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현 성북구 안암로9가길 57, 49, 59)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철원애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애국단 대표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1923년 이른바 '김시현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폭탄밀반입시도로 김시현이 경찰에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같은 해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한성은행 자금 탈취를 도와주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1923년 성북구락부가 결성될 당시 총무를 담당하였다. 1924년에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 서기가 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때 그의 역할이 컸다. 1926년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정되는 한편 한양청년연맹 집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28년 무죄로 석방되었으며, 이후에도 형평사 내에서 활동 하였다. 서광훈은 1925년 이후 성북리를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의 당시 거주지는 성북리 173번지(현 성북로12길 8)이다.
성북구 석관동 124-9(한천로76길 42)에 위치하고 있는 시내버스 운수업체이다. 1961년 10월 29일 설립되었으며, 성북구 석관동과 중랑구 신내동에 있는 중랑공영차고지에 기점을 두고 있다. 2017년 9월 서울시 시내버스 인가현황에 따르면 상진운수는 현재 간선버스 1개, 지선버스 3개의 노선을 운행중이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종업원 수는 218명, 연간 매출액은 174억원이다.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경신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남대문 앞에서 서울역까지 만세시위행진을 하였다. 1920년 3월 4일에는 황해도 이도면 일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가 이듬해 체포되어 해주지법 송화지청에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90세인 1991년에 자택인 성북동 58-18번지에서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성북동에서 거주한 신문기자, 평론가, 저술가이자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배성룡은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이론개발과 실천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에는 좌우연합을 통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매진하여 김규식의 특사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성부 성북정 176-4(현 성북로 40-1)에 거주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소설가이다.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돈암동으로 이사해 몇 차례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돈암동 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남자네 집』(2004) 등에 담겨 있다. 1953년 결혼 후 70년대까지 보문동 한옥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에서 1960-70년대에 보문동 한옥주택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박완서는 한국전쟁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와 여성 억압의 현실, 거대화되고 메말라가는 도시 속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군상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