꾸준히 수필을 발표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딸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시기이다. 근원 김용준이 노시산방에 머문 시절은 비유하자면 그의 수필과도 같이 순수하고 담백하여 그 인생 전체에 있어 자양분이 되어주는 삶의 한 장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수화 김환기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것은 1944년 김향안과 결혼식을 올린 직후이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에서
노시산방은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매듭으로서 새로운 주인장의 신혼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주면서 그 이름을 수화의 수樹 자와 김향안의 향鄕 자를 따서 ‘수향산방’이라 부르고 〈수향산방 전경〉이란 그림으로 남겼다. 그 그림 속에는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가 오랜 감나무 아래 정겹게 마주 하고 있다. 비록 수화가 그곳에 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근원과 수화를 묶어주는 근원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나며 하나의 수필을 남겼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예술가로서 소통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는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과 수화의 삶이 깃든 노시산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한국의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노시산방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가 당면한 문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김환기에게 성북동은 각별한 곳이었다.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살다가 가족들의 불편함 때문에 종로구 원서동 양옥으로 잠시 이사하기도 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게 된다. 1956년 김환기는 파리로 떠나고 가족들은 1960년대까지 그 집에 살게 된다. 현재 ‘노시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성북로 168) 수월암 부근이며 김환기의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선잠로 56)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옛 번지와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김환기에게 성북동은 각별한 곳이었다.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살다가 가족들의 불편함 때문에 종로구 원서동 양옥으로 잠시 이사하기도 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성북동으로 돌아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게 된다. 1956년 김환기는 파리로 떠나고 가족들은 1960년대까지 그 집에 살게 된다. 현재 ‘노시산방’은 성북동 274-1번지(성북로 168) 수월암 부근이며 김환기의 두 번째 집은 성북동 32-1번지(선잠로 56)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옛 번지와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그런데 경치는 좋았지만 사는 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걸어다녀야 했으니 아마 힘들었을 겁니다. 당시 화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선생도 가난했고, 그저 운치를 찾아 그곳으로 와 사셨던 겁니다.
근원 선생은 수화 선생한테 그 집을 넘겨주고 떠나셨는데, 그 다음에 수화 선생도 얼마 안 있어서 수원고등농업학교의 이 교수라는 분에게 팔았죠.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그런데 경치는 좋았지만 사는 건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더운 날이나 추운 날이나 걸어다녀야 했으니 아마 힘들었을 겁니다. 당시 화가들이 대개 그랬듯이 선생도 가난했고, 그저 운치를 찾아 그곳으로 와 사셨던 겁니다.
근원 선생은 수화 선생한테 그 집을 넘겨주고 떠나셨는데, 그 다음에 수화 선생도 얼마 안 있어서 수원고등농업학교의 이 교수라는 분에게 팔았죠.
김용준은 이태준이 붙여준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노시산방(老枾山房)’을 당호로 하였다. 노시산방에는 감나무가 많아서 온 집안에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졌다. 김용준은 감나무와 어울리는 다른 나무와 화초를 심기도 했다. 대추나무, 밤나무를 키우고 목련, 모란, 월계, 옥잠 등을 손수 만든 온실에서 길렀다. 매화와 난초를 가꾸기도 했다. 특이한 모양의 괴석을 모아 마당에 두는 것도 그의 취미였다.
김용준은 이태준이 붙여준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노시산방(老枾山房)’을 당호로 하였다. 노시산방에는 감나무가 많아서 온 집안에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졌다. 김용준은 감나무와 어울리는 다른 나무와 화초를 심기도 했다. 대추나무, 밤나무를 키우고 목련, 모란, 월계, 옥잠 등을 손수 만든 온실에서 길렀다. 매화와 난초를 가꾸기도 했다. 특이한 모양의 괴석을 모아 마당에 두는 것도 그의 취미였다.
미술사학자이자 화가, 수필가인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살던 집이다. 근원은 우리나라 미술평론과 수필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출간된 『근원수필』은 지금까지도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남긴 그림은 많지 않다. 우정을 나눈 소설가 이태준, 정지용 등 문인들의 책에 삽화를 그리거나 장정裝幀을 해주었다. 이태준은 성북동 이웃으로 이사 온 근원에게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근원은 마당에 나무와 꽃을 심고 괴석을 두고 감상하며 지낸 이야기를 「겨울 달밤 성북동」,「 동일에 제하여」등 몇 편의 수필에 그 시절의 정취를 담아 남겼다. 1944년 근원은 노시산방을 화가 수화 김환기樹話金煥基, 1913~1974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가게 된다. 수화는 자신과 아내 김향안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樹鄕山房’이란 이름을 붙였다. 근원은 종종 옛 집에 들러 수화를 만나곤 했다. 몇 년 뒤 수화도 떠나고 두 예술가의 정취를 잃은 집은 세월 속에 잊혀져 갔다.
미술사학자이자 화가, 수필가인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살던 집이다. 근원은 우리나라 미술평론과 수필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출간된 『근원수필』은 지금까지도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남긴 그림은 많지 않다. 우정을 나눈 소설가 이태준, 정지용 등 문인들의 책에 삽화를 그리거나 장정裝幀을 해주었다. 이태준은 성북동 이웃으로 이사 온 근원에게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근원은 마당에 나무와 꽃을 심고 괴석을 두고 감상하며 지낸 이야기를 「겨울 달밤 성북동」,「 동일에 제하여」등 몇 편의 수필에 그 시절의 정취를 담아 남겼다. 1944년 근원은 노시산방을 화가 수화 김환기樹話金煥基, 1913~1974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가게 된다. 수화는 자신과 아내 김향안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수향산방樹鄕山房’이란 이름을 붙였다. 근원은 종종 옛 집에 들러 수화를 만나곤 했다. 몇 년 뒤 수화도 떠나고 두 예술가의 정취를 잃은 집은 세월 속에 잊혀져 갔다.
[ 46 ] 근원 김용준과 노시산방
1.노시산방
○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3년~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상허 이태준이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고 해서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지었으며, 1944년~1948년까지는 김환기와 김향안이 살며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 불리웠음.
3. 특이사항
○ 성북동 수월암 아래 위치하며 현재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
○ 김향안이 ‘환기미술관’건립 위해 매입하려 했으나 팔지 않음.
○ 보존가치가 있다고 사료됨.
[ 46 ] 근원 김용준과 노시산방
1.노시산방
○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3년~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상허 이태준이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고 해서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지었으며, 1944년~1948년까지는 김환기와 김향안이 살며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 불리웠음.
3. 특이사항
○ 성북동 수월암 아래 위치하며 현재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
○ 김향안이 ‘환기미술관’건립 위해 매입하려 했으나 팔지 않음.
○ 보존가치가 있다고 사료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